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연주를 끝내고 자리에서 일어나기만 기다리며, 나비가 나인지 내가 나비인지 모르는 시간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인연의 시간이 다가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펄펄 나는 저 꾀꼬리
암수 서로 정답구나
외로워라 이 내 몸은
뉘와 함께 돌아갈꼬?
그는 유리왕자가 되었고 나는 그의 꾀꼬리가 되었습니다. 상상속의 황홀함에 취해 그렇게, 그렇게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 갑자기 유리왕자가 보이지 앉는 것이었습니다. 순간 소름이 쫘악 돋으며 마음이 울컥했습니다. 이놈의 죽일 자뻑하는 마음 때문에 동아리에 가입도 놓치고는 또 자뻑한 것입니다. 마음을 진정시키며 후다닥..후다닥.. 정신을 차려서 주위를 쳐다보았습니다. 나의 유리왕자는 멀리가지 않고 마치 내가 봐주길 바라듯이 긴 코트 자락을 휘날리며 일렉기타를 둘러메고 담배에 불을 붙이기 위해서 성냥을 켜고 있었습니다. 편안하게 담배 불을 붙이는 그와는 반대로 짧은 순간이지만 내 마음은 이미 몇 번 롤러코스터를 탔습니다.
그는 학생회관으로 들어가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습니다. 1층, 2층, 3층... 그는 계속 올라가는 것이었습니다. 눈에 힘을 주고 행여 다시 놓칠세라 눈을 깜박도 하지않으며 따라갔습니다. 계단을 끊임없이 올라가는 그를 따라가다가 숨이 차오릅니다. 헥헥헥, 그는 담배를 피우는데도 폐활량이 좋은 것 같습니다. 다행입니다. 4층 이상이면 엘리베이터 타도 될텐데.... 그는 엘리베이터 타는 것을 좋아하지 않나 봅니다. 그가 드디어 동아리방이 있는 층에 도착했는지 계단을 돌아 복도를 걸어갑니다. 한숨 돌리기가 무섭게 그는 나무로 된 동아리 문을 삐걱 소리를 내며 열고 들어갔습니다. 많은 학생들이 복도를 걷고 있어서 촐랑 촐랑 따라가던 나의 발자국 소리를 그는 듣지 못했나봅니다. 한번쯤은 돌아봐주기를 바랬는데 말입니다. 돌아보면 어쩌지 어쩌지 하는 생각으로 고민을 하고 있었는데 말입니다. 돌아보더라도 모른척하고 그냥 발걸음을 향하려고 했습니다. 천천히 걸어가면 다시 앞 설 테지 하는 생각으로 말입니다. 그가 들어간 문을 열고 들어갔습니다.
"신입생이예요?"
"네..." 기어들어가는 목소리지만 밝게 말했습니다.
"가입하시게요?"
"네..."
그렇게 앞에서 묻는 말에 대답하고 있는데
"잘 쓰겠습니다."
라는 말만 남긴체 나의 유리왕자님이 갑자기 축구공을 들고 나가는 것이었습니다. 무슨 일인지 짐작도 하지 못하며 그가 사라진 앞을 쳐다보자 눈앞에 펼쳐진 것은 선계였습니다. 하늘나라처럼 구름이 가득한 공간이었습니다. 처음에는 안개를 뿜는 공연용 장비를 가동하고 있는 줄 알았습니다. 그리고 귀에는 나무꾼이 도끼로 나무 찍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무슨 소리인줄도 모르겠고 그냥 내가 모르는 그런 소리가 있나보다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열린 문으로 환기가 되어 안개가 빠져나가고 나니 모두 서로 마주앉아 '딱딱...' 바둑판 위에 바둑돌을 놓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열린문으로 고개를 내어 보니, 문에는 “기우회, 신입생 환영” 이렇게 적혀있었습니다. 나도 모르게 '기우회'의 문을 열고 들어와서 가입하겠다고 한 것이었습니다.
안개 걷힌 사이로 하나, 둘 드러난 모습을 보니 하나같이 모두 늙은 아저씨처럼 보였습니다. 비록 겉모습은 어리나 그대로 늙어버린 모습입니다. 바둑돌 소리 너머로 다가오는 매쾌하고 쿰쿰한 냄새는 언니들로부터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은 홀아비 냄새를 지칭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남자를 만나면 차라리 얼굴은 보지 않더라도 홀아비 냄새 나는 사람은 만나지 말라고 했는데 말입니다. 어쩌다 이런 곳에 오게 된 것인지. 빨간 장미와 같던 그와 비슷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너무 황망하여 정신없는 틈에 입회원서라는 것이 앞에 놓였고 적어라는 대로 신용카드 발급 신청하듯이 손이 알아서 적고 있었습니다. 순간 정신적인 공황상태에 놓은 것입니다. 현재 아무것도 없으며 앞으로도 어떤 것도 기대할 수 없는 공간에서 현재와 미래가 모두 절망적인 상태에 위치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어렵게 어렵게 동아리에 가입하겠다고 왔는데 결과는 담배 연기 속 홀아비 냄새가 가득한 절망과 암울뿐인 희망과 기쁨의 핑크색은 처음부터 존재하지도 않았고 앞으로도 전혀 없을 것같은 배트맨의 고담시티 같은 곳이었습니다. 비록 이곳에도 나에 대한 관심어린 시선은 있었지만 내마음은 ‘진짜... 죄송하지만... 됐거던요...’
입회원서를 적고 나에게 물을 먹인 유리왕자를 생각하자 혈압이 올랐습니다. 나도 모르게
'그놈의 사기꾼 같은 기타맨!~ 개발이나 되어라'라고 속으로 외쳤습니다. 험담을 하고 나니 마음이 편안해 졌습니다. 이런 맛에 사람들은 마음에 안드는 사람의 흉을 보나 봅니다.
"이름이...?"
"혜빈이에요"
"아..네... 이름이 이쁘네요. 전 회장을 맡고 있는 진우입니다. 김진우"
'아.. 높은 사람인가부다...’ 일단 이 사람을 기억해두기로 했습니다. 나의 문제점중 하나가 사람을 잘 기억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이름과 사람 얼굴을 익히는 것 때문에 초중고 12년 내내 학년이 바뀔 때 마다 늘 몇 달을 고생했습니다. 어려움에 빠질수록 높은 사람을 알아둬야겠다는 생각으로 ‘김진우.. 회장.. 얼굴 약간 가름하고...’이렇게 속으로 되내며 외웠습니다. 어떡하던 현재는 위기였고 벗어나야 했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연꽃이 진흙탕 속에서 아름다운 꽃을 피운다지만, 그건 연꽃의 사정이고 내사정은 소박하게 나보다 뛰어난 사람도 아니고 비슷한 아름다움과 향기가 나는 사람과 어울리고 싶었을 뿐이었습니다.
그는 초면인 나에게 대뜸 바둑을 가르쳐주기 시작했습니다. 기우회에 왔으니 당연히 바둑을 배우는 것이고, 또 바둑을 가르쳐주는 것으로 최대한의 호의를 표시한 것이겠지만 정신없는 나에게는 더욱 무리였지만, 높은 사람의 이야기였기에 혹시 위기탈출에 도움이 될까하여 열심히 들었습니다. 1시간의 시간이 지났습니다. 혼란과 혼돈, 정신적 공황으로 판단이 마비되어 무념의 상태에 있는 신입생에게 1시간의 바둑 강의를 하는 것은 환자의 상처에 소금을 뿌리는 격인데도, 어떻게든 이곳을 빠져 나갈려는 열망 때문에 자신의 정신 상태도 모르고 열심히 배웠습니다. 넘어지면 몸이 다치듯이 정신적 위기에서 정신과적 상처를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바둑 문외한에게는 상고문인 것을 견뎌낸 것입니다. 알아볼 수 없는 문자가 가득한 영어수업시간, 이해할 수 없는 공식이 난무하는 수학수업시간의 내용을 지옥철처럼 가득차게 밀어 넣듯하여 비록 머리는 깨어질 듯 아팠지만 열심히 들은 탓에 대충은 알 것 같았습니다.
"그러니까. 이렇게 돌 4개로 둘러싸면 1점이 죽은 것이고, 6개로 2개를 둘러싸면 2점이 죽는 것이라 말이죠?"
"네~ 맞아요. 정말 바둑 잘 두시네요. 앞으로 금방 많이 늘겠는데요?"
"그런가봐요. 저 소질 있나봐요!~ 호호호"
"하~하~하~"
하지만 그와 혜빈은 서로 다른 의미의 웃음을 날리고 있었습니다.
‘1시간 내내 설명을 했는데 겨우 1분정도의 양만 이해하고 있다니...’ 진우는 한모금의 물도 없이 침만으로 입을 적시며 열심히 설명을 했는데 상대는 저렇게 소질 운운하면서 기쁘하고 있는 것이었다.
'난, 미모도 되는데 바둑까지 잘 두게 되면 어쩌지... 나에게 이런 재능이 있었다니...'
"저... 우리나라에서 바둑 제일 잘 두는 사람이 누구에요?"
혜빈은 애기처럼 밝고 맑은 미소를 하며 무척이나 좋은 일이 있는 표정으로 질문을 하고 있다.
"이창호죠"
그는 아주 짧고 명확하게 구구단 2*2=4라고 말하듯이 이름을 말했다. 누가 뭐라고 해도 이 시대에서는 이창호가 최고였던 것이다. 바둑을 두지 못하는 사람이라도 이창호의 이름은 알았으며 그들에게는 바둑은 곧 이창호였다. 바둑을 두는 이에게는 신비함이 가득한 존재였고 기력이 높으면 높을수록 멀게만 느껴지는 바둑실력의 소유자였다. 1급이 생각하는 자신과 이창호와의 거리보다는 프로 9단이 바라보는 거리가 더 먼 상상도 할 수 없는 고수였던 것이다.
'기둘려라. 이창호 이제 조만간 그 자리는 나의 것! 움하하하'
혜빈은 이창호가 누군지도 모르고 혼자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전국민이 이창호를 아는데 그는 이나라 국민도 아니였던지 그를 딱지치기 선수정도로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가 어떻게 프로기사가 되고 한국바둑에서 절대지존이었는 스승 조훈현9단을 이기고 어떤 기록을 달성하고 있는지 알았으면 경악을 금치 못했을테지만 무식하면 용감하고 용감하면 맛도 보지 않고 뭐든 먹는 것이 인간들이다보니 혜빈 또한 겨우 한점, 두점 따먹는 것을 배우고는 칭찬에 그냥 정신을 잃고 제1인자의 꿈을 꾸게 되었습니다. 오호통재라~. 하긴 지금 이 모든 것을 설명해줘도 혜빈의 판단에는 변화가 없을 것이라.
"왜 최고수가 누구인지 궁금해요? 혜빈씨!."
"그냥 궁금해서요..." 혜빈은 조만간 자신이 이창호를 이기고 말해주겠다는 생각으로 얼버무리고 말았다.
대부분의 동아리 회원들이 모였다. 회원들은 동아리방에서 ㄷ자 형태로 둘러 앉아있었고 신입회원은 그들을 중심에 서서 자기소개를 하고 있었습니다
'안녕하세요? 화학과 다니는 혜빈입니다 그리고... 음... 별로 소개할 것이 없네요. 궁금하신 것 있으면 질문하세요'.
나는 짧게 이름만 이야기하고 광고만 찍어대는 미모의 연예인의 신비주의를 떠올리며 살짝 미소만 짓고 질문을 기다렸습니다. 난생 처음 하는 자기소개라 어떤 것을 이야기해야할지 몰랐고 선배들도 신입생소개에 대해서만은 어떤 언질도 없었던 것입니다. 그냥 자연스럽게 하라고만... 그래서 나의 자연스러움은 '신비감'이라는 생각으로 아주 짧은 소개와 나의 수호천사인 '미소'만 보인 것입니다. 잠시 정적이 흐르고 질문이 나왔습니다.
"화학과 다니신다고요?"
"네"
질문한 사람은 나에 대한 추가적인 질문이 없이 태연한 표정으로 있었습니다. 다른 회원들은 질문한 녀석을보며 씩~ 웃었습니다. 그리고는 한바탕 웃음이 가득해졌습니다. 늘 그런 녀석이라는 표정이었습니다. 아무일도 아닌 것이 세상에서 가장 즐거운 것을 본 듯이 웃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모두 같이 방금 들은 이야기를 태연하게 다시 한 번 묻고 추가적인 질문을 기다리는 긴장감 뒤에 아무것도 없는 것입니다. 그것 하나에 그렇게 좋아하고 즐거워하고 있는 것입니다. 벌써 몇 번이나 그렇게 웃었을텐데 네버랜드의 피터팬과 그의 친구들처럼 배꼽이 빠져라 웃고 있는 것입니다.
"기우회에 왜 들어왔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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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