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성은 월곡역에서 6호선을 타고 석계역에서 1호선으로 갈아탔다. 

아내의 지인 형님이 열무김치를 담갔으니 가져가라고 해서 아내와 딸과 함께 가는 중이었다. 연천행이나 소요산행을 타야했다. 다음열차는 양주 행이었다. 

양주 행을 타면 종점에서 한 정거장을 더 가야했다. 그래도 일단 양주 행을 타기로 했다.

도봉산을 지나칠 때면 늘 머나먼 과거로 가는 느낌이었다. 

서울이라는 대도시에서 옛날의 올망졸망한 시골길로 가는 느낌, 북쪽이라 무섭고 낯설면서도 무언지 푸근한 느낌. 그런 느낌이 명성은 좋았다.

아내는 연신 우리 어디가는거야? 라고 물었다. 벌써 네 번째였다. 

세 번째 까지는 부드럽게 잘 대답해주었지만 네 번째에는 그만 짜증이 났다. 

불쑥 내뱉었다. “금강산 만폭동으로 가는 거야. 거기에서 마하연, 묘길상을 거쳐서 금사다리, 은사다리를 타고 비로봉으로 올라갈 거야.”

양주에서 내렸다. 내린 자리에서 다음 전철을 기다렸다. 15분 정도를 기다려야했다. 

지루함을 참으면서 기다리는데 딸애가 말했다. 

“여기가 아닌가본데?” 딸애를 따라서 다른 곳으로 이동했다. 벌써 14분이 지나있었다.

 다른 곳으로 이동하자마자 연천행 전철이 도착하였다. 서둘러 전철에 탔다.

 아! 처음 그 자리에서 기다렸다면 그냥 마냥 기다렸을 것이 아닌가? 아이구, 큰일 날 뻔했네. 나는 그냥 그 자리에서 기다리려고 했었는데. 명성은 자기가 나이를 먹었다는 것을 실감했다.

덕계역에서 내렸다. 

개찰구에서 표를 대고 나오는데 앞 유리창에 달덩이 같은 처자의 얼굴이 비쳤다. 

아, 우리 딸이 저렇게 이쁜가? 유리창이 희미하니까 그럴 수도 있겠구나 싶었다. 

잔뜩 기대를 하고 옆을 보았다. 그러나 역시 아니었다. 딸애는 저만치서 앞서가고 있었다. 

그러면 그 처자는 누구이며 어떤 모습일까? 

명성은 고개를 돌려 처자를 보려고 했지만 체면이란 것이 그 행동을 가로 막았다. 그

냥 앞을 보면서 걸어 나갔다.

명성은 제인 에어란 소설책을 보는 중이다. 

두 권 중에서 한권 반을 본 상태였다. 책을 보기 전에 딸애가 말했다. 

“그 책은 완전 막장이에요.” 

그러나 명성이 지금까지 본 내용 중에서 전혀 막장느낌을 받은 적이 없다. 

그저 무척 잘 쓴 책이라는 느낌만 받을 뿐이었다.

 명성은 과연 딸애가 제대로 책을 보았는지 의심스러웠다. 

책을 보지는 않고 그저 남이 쓴 평을 읽은 것은 아닐까? 딸애에 물어보고 싶었다. 

그러나 그 마음도 그저 묻어두기로 했다.

덕계역을 나서자 왼쪽에 불곡산이 보이고 오른쪽으로 도락산이 보였다. 

불곡산은 높지는 않지만 바위봉우리가 상당히 위엄 있게 솟아있다. 

그 봉우리 중에는 임꺽정 봉도 있다. 이곳은 임꺽정이 태어나고 자란 곳이다.

덕계역 앞은 고층아파트가 즐비하였다. 

명성이 사는 서울의 변두리 보다 훨씬 더 깨끗하고 번화하였다.

지인 형님의 아파트에 여장을 풀고는 점심식사를 하러 나갔다. 

편백찜을 하는 식당이었다. 

딸애가 화장실에 다녀온다고 나가고 지인 형님도 화장실에 간다고 자리를 뜨셨다. 

명성과 아내는 그저 그런가보다 하고는 그냥 자리에 앉아있었다. 

아, 그런데 저쪽에서 실랑이가 벌어지고 있었다. 

지인 형님이 계산을 하려는 것을 딸애가 막고 있었다. 

명성은 지인 형님이 계산하려 한다는 것을 전혀 눈치 채지 못하고 있었다. 

명성은 한탄하였다. “아, 큰일 날 뻔 했네.” 두 번째로 딸애의 기지 덕에 큰(?)일을 모면하였다.

편백찜은 무한리필이었다. 

주말에는 손님들이 많기 때문에 지인 형님은 명성네 식구들을 평일에 불렀다. 

명성이 소주를 한 병 주문하려고 하자 딸애가 눈을 찌푸리면서 째려보았다. 

그러나 명성은 지인 형님이 소주를 한 잔쯤은 즐겨하신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부군이 돌아가시고 혼자 사시는 형님 형편에 소주 한잔 정도는 그저 보약이 아닐까? 

명성은 지인 형님을 핑계대면서 소주 한 병을 거뜬히 주문하였다. 

결국 소주 두 잔은 지인 형님이 드시고 나머지 다섯 잔은 오로지 명성의 몫이 되었다.

편백찜은 맛이 있었다. 우삼겹의 고소한 맛이 특히 일품이었다. 

그러나 시간이 다소 걸리는 것이 흠이었다. 

명성네 일행은 편백찜을 한 번 만 시키고는 다음에는 샤브샤브를 시켰다. 

기다리지 않고 바로 바로 건져서 먹는 샤브샤브가 성질 급한 명성의 기호에는 맞는 셈이었다.

한 창 신나게 먹고 있는 중에 옆자리에 손님들이 앉았다. 

네 명이었다. 모두 기골이 장대하였다. 

아마도 이곳의 격투기 도장에 다니는 사람들일 거라고 명성은 짐작하였다. 

두 명은 다소 뚱뚱한 체격에 힘이 무척 세 보였다. 

또 한 명은 호리호리하면서도 키가 컸다. 눈매가 아주 매서웠다. 얼굴에는 칼 자욱이 있었다. 

또 한 명의 사나이, 키도 큰 편이고 체격도 큰 편이지만 크다는 느낌이 전혀 들지 않았다. 

그저 균형이 잘 잡힌 체구, 거기에다 눈매는 어떤가? 

전혀 표정을 읽을 수 없는 눈매였다. 잔잔한 호수 같기도 하고 깊이를 알 수 없는 바다의 심연 같기도 하고. 

명성은 얼은 눈길을 돌렸다. 그 사나이의 눈길에 압도당한 기분이었다. 

그 사나이들은 엄청 먹어대었다. 

먹고 난 편백찜 그릇이 10개, 20개, ... 50개 까지 쌓였다. 

저러면 이 집 주인은 망하는 것이 아닌가?

 다행히 그 자들은 술도 많이 마셔서 빈 막걸리 병이 50여개는 되었다. 

그래도 그렇지 저런 자들이 계속 온다면 이집 주인은 아마 망하고 말 것이다.

명성은 그 자들이 계산할 때 어떤 표정일지 궁금하였다. 

비록 무한리필 집이지만 그렇게 먹어대었으니 다소 미안한 표정은 짖지 않을까?

그자들은 현금도 카드도 건네지 않았다. 

주인이 결재를 요구하자 칼 자욱이 있는 자가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주먹 만 한 누런 금덩이였다. 

금덩이를 탕하고는 계산대 위에 놓아두고는 사나이들은 바깥으로 나갔다. 

주인이 “어. 이거 안 되는 데요.” 라고 외치면서 밖으로 따라 나갔다. 

그러나 그 사나이들은 이미 불곡산 쪽으로 자취를 감춘 상태였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