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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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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처음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응씨배 세계바둑대회 결승 최종국인 5국이 열리고 있는 싱가포르의 웨스틴스탠포 호텔 특별대국실. 최종국이라 다시 돌을 가렸다. 당시만 해도 덤에 대한 부담이 커 누가 백을 쥘지에 큰 관심이 쏠렸는데 안타깝게도 조국수가 흑을 쥐게 되었다. 잠시 불길한 예감이 들기는 했으나 어차피 단판 승부는 담력의 싸움. 어쩌면 흑을 들게 된 것이 더 공세적인 자세를 갖게 하여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한 마리 백두산 호랑이처럼 조국수의 포효하는 모습이 순간 카메라에 잡혔다. 1년여의 긴 여정을 돌아 이제 원점에서 다시 시작하는 순간이다.
뭇 강호들을 하나씩 제거하며 준준결승과 준결승을 거쳐 오는 동안 숨가쁘게 달려야 했고, 때로는 처절하게 승부를 다투어야 했고, 또 상처도 많이 받았다. 아슬아슬한 순간과 고비를 수없이 넘어야 했다.
10월 22일 서울에서 둔 린 하이펑과의 준결승 2국에서는 빈삼각을 세 번이나 두어 5집 승하는 투혼으로 바둑계의 전설을 만들기도 했다. 뭇 역경을 헤치고 오늘 이 자리 최종국에 임한 것이다. 조국수의 눈꼬리 눈썹은 오래가지 않았다. 카메라의 플래시가 터질 즈음에서는 이미 평온을 되찾은 모습이다. 백을 쥔 녜웨이핑의 얼굴에는 백을 잡았다는 안도감에 순간이나마 엷은 미소가 입가에 번졌다. 4국을 치른 후 필자는 녜웨이핑의 동정을 살폈었다. 호텔 프런트 키맨에게 확인한 바에 의하면 지난 2일 동안 그는 두문불출이었다고 했다. 식사도 방에서 시켜 먹는 때가 오히려 많았다고 했다. 그때부터 필자는 막연하게나마 조국수의 승리를 확신하게 되었다. 팬다곰이 긴장하고 있다는 얘기가 아닌가.
사실 제4국이 실질적인 결승국이나 다름없었다. 양 대국자가 여한이 없을 정도로 혼신의 기와 힘을 소진한 한 판이었기 때문이다. 승자에게는 투지와 지혜가 배가되는 계기가 되었고 반대로 패자에게는 실의와 절망과 초조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암흑의 길을 한동안 걷게 하는 일국이었다. 녜웨이핑의 근황을 조국수에게 들려주었을 때 조국수의 반응은 어떠했나? 빙긋이 미소만 짓고 있었다. 영리한 그도 이미 상향곡선과 하향곡선의 차이점을 간파하고 있었던 것이다. 전의를 추스르는 데 일조가 되었으리라. 지난 2일 동안 조국수는 한껏 마음을 다스리고 관광도 다니고, 뒤늦게 합류한 국내 기자들 또는 일본 친구들과 대화를 나누며 시간가는 줄 모르게 지냈다. 승자와의 대화는 항상 엔돌핀이 돌게 마련이다. 웃음과 가벼운 농담이 끝없이 이어졌다. 이틀 동안 호텔 방에서 바둑판을 앞에 놓고 골몰하였을 녜웨이핑의 모습을 상상하면 고소함을 금할 길이 없었다. 조국수의 첫점이 우상귀 화점에 놓이고 녜웨이핑의 백돌이 좌하귀 화점에 놓인 시점에서 카메라의 플래시가 터지고 곧이어 진행자가 대국장 안에 있는 모든 관전자들을 밖으로 퇴장시켰다. 한국측 검토실은 윤기현 단장, 김학수 4단, 어제 새로 합류한 박치문 기자와 국내 기자들, 일본인 친구들, 그리고 교민 애기가들이 입추의 여지가 없을 정도로 꽉 찼다.
판 위에 돌이 하나씩 늘어간다. 윤 단장과 김학수 4단이 따라 둔다. 박치문 기자도 옆에서 거든다. 일본인 프로는 돌의 흐름을 지켜보고만 있다. 다른 대국 때와는 전혀 다른 양상이다. 이번에는 조국수의 돌이 귀를 파고들고 녜웨이핑의 백돌은 4선 위로 뜬다. 4국 때와는 정반대의 국면이다. 서로가 4국의 처절했던 악몽을 애써 피해 가려는 의도로 보인다.
35 시점에 이르러 흑은 우상귀, 우하귀, 그리고 좌하귀를 확보하고 백은 하변과 우변에 세를 쌓아가고 있다. 백의 36, 상변 허허벌판에 아무 연결 고리 없이 말뚝을 박는다. 이로써 흑은 실리, 백은 세력 작전으로 방향이 설정됐다. 어느 정도 실리를 확보한 흑은 37부터 115까지 중앙에 깊숙이 침투하여 발 빠르게 근거를 마련한다. 흑돌을 쫒는 백돌에 어쩐지 기력이 부족해 보인다. 4국 때와 같은 불꽃 튀는 접전이 없다. 조국수는 2단젖힘을 과감하게 하는 반면 녜웨이핑은 젖힘 없이 상대가 하자는 대로 따라한다. 녜웨이핑의 장기인 인내와 끈기가 오히려 도처에서 기회를 상실하게 하고 있었다. 돌의 흐름도 역으로 가는 감이 있다. 발 빠른 조국수의 행마를 따라잡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115 시점에서는 흑이 거대했던 백의 진영을 헤집어 놓아 백이 집을 만들 수 있는 공간이 남아 있지 않게 되었다. 오직 엷게 포진한 우상귀만이 공격의 대상이다. 종반 비세를 의식한 녜웨이핑의 최후의 시도, 우상귀 말을 포획하기 위하여 장시간 수읽기로 침투, 압박, 총공격을 시도하였으나 오히려 흑진 속에 갇힌 백돌 5 마리가 거꾸로 잡혀 대국은 싱겁게 끝나고 말았다. 145수 만에 끝난 단명국이다. 순간마다 가슴 조이며 경천동지의 파노라마를 기대했던 관전자들은 어이없는 종국에 할 말을 잊었다. 한국측 검토실에서는 함성과 손뼉이 건물 전체를 흔들었지만, 중국측 검토실에서는 비통한 신음소리와 낮게 울부짖는 소리가 간간이 흘러나왔다. 역사적인 대국은 그렇게 끝난 것이다.
“조훈현 바둑황제 등극!"
일행은 대국실로 내달렸다. 그 순간 왜 그렇게 조국수의 얼굴이 보고 싶었는지 그 이유는 18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알 수 없다. 먼저 달려온 참관자들에게 둘러싸인 조국수는 상기된 얼굴로 한국말로, 또는 일본말로 참관자들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조국수가 우리의 호위를 받으며 대국실을 퇴장한 한참 후에도 녜웨이핑은 4국 때와 마찬가지로 바둑판을 응시하며 오랫동안 그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 그날 저녁 호텔 안에 있는 연회장에서 시상식이 열렸다. 사회자가 시상식을 진행하는 동안 조국수의 얼굴은 동안이 되어 미소가 지워지질 않았다. 반면 녜웨이핑의 굳어진 얼굴 표정은 좀처럼 펴질 줄 몰랐다. 카메라의 플래시는 녜웨이핑의 이런 표정을 놓치지 않았다. 사회자의 소감 질문에 녜웨이핑이 뜨문뜨문 답했다. "면목이 없다. 꼭 우승하려고 했는데... 조가 워낙 잘 뒀다. 다시한번 기회가 왔으면 한다." 우승자인 조훈현을 호명할 때는 여기저기에서 박수가 터져 나오고, 카메라 플래시가 더 요란하게 터졌다. 역시 필자가 통역을 했다. "우선 이런 대회를 마련해 주신 잉창치 선생님과 수고해 주신 여러분에게 먼저 감사를 드리고 싶다. 제가 이번에 우승을 하게 된 것은 운이 많이 따라 주었고 특히 상대방이 어이 없는 실수를 하여 저에게 기회가 온 것 같다." 우승 트로피와 편지지만한 크기의 붉은 사각 봉투가 수여됐다. 이 붉은 사각 봉투는 개봉할 때까지 2시간 동안 필자가 보관하고 있었다. 내용물이 어떻게 생겼는지 궁금하기 이를 데 없었다. 시상이 끝나고 그 자리에서 저녁 만찬이 시작되었다. 방 전체를 가득 메운 10인용 중국식 테이블에는 빈자리가 없었다. 만찬도 어느 정도 무르익어갈 즈음, 중국인 사회자가 급히 필자를 찾는다. 달려가 본즉 한국 대통령의 전화라고 한다. 누가 장난을 치고 있나? 의아해 하며 수화기를 건네받자 굵은 목소리가 청와대라고 한다. 뒷통수를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다. 순간, 수화기를 한 손에 든 채 홀에 대고 큰 소리로 "조국수! 조훈현 국수!" 목청껏 불렀다. 웅성이던 장내가 갑자기 조용해지며 시선이 이쪽으로 집중된다. 놀란 관중들을 진정시키기 위하여 사회자가 멘트를 한다. “대한민국의 대통령께서 우승자인 조훈현 씨에게 축하 메시지를 보내려고 합니다.” "고맙습니다. 예, 예. 운이 좋았던 것 같습니다. 예, 예, 감사합니다........" 노태우 대통령의 축하 메시지에 긴 말 못하고 짧게 짧게 고맙다는 말만 되풀이 한다. 당시 불안한 정국에 마음을 태우고 있던 대통령에게도 국민들이 공감하는 이 기쁜 소식은 크나 큰 선물이 되었으리라. 만찬도 중반을 넘어 섰을 즈음, 서울 시간 오후 10시, 서울의 방송국과 전화 인터뷰가 준비 되어 있다고 했다. 조국수와 윤 단장 그리고 필자는 주위에 양해를 구하고 급히 조국수 방으로 이동했다. 서울 시간 10시 정각, 전화벨이 요란하게 귀를 때린다. 10분 정도 전화 인터뷰가 계속되었다. 사전에 준비를 한 모양이다. 정리된 답변이 막힘없이 나온다.
전화가 끝나고 그때까지 옆에 끼고 다니던 붉은색 사각 봉투를 조국수에게 건넸다. 그러나 받지 않고 필자에게 개봉하라고 한다. 손끝에 짜릿함을 느끼며 접 마디를 따라 조심스럽게 개봉했다. 그러나 예견했던 수표는 안 나오고 또 하나의 4절지 반 정도 되는 크기의 붉은 색 봉투 가 나온다. 주최측의 정성이 보이는 듯하다. 이 봉투를 개봉하던 순간의 기억은 18년이 지난 지금도 생생한 추억으로 남아 생각할 때마다 가슴이 뛰는 것을 느낀다. 작은 봉투를 개봉하자 네모반듯한 수표 한 장이 나온다. 다른 것은 안 보이고 ‘400,000’이라는 숫자만 크게 부각된다.
"야! 이거야! 이거! 유에스 40만 불!" 수표를 두 손으로 높게 치켜들어 불빛에 비춰보는 시늉조차 즐거운 예식이다. 조국수에게 건넸다. 수표를 건네받은 조국수, 즐거운 미소를 지으며 들릴 듯 말 듯 혼자 중얼거린다. "이것 때문에 그 많은 고생을 했어!" 1989년도 당시 환율은 1000 : 1 정도되었다. 우리나라 화폐로 환산하면, 4억 원이다. 이 정도 금액이라면 고급 아파트 4채는 능히 살 수 있는 금액이다. 준 재벌에 속할 수 있는 액수다. 백만 원 단위의 국내 타이틀전과 비교하면 실로 상상을 초월하는 고액이다. 이 금액이 황제 등극의 대가로 치러진 것이다. 이 대가가 세계바둑계를 일본과 중국의 평면 구도에서 한국, 일본, 중국의 삼각 구도로 재편되고 바둑상금의 고액화가 이루어져 전 세계 바둑계를 한 단계 업그레이드 시키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음을 아무도 부인할 수가 없다. 조 황제 일행이 떠나고 한동안은 폭풍 후의 정적이 감도는 듯했다. 그러나 교민들 사이에는 연일 조국수의 바둑황제 등극에 관한 화제가 끊이질 안았다. 그 화제는 골프장에서도 이루어졌고 식당에서도 이루어졌으며, 술자리에서는 열을 올려 언성을 높이는 경우가 많았다. 대사관의 분위기는 한층 더했다. 대사께서 전 직원 부부 동반하여 자축연을 베풀었다고 했다. 다음 날 배달된 신문을 보고 필자는 크게 뜬 눈을 감을 수가 없었다. 월계관을 쓰고 태극기를 흔들며 카퍼레이드를 하는 조 황제의 사진이 전면의 반을 차지하고 있었다. 국내의 반응이 이처럼 대단하리라고는 예측을 못했던 것이다. 배달된 신문마다 일색이다. 기사 끝머리에는 싱가포르 교민 기우회장인 필자가 지대한 공헌을 했다는 이야기도 빠지지 않았다. 오늘은 내 차례다. 일과 후 현지 직원까지 포함하여 30여 명을 바닷가 전통 해물 식당에 초대하였다. 그날 퍼마신 양주와 맥주의 양은 싱가포르에 부임한 이후 좀처럼 깨지지 않는 대기록이 되었다. 그 해도 지나고 다음 해도 몇 개월이 지난 후, 양재호(당시 6단)사범이 싱가포르로 필자를 찾았다. 예기치 않은 예방에 다소 당황하였으나, 양사범의 차분한 설명에 기쁨을 감출 수가 없었다.
- 끝 - ** 그동안 많은 관심과 성원을 보내 주신 독자들에게 깊이 감사를 드립니다. 댓글에 달아 주신 말 한마디가 이야기를 풀어 나가는데 크나큰 추진력이 되었습니다. 특히 사이버오로 운영자55 님의 적극적인 도움이 큰 힘이 되었읍니다. 거듭 감사의 말씀 드립니다. ** (덧붙여) 마침 [나도명강사] 코너의 명강사 홍선비 님께서 본인의 강좌칼럼 [홍선비의 마음가는대로]에 "명인의 향기(조훈현)"라는 제목으로 싱가포르의 응씨배 결승5국을 상세하게 해설해 놓으셨습니다. 일부러 제 기사에 맞춰 주신 듯해(^^) 매우 기분이 좋습니다. 홍선비님께 감사드립니다. 기보감상하실 분은 여기를 클릭하세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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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작년 8월 23일 치른 고바야시 고이치와의 대결은 처절하고 숨가쁨의 극치였다. 그때 조국수는 집흑으로 산 넘고 물 건너 가시밭길을 헤쳐서 한 집을 남겼었다. 응씨 룰에서의 한 집은 우리 식으로 하면 반집에 해당한다. 반집은 신의 선택이라고 하였던가? 고바야시 고이치와의 대국은 얼마전에 둔 후지쓰배 패배의 통쾌한 설욕전이기도 했다. 
최병렬 당시 문공부장관으로부터 조남철 9단과 함께 은관문화훈장을 받았다. 조국수는 한국바둑을 일으켜세운 조남철 9단부터 훈장을 드리지 않으면 안받겠다고 하여 또 한번 화제가 되었다.
KBS에서 조훈현 9단의 세계제패 기념 프로그램을 만들어 방영할 정도로 응씨배 우승은 온 나라의 관심사였다.
작년 제1회 응씨배 결승4, 5국 때 지대한 공헌을 한 것에 대한 보답으로 감사패와 아마 4 단 인허증을 수여하기 위한 방문이라고 했다. 즉시 호텔 중국 음식점의 작은 방을 빌려 직원들과 함께 수여식을 치렀다. 양사범이 축하한다는 말과 함께 감사패를 낭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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