벤처, 밴츠, 벤치 (울 동네 김氏)



탑골공원 벤치, 질겅질겅 껌 씹으며 탐색하듯 신문에 눈 떼질 못하고, 내 옆에서 노인 둘 똑딱거리며 신나게 바둑을 두고 있다 시간때우기 줄바둑을, 난 저런 노인들 하곤 틀리니까...아무래도 상관 없다

이래뵈도 삼년 전까지만해도 난 꽤 잘나간다는 회사엘 근무했다 이름도 찬란한 벤처기업을, 삐까번쩍 사무실에 연봉 많고 남 부러울 게 없었지 얼마 지나 벤츠도 타게 되었어 그늘에서도 눈부시게 번쩍거리는, 창 문을 열지않아도 담배 연기가 빠지는 무쟈게 폼나는 차를, 여러분은 타본 적 있는가?

인생이란 참 묘하다는 생각이 든다 살다보면 비행기도, 낙하산도 탈 때가 있고....러시안 룰렛처럼 관자놀이에 한 방 얻어맞기도 하듯 확률이란 것도 어느 정도는 존재하지 (어떤 사람들은 팔자소관이라 하지만...)

어쨋든 지금은 모든 꿈, 생맥주의 하얀 거품처럼 보글보글 날아가고 벤츠도 빨간 차압딱지 한 장에 날 버리고 간통하듯 야속하게 다른 사람 품으로 사라졌다 물찬 제비처럼 쪼옥 빠진 벤츠가 아직도 눈에 생생 하건만...

이제 노을이 지면 집으로 귀가한다 되도록 동네 사람들 눈에 안 띄게.... 어둠이란 이럴 때 참 편리하다는 생각도 하며... 닭장 같은 집에 도착해 벨을 누르자, 철없는 귀여운 내 새끼 둘, 쪼르르 뛰쳐나와 반갑게 인사를 한다.

- 아빠 안녕히 다녀 오셨어요

하면서도 재빨리 내 손에 뭐가 들려져있는지 요리조리 살피다가 신문 한 장 달랑 들려져있는 걸 보고 몹시도 서운해하는 눈치다.

- 짜식들, 내일은 카드를 긁어서라도 피자 한 판 사 들고 와야지
(문득, 내 처지가 왜 이렇게 되었을까 괜히 서글퍼진다)

모든게 변했을 뿐이다 벤처에서 상한가 칠 때 벤츠 굴리다 어느 날 졸지에 곤두박질, 이제 전철을 두 번씩 갈아 타며 눈썹이 휘날리게 탑골공원 벤치로 간다 신문 한 부 사 들고...

오늘 구인란에 벤처기업 사원모집광고 많이 나와야 될텐데 -


2000, 7, 28
- 모 삼류 잡지 꽁트란에 실었던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