그녀와의 하룻밤

                                                                                                                저니

벌써 얼마가 흘렀는지 모른다...어느 해 종무식 날.

회사 동료 직원들은 하나, 둘  인사를 하고 떠나간다.

찾아온 자유를 누리고 즐기기엔 나의 허전한 가슴을 채울 길 없이

애꿎은 담배만 재떨이 수북이 쌓이던 시간.

홀로 덩그렇게 남겨져서 멀리 들리는 시계의 초침소리만 사무실을 울린다.

멀뚱히 들어간 어느 솔로 사이트.

그들만의 애닯은 사연들을 읽고 있었다.

갑자기 뜨는 채팅 신청 창.

"안녕하세요? 갑자기 노크해서 죄송합니다."

"네 괜찮습니다. 말씀하세요"

"제 이야기 들어주실 수 있어요?"

"네 말씀하시지요"

"님의 프로필을 보니 산본 이시던데 안산으로 와주실 수 있나요?"

황당한 제안이다.

'어떻게 할까?'

'말로만 듣던 꽃 뱀이 아닐까?'

'아니 말투로 봐서는 그런 것은 아닐 것 같고...'

'뭐 어때? 나도 드디어 꽃 뱀한테 물려 보는 거야.'

무슨 생각이었는지 마음이 끌리는 대로 선선히 응했다.

4호선 오이도 역.

짙은 녹색 아반테의 헤드라이트가 깜빡인다.

수수한 모습의 그녀는 전혀 꽃 뱀 같지가 않다.

"나와 주셔서 감사 드려요.  오이도 가보셨나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니 오이도는 지척이다.

오이도의 바다는 짙은 겨울의 향기에 눈이 오려는지 푸른 소금기를 품어내고 있다.

말없이 걷는 두 사람.

참 오랜만에 느끼는 기분이다.

바다는 두 사람을 붙였다 떨어지게 했다 심술궂은 장난을 친다.

"조개나 구워 먹읍시다."

나의 제안에 고개를 끄덕이며 선선히 응하는 그녀.

탁탁 소리를 내며 입을 벌리며 붉게 익어가는 조개들.

두 사람의 말없는 잔이 오고 간다.

......

오랜 침묵을 깨고 갑자기 울음이 터지는 그녀.

얼마가 흘렀을까? 한참 동안 흐느끼던 그녀가 말문을 연다.

그녀의 이야기는 이렇다.

그녀의 남편은 건설 일을 했다. 누구 부럽지 않게 아들 딸 낳고 살고 있었는데

어느 날 갑자기 이혼을 요구해왔다.

특별히 싸움을 한 것도 없이 부부 사이에 별다른 일이 없던 일상적인 결혼 생활이었는데

이런 당황스럽고 황당한 일이 벌어진 것이다.

정신을 차리고 상황을 알아본즉, 남편에게는 여자가 있었고

벌써 몇 년 전부터 남편과 결혼하려고 상대 측 여자는 자신의 가정을 버리고

남편과 살림을 차렸다.

출장이 잦아서 건설 현장일 이겠거니 하고 믿었던 것이 이런 큰일로 된 것이다.

남편의 이혼요구가 있은 후, 그 여자가 찾아와서 당당히 자리를 내놓으라고 했다.

여러 복잡한 시간이 있었지만, 아이들도 챙기지 못하고 쫓겨나다시피 밀려났고

그렇게 황망하게 갈라선지 두 해가 지난 오늘 아침.

가끔 통화를 하던 초등학교 딸아이에게 정말 천추에 한이 되는 말을 들은 것이다.

"엄마 이제 그만 전화해!"

"엄마가 전화하면 새엄마하고 아빠하고 싸워 너무 싫어!"

"엄마도 엄마 길을 가! 전화하지 말아줘."

딸 아이의 절규하는 이 말은 그녀의 억장을 무너지게 했다.

그런 그녀가 내 가슴속에 고개를 묻고 울고 있다.

눈물을 잊고 살던 메마른 나의 두 눈이 붉어지며 눈물이 고인다.

한참의 시간이 흐른 뒤. 고개를 든 그녀.

"오늘 같이 있으면 안될까?"

나의 말없는 끄덕임에 나의 허리를 힘껏 끌어 안는다.

거친 숨이 가득한 오이도의 밤 하늘을 함박눈이 소리없이 덮어가고 있다.

신년을 맞이하고 몇 일 후.

핸드폰에 남아 있는 전화번호를 누르는 나.

앞으로 서로 볼 수 없을 거라는 그녀의 말을 들었지만...

"지금 거신 전화는 고객의 사정으로..."

여운처럼 남아 있는 주인 잃은 전화번호만이 묵혀진 그 해 마지막 날을 기억하게 한다.

마치 메밀꽃 필 무렵 그 방앗간의 빈 물레 돌아가는 소리처럼......

오늘 종무식겸 회식을 한다고 합니다.

벌써 한해가 꿈처럼 흘렀습니다만, 오늘은 집으로 직행 하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