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4일(토요일) 쾌청

오늘은 공식 행사의 마지막 날이다.7월 28일부터 8일간 계속된 2007년 23회 미국 바둑축제(US Go Congress) 대단원의 막을 내리는 날이다.
최종일을 맞는, 평소와 다소 다른 분위기는 식당에서부터 감지된다. 옆 테이블에서 간간히 들려오는 대화 내용은 "언제 떠나느냐"와 "어디로 가느냐"  "어떻게 가느냐" 등이다. 셋이 모인 우리 테이블도 예외는 아니다.
 
황성규 옹은 오전 중에 부인께서 차를 가지고 온다고 했다. 집이 볼티모어이기 때문에 2시간 정도면 충분히 집에 닿을 수 있다고 했다. 필자에게 하루이틀 묶어가라는 친절도 보였다. 그러나  필자의 비행기 탑승지가 방향이 다른 필라델피아이기 때문에 정중하게 거절할 수밖에 없었다. 
집이 뉴욕인 권영국 씨도 점심식사 후 즉시 출발한다고 했다. 그동안 짧은 시간이나마 같이 지낸 인연이 어느새 깊은 골이 되어 서운한 감마저 일으킨다. 분위기가 처연해 질 수밖에 없다. 연락처를 서로 교환하며 서운한 마음을 달랠 수 밖에 없다.

건너편 테이블에 어제의 우승자 장밍주 7단이 일행들과 함께 자리를 잡는다. 잽싸게 달려가 손부터 잡았다. 어리둥절한 표정이다.
"챔피언된 것을 축하한다!" 
그제야 얼굴에 미소가 번진다. 한국에서 온 유일한 출전선수라고 소개하자 금방 얼굴이 활짝 열리며 매우 반가워한다. 한국기원소속으로 있는 장주주 9단과 루이나이웨이 9단이 바로 자기 동생이고 제수라고 한다. 한국인이 반가울 수밖에 없다.

필자의 수첩에 한문으로 자기 이름과 장주주, 루이나이웨이 이름을 차례로 적어주며, 연락을 해 놓을 터이니,  한국에 돌아가면 꼭 만나 보라고 한다. 기념 촬영을 위하여 멋지게 포즈를 취해 준다.

장밍주(Mingjiu Jiang) 7단은 1957년 중국 산서지방에서 태어났다. 현재 나이 만 50세, 6 세부터 바둑을 두기 시작하여 16세에 프로로 전향, 18세에는 국가 바둑 대표팀에 합류하였다. 그는 프로 생활을 영위하는 동안 많은 제자들을 가르쳤으며, "정석에 관한 모든 것" 등 저서를 내기도 했다. 현재는 캘리포니아에서 제자들을 가르치고 있으며, 온-라인 게임 "http://www.gomasters.com "을 운영하고 있다. 

기량 면에서는 현재 한국에서 활동하고 있는 그의 동생 장주주 9단이 더 좋은 기록을 가지고 있다. 장주주 9단은 한국에 오기 전 미국에서 활동하는 동안 1995년부터 2002년까지 8년간 계속해서 미국 마스터즈 토너먼트의 우승자였으며 결승전에서는 차민수를 2회, 루이나이웨이를 3회, 마이클 레드먼드를 1회, 펑윈을 1회, 그리고 형 장밍주를 1회씩 2 : 0 또는 2 : 1의 비율로 격파하여 장기 집권을 한 기록이 있다.

10시 정각, 진행자 피터 박사의 오늘 아침 공지사항은 다른 때와 달리 길기도 하다. 그도 대단원의 막을 내리면서 남다른 감회를 느끼는 모양이다. 
어제 의원 총회에서 결의된 새로운 이사진의 명단을 발표하고, 내년도 24회 미국 바둑축제 개최지를 서부 오레곤 주 포트랜드로 결정했다는 내용과, 평생 회원 가입비를 $1,000로 정했다는 내용, 오늘 오후 6시부터 별도 준비된 만찬장에서 시상식과 함께 만찬이 있을 예정이니 전원 참석 해 달라는 내용을 공지했다. 그리고, 23회 미국 바둑 축제 로고가 인쇄 된  티-셔츠를 매당 $15씩에 추가 판매한다는 광고와 그 동안 습득된 유실물을 많이 보관하고 있으니 찾아가라는 어나운스로 공지사항을 마쳤다.

10시 30분 경, 드디어 6일째 유에스 오픈전 마지막 공식대국, 상대는 잭슨 앤듀르, 유럽계 미국인. 이 녀석도 20대 중반인데 덩치가 커 30대 중반쯤으로 보인다. 
필자의 집백으로 시작된 대국은 초반에 벌써 대세가 갈렸다. 상대는 역시 대사정석을 제대로 소화하지 못했던 것이다. 상대방은 자연 시간 끌기 작전에 몰입했다. 필자로서는 지루한 시간의 고통을 감내 하는 수밖에 없었다.

대국 개시 후 2시간이 경과 한 시점, 갑자기 믿기지 않는 불의의 사태가 발생했다. 바둑판은 바야흐로 중반전에 접어들어 서로 물고 물리는 혼전의 양상인데, 옆 테이블에서 대국하던 선수 중 한 선수가 봉수를 하고  테이블을 빠져 나오다 그만  필자의 상대가 테이블에 놓아 둔 음료수 병을 쳐 음료수가 쏟아지며 바둑판이 엉망진창이 되고 말았다. 도저히 복구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사고를 친 사람은 미안하다는 말을 되풀이하며 어쩔 줄 몰라했으나, 필자와 상대방은 바둑판만 내려다 볼 뿐, 난감할 수밖에 없었다. 점심시간도 되었고, 복기할 마음도 없어 진행자를 불러 무승부로 처리하기로 합의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정오 식당, 황성규 옹과 부인, 그리고 권영국 씨와 함께 점심식사를 했다. 황옹의 부인과 인사를 나눈 후에는 잠시 침묵이 계속되었다. 각자 헤어져야 할 순간을 머리속에그리며 아쉬워하고 있는 것이다. 후식을 먹고 커피 잔을 비울 때까지도 누구도 입을 먼저 열려고 하지 않았다.  

그들이 아쉬운 작별의 인사를 나누고 떠난 후 캠퍼스 내의 풀밭을 걸었다. 파란 하늘은 구름 한점 없이 쾌청하다. 나그네의 시름 따윈 개의치 않는 것 같다. 갑자기 이 낮선 먼곳에 홀로 남았다는 인식이 마음 한구석을 헤집는다. 처음으로 오랜만에 외로움을 느낀다. 서울에 있는 친구들과 타코마에 있는 가족들 얼굴이 잠시 오버랩 되었다가 사라진다. 사람이 만나고  헤어지는 것은 인지상정인 것을...

오후 6시, 본관 건물과는 멀리 떨어져 있는 식당 전용 2층 건물에서 시상식과 만찬이 준비되었다. 취재하기에 편한 자리를 차지하기 위하여 20분 전에 식장에 도착하였으나 그 큰 홀 전체가 이미 사람들로 꽉 채워져 있었다. 홀 전체에 빈틈 없이 들어찬 10인용 원형 테이블에 빈자리가 보이지 않는다. 홀 입구 쪽에 추가로 배치한 테이블 한쪽 구석에 겨우 빈자리 하나를 찾아내고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이 사람들도 자리다툼에는 배달민족을 능가하는군!"   
나중에 온 사람들은 결국 복도에서 오랜 시간을 서성이는 수밖에 없었다.

시상식은 두 시간 넘게 이어졌다. 주최측의 대회 진행에 관한 경과 보고, 각 스폰서의 소개, 새로운 이사진들의 신임 인사말이 이어졌고, 대회 기간 동안 개최된 모든 종목의 우승자와 준우승자를 차례로 호명하며 시상이 이루어졌다. 모든 종목의 급수별 또는 단위별 우승자와 준우승자들에게 수여되는 상은 주로 현금이 아닌  트로피와 상패뿐이다. 단, 잉 마스터즈 토너먼트의 종목별 우승자에게는 상패와 함께 약간의 상금이 수여되었다.

시상식의 백미는 잉창기 재단에서 후원한 미주지역 잉 마스터즈 토너먼트의 우승과 준우승 시상식이다. 우승자 장밍주 7단에게는 트로피, 상패, 상금  일만 불이 수여되었고 준우승자 펑윈 9단에게는 작은 트로피, 상패, 상금 삼천 불이 수여되었다. 우승자와 준우승자를 호명할 때는 여기저기에서 휘파람과 함성이 장내 열기를 한층 더 돋구었다

곧 이어 식사, 부페로 준비된 음식물 테이블은 두 곳에 준비되었으나, 순식간에 몰려든 식객들로 만리장성을 쌓았다. 음식을 접시에 담아 테이블로 돌아오니 옆에 앉았던 털복숭이 수염을 한 중늙은이는 안 보이고 은백색의 머리를 곱게 빗고 투피스 정장을 한 할머니가 앉아 있었다. 가는 테의 돋보기 안경을 낀 이 할머니는 얼굴의 잔주름으로 보아 70대는 되어 보이는데 앉은 자세가 반듯하고 말하는 억양이 매우 품위가 있어 보였다. 이 대학의 권위 있는 한 교수려니 생각했다. 호기심이 동할 수밖에 없다.

상대방의 정체를 알아내기 위해서는 자기 소개부터 하는 것이 순서다. 한국에서 온 선수라고 하자  의외로 깊은 관심을 보인다. 필자에게 말할 기회도 주지않고 스스로 아는 바를 역설한다. 최근의 한국바둑 프로들에 대해서도 많이 알고 있었다. 이창호, 이세돌, 박영훈, 최철한을 발음할 때는 "초이촐행"으로 발음하여 웃음을 자아냈다. 일본보다는 중국이 강하고 중국보다는 한국이 훨씬 강하다고 옆 사람에게 자랑스럽게 설명한다. 식사가 진행되는 동안에도 취재를 하는 쪽은 그녀이고 취재를 당하는 쪽은 필자다.

그녀가 물을 마시는 사이 궁굼했던 질문을 던졌다. 나이는 육십대 중반이고, 필라델피아에서 왔으며, 교직 생활을 하다가 은퇴하여 현재는 사회 봉사활동을 하고 있다고 했다. 바둑은 육년 전부터 두기 시작 하였으며, 최근에 와서 부쩍 바둑에 심취하기 시작했다. 기력은 9급. 젊었을 때 체스를 즐겨했는데 바둑을 배운 후 부터는 바둑에만 열중한다고 했다. 미국바둑협회에서 주기적으로 보내주는 바둑 전자신문을 보는 것이  매우 행복한 시간이라고 했다.

식사가 끝난 후에도 홀 안의 열기는 좀처럼 가시지 않았다. 사회자가 여흥을 돋구기 위하여 상품을 걸고 노래 자랑과 피아노 연주 경연을 진행했다. 모두가 이 분위기를 오래도록 즐기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나는 사람이 없다. 
밤 11시가 넘어서야 행사가 끝이 났다. 헤드 테이블에 있는 김명완 사범을 찾았다. 김사범은 다음 날 뉴욕으로 간다고 했다. 주위 사람들과 아쉬운 작별을 고하며 숙소로 발길을 돌렸다. 이제 비로소 2007년 23회 미국 바둑 프로-암 오픈전 8일 간의 대단원의 막이 내린 것이다. 총총한 밤하늘의 별들이 무수히 손짓을 한다.

                                                  -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