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숙소로 정해진 2인 1실 침대방. 대회기간 동안 필자 혼자 사용했다. 책상과 침대만 있을 뿐 옷걸이도 없고 쓰레기통도 없다. 소형 냉장고 정도는 기대했는데...)      

아무리 기숙사라고 해도 화장실만은 침실 근처에 위치하여 두세 세대가 공용으로 쓰는 정도로 생각을 했는데 여자용이라는 팻말이 붙은 화장실 입구만 하나 보일 뿐 남자용이라는 팻말은 전혀 보이질 않았다. 필자가 체류하는 2층에는 여자 화장실만 있고, 남자화장실은 1층에 있겠지 하고 아래 층으로 달려가 보았지만 역시 여자용만 있고, 남자용은 눈에 뜨이질 않는다.

알고 보니 이 기숙사가 여자용 기숙사이기 때문에 애초부터 남자용은 없었던 것이다. 하루 밤에 화장실 2번 정도 다녀오는 것이 생활습관처럼 되어 있는 필자로서는 여간 신경 쓰이는 일이 아니다. 그러니 처음 당하는 사람으로서  황당 할 수밖에.

자리에 누워 이번 행사에 관한 안내 책자를 읽다가 나도 모르게 잠이 들었다.

7월  29일(일요일) 구름 약간.

엊저녁만 해도 구름 한 점 없던 청명한 하늘이 밤 사이 천둥 번개를 동반한 소나기 탓에 밤잠을 설쳤다. 아침에 숙소에서 나와 식당으로 향하던 같은 기숙사 투숙객이 어제 밤 천둥 번개 소리를 들었느냐고 묻는다. 아! 밤잠을 설친 사람은 나뿐만이 아니었구나.

오늘은 모든 공식 행사가 시작되는 첫번째 되는 날이다. 오전 9시부터 유에스 오픈 기전의 시작과 함께 각종 기전이 시작된다. 필자는 미국 바둑협회(American Go Association – AGA)에서 정해준 아마 5단의 자격으로 유에스 오픈전에만 참가신청을 했기 때문에 하루 한 대국씩만 잘 두면 된다고 생각했다. 안내 책자를 보기 전까지는 그렇게 많은 기전이 있는 줄 미처 알지 못한 이유도 있었으나, 가능하면 많은 장면을 목격하고 자료수집에 시간을 할애하기 위하여 다른 기전 참가를 포기했다.

(사진: 아마 4단 이하 대국자들의 결전장인 주 경기장. 약 450석 정도가 된다.)

주 경기장인 대강당이 오전 9시가 되면서 빈 공간이 없을 정도로 참가자들로 꽉 찼다.

그러나 9시 반이 되어도, 10시가 되어도 집행진이 보이지 않는다. 여기저기에서 이미 바둑판이 벌어져 무료한 시간을 달래고 있다. 안내책자에 보면 첫날인 오늘은 준비관계로 개회선언이 다소 늦어 질 수 있다고 예고는 했지만 준비상황을 설명하는 사람도 없고 그때까지 대진표도 보이지 않았다.

“역시, 이 사람들 경험 부족이 노출 되는구먼! 바둑하면 동양이지.”

다소 안도감마저 느껴진다. 그러나 이 안도감은 진행자의 사후 공개사과와 설명이 있은 후 필자의 자만심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여러 곳에서 비행기로 또는 밤사이 자동차로 오는 참가자들을 위해서 신청서 접수시간을 오늘 아침 8시까지 연장하기로 집행위원회에서 결정한 바 있고 늦게나마 도착한 이들을 대진표에 반영시키느라 준비가 늦어진 것이다.

잠시 비교가 된다. 만일 동양 권에서 이런 행사가 있었다면 어떠했을까?

십중팔구 개회 하루 전날까지는 무조건 신청 접수를 마감하고 늦게 도착한 사람에게는 나 몰라라했을 것이다. 이 경우 동양권의 방식이 더 좋은 방식인지, 서양권의 방식이 더 좋은 방식인지?

10시 30분, 드디어 이번 행사의 총 책임자인 피터 낫세르(Peter Nassar) 박사가 연단에 올라섰다. 그는 이 행사가 진행되고 있는 밀러스빌 대학의 동물학 교수이며 기력은 4급이다.

우선 개회가 늦어진 것에 대하여 사과하고, 이번 행사의 의의와 참가자 현황, 진행 절차 등을 설명하고, 일본인 통역이 이를 일본어로 통역했다. “ 역시 여기서도 일본 판이로군!”

곧 이어 연단 뒷편 대형 스크린에 대국자의 번호 이름 흑번/백번 테이블 번호 등을 표시한 대진표가 동영상으로 서서히 뜨고 있다. 이름이 알파벳 순서로 표시되어 순번 찾는 시간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필자는 지하층 별관 대국실로 지정되었고, 상대는 후란코이즈(Francois).

11시 경 드디어 후란코이즈와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마주앉았다. 긴장이 되는 순간이다. 진행자가 들어와 대국에 대한 일반 규칙과 계시기 조작법, 그리고 대국 개시를 선언했다.

(사진: 캐나다 퀘벡에서 동생과 함께 참가한 후란코이즈 아마 5단. 첫날 첫번째 대국에서 정석선택을 잘못해 필자에게 억울하게 패했다. 배우 뺨치는 미남이다.)

긴장을 풀어야 할 필요가 있다. 인사를 나누고 서로 상대방에 대해서 간단한 질문이 오고 갔다. 본 성명은 Francois Gourdeau, 프랑스계 캐나다 국적이며, 퀘벡에서 살고 있는데 이번 행사에는 자기 동생과 함께 3명이 왔다고 한다. 캐나다에는 약 200명 정도가 정기적으로 모임을 갖고 바둑 수련을 하며, 주로 인터넷바둑 IGS를 이용한다고 한다.

IGS는 1992년 2월에 뉴 멕시코 대학에서 첫 시범을 보인 이래 수정에 보완을 거듭하며, 지금은 미국뿐만 아니라 유럽 지역 애기가들에게 널리 애용되는 인터넷 바둑 사이트다. 콘텐츠는 주로 일본인들에 의하여 만들어지며 소개되는 내용도 일본의 기성전, 명인전, 본인방전 등 일본 기계에 관련된 사항들을 주로 다루고 있다.

필자의 흑번으로 시작된 대국은 2시간 반 만에 흑 불계승으로 끝났는데 포석단계에서 흑은 양화점 포석이고, 백은 양 소목으로 대응해 왔다. 흑의 한칸 높은 걸침에 백은 날일자협공을 해와 축이 성립되지 않는  정석을 취해 초반부터 국면을 유리하게 이끌어 나갈 수 있었다.

초반 비세를 만회하기 위하여 상대방이 필사적으로 물고 늘어지는 공격을 감행해 한때는 아찔한 순간도 있었으나 끝까지 우세를 지키며 선전을 했다. 필자의 소비시간은 25분인 반면에 상대방은 120분을 다 소진할 정도로 진지했다. 주위를 둘러보니 판이 반도 안 짜여진 대국이 대부분이었다.

(사진: 아마 5단 이상 대국자들의 결전장인 지하층 보조 경기장.)

행사기간 동안 감명을 받은 것은 모든 대국자들의 자세가 아주 진지하다는 것이다. 돌 하나라도 함부로 놓는 법이 없다. 여러 방향으로 검토를 한 후 착수를 하기 때문에 대부분 주어진 시간을 다 소비하게 된다.

4-5급의 기력 소유자도 신중하기는 마찬가지다. 기초부터 철저하게 다지는 습관이다. 흔히 우리가 하듯이 착수 먼저 하고 후에 생각하는 버릇은 아예 처음부터 철저하게 배제하는 모습이다. 이 사람들의 평소 생활 습관이 실용적이기 때문에 바둑 또한 실용적으로 두는 것 같다.

바둑의 큰 틀을 짜는 것은 우리네와 별반 차이가 없는 것 같다. 다만 경험에 의한 잔수에서  동양 사람들에게 많이 밀린다.

결국 후란코이즈가 돌을 던지며 잘못된 점을 지적해 달라며 초반 복기를 요청한다. 그는 엊저녁 친구와 함께 이 정석을 연구하느라 몇 시간을 소비했다고 한다. 그런데 이런 변화는 전혀 검토한 적이 없어 매우 당혹했다고 고백했다. 결국 축이 관건인데 대각선에서 축이 불리할 경우에는 이 정석이 절대 불리한 정석이라고 풀이해 주니 매우 고마워 했다.

그 후로 후란코이즈와는 더욱 친근감이 생겨 점심식사를 같이 하고 둘이 기념사진도 찍고 이 메일 주소도 교환하여 차후로도 계속 연락을 하기로 했다.

(사진: 재미교포 권영국 씨와 함께. 이국에서 한국인을 만나니 여간 반갑지 않았다.)

저녁 6시경, 식당에서 권영국 씨를 만났다. 외톨이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한국인을 만나니 여간 반가운 일이 아니다.
권영국 씨는 뉴욕에서 살고 있는 교포로 이번 행사를 위해서 약 3시간 동안 차를 몰고 어제 저녁에 도착했다고 한다. 현재 에이지에이(AGA-미국 바둑협회)에 아마 7단으로 등록되어 있으며, 뉴욕 바둑대회에서 여러 번 우승한 바 있고 그 성적이 인정되어 2007년도 북미주 잉 마스터즈 토너먼트 지역예선 통과자로 16인 본선진출 토너먼트에도 참가하게 되었다.

그는 또 미국 바둑협회에서 발행하는 전자 신문에도 특별한 바둑 마니아로 소개된 적이 있다. 그도 오늘 아침에 치러진 유에스 오픈전에서 승리하여 좋은 출발을 보였다. 오랜 이야기 끝에 그가 필자의 대학 1년 후배라는 것이 밝혀져 화제는 어느새 40여년 전 학창시절로 돌아가 그때의 추억과 아직도 기억에 남는 스승들에 대한 이야기로 시간가는 줄 몰랐다. ( 5편에서 계속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