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둑일기 177, 기원의 휴가

 첫 판은 같은 편 이동 사장이 벌써 39집을 졌다.
별로 지는 적이 드물고 져도 저리 많이 지는 적은 거의 없는 뿌로(하이에나)인데 저리 많이 큰 차이로 보낸 사람은 정작 어쩌다 기원에 놀러오는 아마츄어 사장이다. 물론 그의 별명도 방화동 신나통 이니 한가닥 한다는 강력한 파워의 소유자 라는 예명을 얻은 것이지.

 내 바둑은 두방 정도는 유리한 것 같은데 39집을 뒤집는 것은 언감생심이다.
마무리 국면이지만 상대도 한 칼이 있는 내기꾼이어 나도 계속 유리한 국면이지만 조심스럽게 운신중이다.
이동사장은 자신이 벌금을 낼테니 내가 1등으로 마무리하고 판을 접으라 한다.

 모처럼의 휴가여서 아침엔 난방기를 고칠 A/S 센터의 기사를 기다리느라 오후 한 시가 넘었다.
주유소에 가 난방용 백등유를 한 통 사니 24,000원이다. 굉장히 많이 오른것 같은데 최근 몇 해 사이 얼마나 오른것인지 조차 기억을 못 하겠다.
어제 전기곤로를 하나 더 구입하려 하이마트에 가 보니 마음에 드는 것은 전기사용료가 엄청나게 나온다는 직원의 안내에 망설이다 포기하고 올해는 그냥 난방기를 사용키로 했다. 기름은 매 주 한 통씩 25,000원 정도면 한 달 10만원이면 난방비는 전기나 큰 차이가 없을 것 같은데 기름이 난방효과는 압도적이다.

 기원에는 전기곤로가 두개 있는데 사람들이 북적일 때는 추운것을 몰라도 썰렁할때는 무릎이 시린것이 느껴질 정도로 춥다. 기원조차 따뜻하지를 못하니 이젠 정말 마음까지 썰렁해진다.

 다시 두번째 판을 시작한다.
이번에는 내가 방화동 신나통 사장님과 대적한다. 이동은 내 편으로 상대 뿌로를 19집 차이로 이긴다.
호선에 자주 둘 기회는 없었지만 한 방의 파워를 알고있는 터여 돌을 가리니 백 이다. 보통은 양소목에 한 쪽은 날일자로 굳히고 긴 바둑을 두지만 초반에 기세를 잡으려 발빠른 운석을 한다.

 소목 날일자 걸침에 상대(신나통 사장님)는 높은 두칸 협공이다. 두 칸을 뛰며 대형정석으로 이끌어 초반 기세를 잡는다. 기대이상의 초반 득점에 잠시 숨을 고르는 동안 상대는 틈을 찾아 강력한 공세로 일관한다.
졸지에 내 외세가 세개의 곤마로 돌변한 형국이다.

 같은 편이 19집을 이겨 놓은 것이 큰 위안이지만 반상은 한심스럽기 그지없다. 우상변 백 곤마를 간신히 안형을 찾아놓고 중앙의 백은 근 10여호를 포기한 채 하변의 집모양을 만든다. 좌변에도 다시 20여호의 곤마을 포기한 채 마지막 기약을 맛을 남겨 놓는다. 먼저 손이 갈 수 있으면 좌변 집은 20여호 포기한 곤마의 가치와 버금갈테니 하변의 백집을 지키는 공방을 우선 하는 것은 승부수랄까? 내기로 다져진 올인의 습관일까? 좌우지간 무조건 포기 하는 것 보다는 마지막 승부의 호흡을 다듬는다.  유리하다고 판단한 상대는 좌변의 변화는 아직 모르는 것 같다.

 결국 반면 네 집을 져 두집 반 승이다.
"어떻게 그걸 다 정리를 하세요?" 상대(신나통 사장님)는 마구 몰아치며 여기저기 잡아놓은 것도 많은데 결국 반면 네집 승에 그친것이 못내 아쉬운가 보다.
"삼성은 아기자기한 바둑을 잘 만들잖아요! 프로들이 두 듯이 맛을 만드는 것을 좋아하는 솜씨이죠!"
뒤에서 관전을 하던 이가 얘기를 한다.

 바둑두느라 중요한 약속을 잊었다. 부지런히 전화를 한다. 오늘 세시 참석하려던 병원 당구모임은 불참을 통지하고 24일 S의료원 바둑동호회에 초청할 프로기사 섭외를 마무리한다. 동유럽 여류프로 한 분과 미국에서 왔다는 연구생 한 분을 초빙키로 한다. 

 휴가 조차 모처럼 바람을 쐬러 지방이나 바닷가에 가 보지도 못한 채 기원에서 연 삼일 보낸것이 나만의 휴가이다. 마음편히 모처럼 승부를 즐긴 것일까?

 처에게서 전화가 온다.
몇시에 올것인지?
모처럼 휴가이니 오피스텔에서 자며 기원에서 밤새 바둑을 둬보는 것이 멋일텐데 감히 어필을 못하고 엉겹결에 바로갈께 대답한다.

 두 판을 둬 한 판은 졌지만 1등 으로 만원을 잃고 두번 째 판은 이겼으니 만 원을 딴 것이군. 한 판만 더 두고 갔으면 싶지만 따신 저녁밥을 얻어 먹으려면 빨리 일어나야지 싶어 본능적으로 일어선다.

 샤워를 하고 맥주 한 캔을 들고 뒷베란다에서 담배를 한대 핀다.
휴가라고 바둑만 뒀는데 내일 토요일엔 기원을 가야되나 말아야되나 궁리를 한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