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둑일기172, "왜? 삐쳤어!"

2010.7.11
12시경 기원에 들어서니 원장의 스폰서인 친구와 과메기 범수 둘 만 바둑을 두고있다.
원장을 쉬고 조금 늦게 출근하라 하고 먼저나와 심심해 시간을 보내는 것이겠지.별명이 연구생인 범수는 연구생 답지않은 매너와 자세 수 로 시간만 죽이며 반상에 돌만 늘어 놓는다. 잠시 곁에서 지켜보다 시간이 아까워 티브이로 눈길을 돌린다. 재미있는 영화에 황급히 기원을 나와 숙소로 돌아와 편안히 영화를 끝까지 본다.

세시가 넘어 다시 들른 기원은 아직도 사람들이 없다. 요즘은 토요일 밤을 새우고 일요일엔 오후 늦게나 나서는 것이 추세인가보다. 감리단 양반이 두는 것을 곁에 앉아 관전하며 꾸벅꾸벅 졸다보니 5시 이다. 이제 사람들이 많이 차기 시작한다. 편바둑을 시작한다. 5시간을 기다려 바둑을 두기 시작했으니 5시간이면 종일 기다린 것이나 진배없는 것일까? 하루 일과는 8시간 아닌가?

5시간 기다려 첫 판은 두 집을 진다. 같은 편 전 사범도 몇 집 을 져 우리가 졌다. 새로 나오기 시작한 꾼(하이에나)와의 첫 대국이어 얌전히 둔 다는 것이 두 집을 진 것일까? 저쪽편의 같은 하이에나가 백 쥐고 고미 7알을 주라는 것을 줄여서 5알을 주었는데 역시 칫수를 엉터리로 알려준 것이다. 그러니 하이에나들이고 처음 보는 이들과는 바둑을 안 두면 그뿐인 것을 다섯시간을 기다리느라 아무나 반가워 시작한 것이 불찰이지.

두번째 판은 8명이 편바둑을 시작한다. 내 상대는 아까 같은 편이던 전 사범이다.
이 양반과는 이기던 지던 몇 집일 뿐인 긴 바둑인데 그래도 매 순간 최선을 다하지 않으면 한순간에 날라가는 어려운 바둑이다. 별것아닌 초반 응접에 상대의 뜻을 거스른다며 무리를 한 것이 초장부터 판을 그르쳤다. 우리편 전체가 17집을 이겼다니 평소 같으면 하나마나한 이긴 게임인데 이번엔 초반을 그르치곤 무리를 하느라 더 어렵게 심혈을 기울여도 20여호를 진다.

같은 편일땐 못둬서 피해를 주고 상대 편일땐 잘둬서 석 죽이는 경우가 제일 열받는다.
4만원에 기료까지 45,000원 헌금을 하고 가는군. 안 두면 그만인 바둑을 5시간 기다려 두곤 열 받으니 내가 바보인 것이겠지. 아니지. 순간 매 순간 최선을 다해야 하는데 첫 판에 적당히 가다 두 집을 진 것이 결국 오늘의 운세를 가른 것이지. 이리도 아직도 인생이란 매 순간에 최선을 다하는 치열한 삶을 양보없는 삶을 이어가야만 하는 것일까?

2010.7.18
아침 7시 집을 나서려 하니 처는 잠에서 깨며 놀라 묻는다.
"왜? 삐쳤어!"
"내가 잠만 자서 삐친거야?"
"커피하고 케익 줄까?"
"왜 대답도 안 해?"

주중에는 가락동 오피스텔에서 유숙하며 병원에 출퇴근하고 주말에 용인으로 간다.
일요일아침 처가 교회에 갈 시간에 같이 집을 나서 가락동으로 향한다.
빨래감 한 보따리와 음식거리 한 보따리 두 보따리를 들고 오리 전철역 앞에서 처와 헤어진다.
내리기 전 차 속에서 처에게 이야기 했다.
"요즘 아침에 일어나면 가슴이 아파."
"작년에 복직하며 건강진단서를 회사에 제출해야 하는데 안했어. 올해도 정기 건강검진을 받아야 하는데 아직 안했고." "혹시 나쁜결과라도 나오면 회사도 못 다니게 될까봐 걱정도 돼서.."
"당신도 친구네 식당일 도와주는 것 그만 둬야지 몸도 못 이기면서."
"가락동 사무실을 닫아버릴지 병원에 다니면서 사이드로 요양보호사 관리일을 시작해야할지 결정을 못 하겠어."

무거운 마음으로 오리 전철역 입구에 서서 담배를 피워문다.

오후 두시 기원으로 나설 준비를 한다. 반바지에 티셔츠 편한복장은 OR(Operation Room)의 닥터처럼 편한 수술복 차림으로 전장에 나서는 것일까? 딸까 잃을까? 그저 시간을 보내려는 것일까?
매 순간 최선을 다하지 않으면 고통 뿐이라는 것을 스릴을 느껴보려 출전하는 것일까?

한 달 20만원인 용돈은 매 주 5만원 꼴인데 기원에서 두 판을 지고나면 담배 살 값도 없다. 월요일부터의 한 주일을 고통속에 시작하게 되겠지. 근심과 걱정으로.

그래도 한 판 두러 나가는 것은 담배처럼 끊지 못하는 인이 박혀서일까?
승부를 즐겨서 일까?
매 순간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채찍질을 스스로에게 다짐하기 위해서일까? 끝.

2010.7.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