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둑일기 178, 자기도취

 버스 정거장의 구름다리를 건너 장례식장으로 건넌다.
장례식장 측면 문 앞에서 담배를 꺼내 문다. 6:40 경인데 아직 컴컴하다.
건너편 응급실 병원본관 쪽에서 검은 상복을 입은 두 사람이 추위에 사레 치며 건너온다.
남자는 아직 초교나 중등 정도의 어린 아이이고 모친인듯 한 여인은 젊어 보이는데 검은 한복 상복이 안스럽다. 고인은 아직 젊은 분이신 것 같다. 아니 할아버지나 할머니일 수도 있겠군!

 장례식장이 시설은 별로 인 것 같은데 목이 좋아서 인지 항상 손님이 그득하다. 동창들의 부고나 아직은 빙모상들이 많았다. 나의 마지막 종착역도 혹 이곳이 되는 것은 아닐까? 지난 십여년 병원생활을 하면서도 미처 깨닫지 못 했었다. 죽음이 항시 곁에 있었다는 것을. 종합병원의 수많은 환자들은 거의 암수술을 하거나 기다리는 분 들이니 그동안 마주친 이들 중에 고인이 된 이들도 상당수겠지.

 병동을 걸을때면 속으로 정신차려야지 하며 새삼 마음을 다듬는다.
호스피스 병동의 환자들은 거의 걷는 이를 본 적이 드문데 폴대에 수액과 콧줄을 한 남환이 가족들의 부축을 받으며 산보를 하고있다. 뒤에서 약제부 카트(구루마)를 밀다 느린걸음에 서서 기다린다. 옆으로 병실속은 따뜻한 햇살이 한껏 밝게 비춰들어온다. 침대속의 환자와 곁의 가족들, 일요일은 면회객이 많아 활기가 넘치지만 저들의 마음속은 어떨까 싶다. 나도 정밀검사를 안 해봐서 그렇지 내가 저렇게 병상속에 누울수도 있겠지 싶으며 조금 어지러운 느낌도 든다.

 병원에서 생활하면서도 내가 진료나 검사를 받은적은 거의 없었다. 물론 매해 정기 건강검진을 받았지만 명색이 S 의료원의 건강검진인데도 같이 일하던 선배가 갑자기 췌장암으로 며칠만에 가 버린 것을보면 생사는 알 수 없는 것인가 보다 싶으며 그저 바둑 두듯이 한 수 한 수에 최선을 다하며 순간순간에 최선을 다 하는 것이 인생인가 싶다.

 병원 퇴근길에 기원에 들린다.
세 명식 편을 짯는데 우리 편 두 명은 합쳐 11집을 이겼단다. 나는 한 집을 졌지만 편 덕에 딴다.
같이 둔 상대 깜빡이는 연신 저혼자 중얼거린다. 6집을 이긴 줄 알았는데 한 집이네 하며 잃은 돈이 엄청 안타까운가 보다. 워낙 말이 많은 친구라 나는 아예 대꾸를 안 하고 항상 묵묵히 바둑만 둔다. 상대를 안 하니 기분이 나쁜 것인지 이것 저것 흠 잡기에 여념이 없다. "너무 장고를 해서 머리가 아파!" "난 그만 둘래요!"

 두 번째 판은 옆의 같은 편이 속기로 하수를 52집을 이겼다. 오늘은 운이 좋은가 보군. 조금만 져야지 싶어 슬슬 물러나니 상대는 뒤집어 볼 요량으로 무리를 연발해 결국 내가 한 집을 졌지만 또 땃다.

 어젯밤엔 기원 원장이 밤늦게 내 방으로 찾아 왔었다. 친구인 스폰서의 전화를 연결하라는 특명을 받고 처음 온 것이다. 내년 3월로 수술이 잡혀있는 지인을 손 쓸 방도가 있는지 알아봐 달라는 부탁이다.
수술을 결정하고 한 시라도 바삐 끝내고 싶은 심정은 물론 이해가 된다. 나 라도 그렇겠지.
24일의 바둑동호회 행사 협의차 S의료원에 들리는 길에 알아는 봐야지. 바둑으로 연결된 인연들이 사람 목숨을 살리는 경우도 있긴 했었다.

 기원 한 켠에 조용히 앉아 월간바둑 책의 표지 모델에 이끌려 펴 보기 시작한다.
저렇게 이쁜 여류기사가 있었나 했더니 유명한 드라마 제빵왕 김탁구에 나왔던 여인이 홍보대사가 된 것이란다. 이런저런 기계 소식을 모처럼 월간 바둑으로 보니 여유를 만끼하는 느낌이다. 한페이지 한 페이지 처음부터 끝까지 한장씩 빨리 넘긴다. 그리 가까이 여기는 바둑도 이리 세상소식엔 무심했다. 객원기사들의 대우문제와 8년만에 센돌이 결승전에서 이 국수를 이겼다는 소식 등 애기가인 저명인사들의 소식 등 볼거리 읽을거리가 참 많다. 나는 바둑만 두고 세상일(기계) 외부소식엔 문외한 이었군. 24일 동호회에서 대화거리라도 찾으려면 이제라도 부지런히 읽어 둬야지.

 삼일간의 휴가 후 첫 출근한 오늘 일요일은 뭔가 한가지가 부족한 느낌이다.
내가 그리도 헌신적으로 몸 아끼지 않으며 심혈을 기울이며 일하던 곳이고 조금이라도 생계에 도움이 더 되도록 90~100시간 씩 오버타임을 하는 곳이고 내 소신 껏 내 자신에게 부끄럽지 않게 장부의 길을 걷는 곳이라고 평소 생각했었지만 처음 휴가를 써 보고 삼 일을 쉬어보니 돌아 볼 수 있게 되는 것일까?

 일 할 수 있는 곳이 있는 것이 중요한 것이고
일을 마친 후엔 바둑 두며 최철한 류의 치열함을 잃지 않기 위해 노력해 보았지만
그동안 나의 운석은 하수의 자기도취일 뿐,
내 주변의 그 누구도 내가 잘 한다고 하지는 않았을 것 같다. 이제사 깨닫는가?
처는 내가 바둑을 끊기를 바라겠지.
그녀의 바람이라면 무엇이건 들어주어야 하는 것일텐데.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