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글은 광장에 3차례에 걸쳐 올린 글을 옮겨왔읍니다
나름 처음으로 긴 글을 쓴것이고 의미가 있어 남겨 두고자
여기 제 글방으로 옮겨왔음을 양지하시기 바랍니다. 굽벅.

바둑이 인간에 의해 만들어 졌는데 신선들이나 신적 인격체들이

그들만의 고품격 소통문화로 격상되어 만든 시대보다 훨씬 거슬러

여러 신들과 선비들의 풍류와 도의 경지 그 품위를 대변하는 것 같다

하지만 그에 비해 아름다운 로맨스는 다루지 않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그 이유야 나도 알 길이 없으니 접어두고

여기 한 부부 애기가의 이야기를 해보려 한다.

2020년 10월

까치는 오늘도 어김없이 자전거를 타고 기원으로 향한다.

하지만 오늘은 뒤 좌석에 앉아서 허리춤을 꼬옥 잡고 따르던 엄지 대신에

하얀 보따리에 싸인 도시락만 매여 있다.

애들 학교에 학부모 모임이 있어 엄지는 따로 출근하기 때문이다

기원의 속설적인 분위기는 이런저런 이유로 용퇴한 노인들의 여가 선용이나

실패한 사람들의 망중한을 보내는 곳이기도 하지만 얼마간의 동호회와

그 품격에 매료된 학구파 초보자들도 드문드문 있다

지금 기원에서 인터넷에서 바둑으로 인연을 이어가는 사람들은 한번쯤은

바둑에 미쳐 본 경험들을 갖고 있을 것이다

후회하며 자학하고 무기력증에 빠져 원망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추억으로 넘기고 그 인연을 다행으로 생각하는 사람도 잊을 것이다

실제로 바둑 그 자체에 매료된 사람들은 과정을 거치며 목적에 따라

그 결과를 받아들이는데 엄청난 차이가 난다

애기가. 

그것이다 모든 것이 그렇듯이 목적에 앞서 애정을 가지고 임하여야 오래간다.

두 기원부부 원장도 바둑을 애정을 가지고 사랑하다 그 인연으로 만난 것이다.

“안녕 하세요”

“여~! 까치원장 출근하시나.”

“근데 오늘은 어째 허전하다”

“네...^^ 애들 때문에... 이따 기원에서 뵙겠습니다.”

기원이 가까워지면서 단골손님들과 마주치기 시작하고 까치는 헐떡이는 숨을 고르려

연신 심호흡을 하며 이마의 맺힌 땀을 훔친다.

그런데. 갑자기 자전거가 속도를 내는 것에 까치는 소스라친다.

어. 어. 어.

(자전거도 급발진?)아니다.^^

장난꾸러기 죽 씨가 원장을 보고 몰래 뒤에서 밀었기 때문이다.

서로를 확인하고 웃으며 지난밤 안부를 물으며 기원계단을 오르는 두 사람

오늘도 여느 날과 같이 까치&엄지 기원의 시작은 그렇게 밝다

기원 분위기와 그 주된 멤버의 특징은 여타 기원과 색다른 면이 많은데

그 중 한 특징은 본명 보다는 예명으로 통한다는 것이다

아니 아예 대명밖에 모르고 지낸다고 하는 게 맞을 것이다. 그게 호가 되어 버렸다

대명이 예명이 되고 그것이 호가 되어버린 것은 오로바둑사이트 때문이다

죽 씨. 그도 오로바둑 사이트에서 인연 따라 이 기원으로 온지도 3년

여느 기우들과 마찬가지로 인터넷에서 두 사람의 이야기를 접하고 오게 되었는데

5년 전쯤 어떻게 사놓은 배 밭 주변이 개발 되면서 값이 올라 오랜 숙원이었던

그림 같은 전원주택도 짓고 아직 50대 초반인데도 여유로운 노후(?) 생활을 시작했고

특히 주말이면 이곳으로 달려와 수담을 즐기고 가끔씩 모두를 집으로 초대하기도 했다

그가 오면 예 씨와 청 씨도 항상 동반 하는데 태 씨도 거의 참석한다.

그렇게 까치&엄지 기원은 서울 인근의 사람들은 주말이나 인근에 볼일이 있으면

어떻게든 들러보는 방앗간이 되었고 지방에서도 일 년에 한두 번쯤은

다른 기우들이 날을 잡아서 상경을 하는데. 이날은 걸쭉한 파티가 열린다.

그러면 이들 부부의 아름다운 바둑 인연과 사랑이야기가 내내 화제가 되고

그것으로 맺어진 또 다른 인연 이야기들을 밤이 새도록 이어간다.

하고 또 하고.

남자들의 가장 재미나고 흥이 나는 군대이야기처럼.

이번에는 미국에서 오랑우탄 대 씨와 부산의 마도로스 푸 씨 강원도에서 빈 씨.

땅 끝에서 느린 걸음 황 씨 오로 맥아더 그 씨 진사어른 나 씨 향 씨 회 씨.

그리고 신수만 두다가 뒷감당 못하는 신 씨 북경에서 아가씨만 쫒아 다니는 연 사범

그와 쌍벽을 이루며 무조건인 조 사범 여기에 미시 팀 미. 가. 못. 남. 아....

일 년에 한 번씩 열리는 상견례 날이라 아침이 분주하다

죽 씨가 그래서 일찍 거들려고 나온 것이다.

죽 씨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까치 원장은 5년 전의 일이 주마등처럼 떠오른다.

2010년 어느 날

바둑으로 만난 두 사람은 애정 또한 두터워 그렇게 좋아하는 바둑을

큰돈을 벌지는 못해도 둘이서 같이 한다는 것과

바둑을 늘 가까이 할 수 있는 기원을 차리기로 의논을 하기에 이르렀고

몇 해째 행복한 생활을 하고 있었다.

이들의 바둑 사랑을 일상에서도 그대로 이어진다.

애들 옷이나 모자 액세서리 두 부부의 생활공간까지 거의 흑백으로 코디한다.

비록 가난했지만 반상에서처럼 썩은 새끼줄로도 고래를 잡을 수 있다며

서로를 격려하며 성실하게 최선의 수만 두기로 하였다

늘 조용하면서도 은근한 유머와 재치로 사람들을 편안하게 하는 까치와

발랄하면서도 경망하지 않고 예의바른 엄지. 두 사람은 천생연분이랄 수밖에.

하지만. 그들에게 시샘의 먹구름이 몰려왔으니.

아들 딸 낳고 그럭저럭 별 탈 없이 꿈을 키워가는 그들에게 운명은 비수를 들이댄다.

무심코 병원을 찾은 까치에게 암이라는.

청천벽력 같은 치중 소리에 두 사람은 전혀 준비되지 않았던 사활을 돌아본다.

정석대로 살았는데 어디서 문제란 말인가.

완생이라 생각하고 뚜벅뚜벅 최선으로 두어왔는데 사활 패라니.

그렇게 병원 생활은 시작되었고 애들은 친정어머님을 불러오고 기원은 지인에게.

엄지는 잠시도 까치의 곁을 떠나지 않았으나 결국은 수술을 감행해야했다

갈수록 쇠약해져 늦기 전에 마지막 시도를 해보자는 의사 말에 엄지는 의연했다

어느새 그녀는 투사가 되어 있었고 오히려 걱정하고 두려워하는 까치를 위로하며

한 번도 까지 앞에서 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면 해야죠.”

입술을 깨문 그녀의 단호함에 의사도 천근만근 짓눌러 오는 책임감을 느꼈다

결정을 하고 돌아 온 그날 밤은 도저히 참을 수 없어 괴로워 수면주사로 겨우 잠이든

까치의 손을 꼭 잡고 밤이 새도록 소리 없이 흐느껴 울었다

“사랑해. 사랑해. 사랑한다고 이 바보야”

하지만 엄지는 몰랐다 까치도 밤새워 같이 울었다는 것을.

수술실 앞에서 여러 사람들이 어슬렁거린다.

모두가 한 결 같이 어둡고 초조한 얼굴이고 서로를 바라보는 눈길은 안타까움이다

모두 낯선 사람들. 이것도 인연일 것인데 왜 이런 곳에서 마주해야 하는지.

그래서 인생에 피해야하는 3곳으로 병원 경찰서 법원이라고 하는 속설이 있었구나.

그저 집과 기원을 오가는 것 외에는 별 신경 안 쓰고 살았기에 엄지는 이번일이

엄청난 고행이고 경험으로 너무 잔인하다고 생각했다

한 번도 스스로 해본 적이 없었던 자신이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지

그 마저도 의심스럽기만 했다.

그러나 그것은 단순하고 명백한 명분이 있다는 것을 이내 알게 되었다

사랑.

그래. 그것이면 세상에 무엇을 못하랴.

잠시 답답함을 달래려 창가로 걸어간다. 수많은 사람들과 차들이 오간다.

저들은 어떻게 사랑하면서 살아갈까. 과연 저들의 삶은 패도 없는 완생일까.

운명은 항상 뒷맛을 노리고 있음을 그들의 삶은 알고 있을까.

우리만 어리석게 삶을 확인 않고 손을 빼고 다른 곳을 보며 살았단 말인가.

엄지는 머리를 좌우로 흔들며 두 손으로 머리칼을 감싸 치켜 올린다.

“어떻게 됐어요.”

나지막한 속삭임 소리에 소스라치며 돌아보니 다른 일행이 합세하며 안부를 묻는 소리다

모니터로 보이는 안내멘트도 흐릿하게 보인다.

그렇구나. 어저께 밤을 새웠고 몇 일째 그런 상태다 갑자기 피곤이 몰려온다.

빈 의자를 찾아가 잠시 눈을 감고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깜박 잠이 들었다

“그래요 참 안타깝네요.”

이상한 소리에 깜짝 놀라 눈을 떠보니

담당의사가 간호사와 함께 엄지를 안타깝게 내려다보고 있었다.

순간. 불길한 생각이 확 들이닥친다.

비몽사몽간에 의사의 멱살을 움켜쥐고 바짝 얼굴을 들이밀며 다그쳤다

“바..방금 뭐..뭐라고..”

“무슨 말 이예요. 방금 뭐라고 하셨어요.”

엄지는 흥분을 감추지 못했고 의사는 갑작스런 엄지의 행동에 어쩔 줄을 모른다.

어 어. 어......

“자..잠깐만 잠깐만요”

의사와 간호사의 간곡한 만류에 정신을 가다듬고 손을 놓으며

의사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고 뚫어지게 쳐다본다. 손에는 땀이 채이고 부들부들 떨었다.

그리고 속으로 다짐하고 다짐한다.

“다른 말은 않되. 절대로.”

조금은 진정 된 것을 보고 의사가 말을 꺼낸다.

“우리가 하는 말을 오해 하셨나 보군요.”

“저희는 엄지님의 정성이 안타까웠을 뿐입니다.”

엄지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의사만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다행으로 수술은 성공적이고 위기는 넘겼습니다.”

꺄아아악........

괴성을 지르며 달려간 엄지는 의사에 목에 매달려 이내 엉엉 소리 내어 울었다.

또 다시 당황스런 행동에 이제는 의사와 간호사가 정신이 없다

“나는 지금부터 우리 애기아빠 말고는요 의사 선생님을 가장 사랑 할 겁니다.

진짜로요. 진짜로..”

으아아앙.........

의사도 간호사도 눈이 붉어졌고 당황하던 의사는 누가 보든지 말든지

그대로 엄지의 등을 연인처럼 토닥여 주었고 간호사도 그녀의 등을 가만히 쓸어주었다

그렇게 수술을 마치고 상태가 호전되어 퇴원을 하였지만 회복은 더뎠다

집에서 소일거리로 오로에 접속하여 바둑을 두거나 대화창에서 기우들과

세상사는 이야기 나누는 것이 고작이었으니.

그래도 엄지에게는 곁에 있어주는 것으로도 감사하고 아직은 끝난 게 아니지만

기필코 운명과의 패싸움에서 꼭 이기리라 다짐을 한다.

자기 자신이 곧 팻감이고 사랑으로 계속 팻감을 만들 것이라고 맹세를 하였다

그러나 의외로 운명의 삶을 확인하는 추궁은 끈질기고 집요하게 다가왔다

갑자기 상태가 나빠지더니 급기야 두 번째 수술을 받게 되었다

하지만 이미 엄지는 수도자의 자세가 되었고 모든 일에 침착했다

나는 최선으로 임하고 절대 포기하지 않는다.

그리고 나는 이미 너의 수순을 알고 있으니 매순간 승부수를 던지리라 했다

다행히 이번에도 수술은 잘된 것 같고 얼마간의 입원을 뒤로하고 퇴원하면서

엄지는 중요한 결정을 내린다.

“이대로는 안 돼. 가야겠어.”

예전부터 생각했던 공기 좋은 곳으로 요양을 가기로 결정을 한 것이다

마침 지인과 의사의 권유도 있었고 장소도 허락받았다

포항 감포에 선산이 있는 분이 부모님 그리울 때 머문다는 작은 산장을

사용하라 허락했기에 애들 때문에 망설여 왔던 일을 마지막 승부수로 띄우려

작심을 하고 먼저 친정 부모님께 양해를 구했다.

그리고 까치에게 그렇게 할 것이니 이유 없이 따르라 통보만 했다

“자기는 이제 모든 남은 시간에 내가 장문을 걸었어.”

“그러니까 우리를 위해서 자기는 내 허락 없인 한 발짝도 마음대로 움직여서도 안 돼”

까치는 말이 없다.

그저 고개 돌려 먼 하늘을 응시할 뿐이다

이제 남은 것은 아이들이다

그날 저녁 짐을 챙기다 아이들 방에 들어가 천진난만하게 잠들어 있는 그들의 모습에

차마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가슴이 답답하고 안쓰러워 어지르진 옷가지를 챙기며

결국 울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우는 기척에 아이들이 깨는 것 같아 황급히 문을 닫고 나왔는데.

“엄마 왜 울어.”

소스라치게 놀라 돌아보니 어느새  따라 나온 채은이가 눈을 비비며 바라보고 서 있다.

엄지는 가만히 품으로 당겨서 나지막한 소리로 채은이에게 속삭인다.

“우리 채은이 엄마 말 잘 듣는 착한 아이지.”

“네”

“엄마가 아빠 병 고치러 가는데 채은이는 할머니 말씀 잘 듣고 있기로 약속 했지.”

“네...”

벌써 울먹이는 채은이를 똑바로 세워 바라보며 단호하게 말한다.

“우리 채은이가 이러면 엄마는 어떻게 된다고 했지.”

울먹이며 대답하는 채은이

“채은이 보고 싶어서 아빠 병 못 고친다고 했어요. 으앙~ ”

결국은 울음보를 터트린다.

엄지는 입술을 깨물며 마음을 굳게 다진다.

“엄마 가지 말까”

“아니에요. 그러면 아빠랑 오래오래 같이 살 수 없다고 했어요. 흑 흑..”

“그러면....”

“채은이가 울지 않아야 해요.”

엄지는 채은이를 다시 당겨 꼭 안고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그래도 엄마 아빠가 너무너무 보고 싶으면 채은이는 어떻게 해요”

“응.  음... 그때는 매일 편지를 써요”

“엄마 아빠도 채은이랑 오빠가 보고 싶으면 편지를 쓸 거예요”

“네”

“그런데요. 엄마 ...”

“ 으 응.. 왜.”

“하루에 두 번 써도 되요. 우체부 아저씨가 귀찮다고...”

“아니에요 절대로 그렇지 않을 거예요. 우리 착한 채은이 예쁘다 할 거에요”

“정말!”

금방 화색이 돌면서 얼굴이 밝아진 채은이가 아기 곰을 안고 돌아선다.

빼 꼼이 열린 문틈으로 처음부터 지켜보며 눈물 코물로 범벅이 되어 훌쩍이던

명인이가 화들짝 놀라 소매로 이씨~ 이씨~ 하며 훔치고는 이불속으로 뛰어든다.

“엄마 안녕히 주무세요.”

한손으로 아기 곰을 잡고 한손으로 예쁘게 손을 흔들며 채은이가 돌아간다.

아.! 이 어린것들에게 우리가 무슨 죄를 짓고 있는가.

엄지의 마음은 천 갈래 만 갈래 찢어졌지만 눈에는 비장한 살기마저 돌았다

이튿날.

약속대로 명인이도 채은이도 눈물을 보이지 않았고 까치는 말없이 아이들을

일일이 안아주고 돌아서는데 명인이가 까치를 부른다.

“아빠”

“으 응.”

돌아서는 까치에게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그 작은 손을 불쑥 내민다.

“그. 그래 자 악수. 파이팅”

잠깐이지만 아침 햇살아래 부자간에 굳게 잡은 손. 그 모습에서 엄지는 희망을 보았다.

복잡한 도심 속을 빠져나오니 상쾌한 기분과 함께 외로움이 엄습한다.

여느 때 같으면 뭔가를 즐기려 가는 길이었건만

지금은 전장을 나서는 병사처럼 비장함에 두 사람 모두 말이 없고

창가를 스쳐가는 전원 풍경에 무심한 시선을 주고 있다

두 사람은 굳이 서로를 위로 하려고도 하지 않았고 한동안 침묵으로 일관했다

그래도 6~7시간은 가야 하는 길이다.

“좀 쉬었다 갈까”

“으 응. 그래 나는 뭐 괜찮지만 자기가 힘들 테니 가까운 휴게소에 들렀다가자.”

추풍령 휴게소에 들어가니 차들이 많다. 저들은 어디로 무엇을 하러 나섰을까.

엄지는 이제 습관적으로 주변을 돌아보고 자신과 비교하게 된다.

바둑을 배우고 처음 이기는 맛을 알았을 때 그 짜릿함은 단순한 결과의 만족보다

상대를 나의 생각 속으로 끌어들여 내가 원하는 대로 움직이게 하는 그 전율의 과정

그 반대로 상대의 의중을 간파하고 급소를 찔러 역습하는 희열에 있었다.

그래서 평소 쾌활하지만 여리고 감성적인 성격에 비해 바둑은 전투적이었다.

그것을 까치를 만나 바둑의 깊이를 더욱 느끼고부터 전투보다는 유연한 과정과

순리를 따르며 기다리는 여유. 승부에 연연하지 않고 모양을 중시하고 형세판단에

부분적인 손익을 떠나 전체를 아우르는 안목이 생기게 되면서 바둑이 겸손해졌다

겸손.

그것으로 그는 세상을 바둑을 다시 보게 되었던 것이다

그렇게 초보 취미생활에서 바둑의 맛을 안다고 볼 수 있는 오로 4~5단의 실력이 됐고

세상일에 임함에 바둑의 이치와 순리가 전혀 다르지 않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하지만 작금의 현실은 비세고 마음은 조급하고 불안하다

대마가 사활패에 걸렸고 그것이 곧 승부다. 마음처럼 생각처럼 된다는 보장도 없지만

운명이 외길수순을 두어오고 젖힐 수밖에 없어 젖히고 끊을 수밖에 없어 끊어간다

하지만 아직 승부는 모른다.

운명도 나도 부대끼고 엉켜 서로가 생사를 알 수 없다.

엄지는 최소한 빅이면 된다고 생각한다. 나의 대마가 죽지만 않는다면 승부는 길다고.

긴 여정 끝에 목적지에 당도하니 해가 서산으로 기울고 있었다.

서둘러짐을 내리고 괜찮다고 거들려고 나서는 까치의 잠자리부터 보아준다.

까치는 아무 말 없이 엄지를 따른다.

어느새 무엇인가를 하려다가도 엄지의 눈치를 본다.

엄지의 눈빛이 싸늘해지고 입술을 깨물며 동작을 멈추면 그것으로 그만이다.

저녁은 준비해 온 미음으로 엄지는 빵 한조각과 우유로 때웠다

대충 정리하고 돌아보니 어느새 까치는 곤히 잠이 들었다

이불을 덮어주고 베개를 고쳐주고 물끄러미 바라보는 엄지에게 만감이 교차한다.

조용히 밖으로 나와 하늘을 바라보다 유난히 별이 초롱초롱하니 채은이가 떠오른다.

벤치에 앉아 들고 온 커피를 한모금하고 산 아래를 내려 보다 갑자기 두려움과 함께

서러움이 밀려오고 아이들 생각에 결국은 얼굴을 무릎에 묻고 울음을 터트린다.

그렇게 아무도 없을 때 그녀는 여전사에서  본래의 여린 엄지로 돌아가는 것이다

마음껏 울어 버리고나면 다시금 전의에 불타는 여전사로 돌아오는 것이다

단 반집의 양보도 없다. 승리를 확인해도 결과를 볼 때까지 긴장의 끈을 놓지 않는다.

두고 보라.

우리를 꺾으려 패를 걸었지만 우리가 결코 약하지 않다는 것을 그것이 오히려

우리를 강하게 담금질 하는 것이고 승리는 결국은 우리의 것이 되리라.

마음을 추스른 엄지는 매무새를 가다듬고 자리에서 일어나 까만 동해바다를 향해

두 팔을 벌리고 한껏 맑은 공기를 들이 마신다.

이제 내일부터 당장 준비해 온 계획대로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진행해야 한다.

이미 인생이 걸렸으니 서두를 것도 없다.

엄지도 몸과 마음을 잘 다스려야 한다. 그에게 모든 사활이 걸렸음에야.

엄지가 돌아서자 창가에서 처음부터 지켜보던 그림자가 커튼 뒤로 사라진다.

시끄러운 새소리에 눈을 뜬 엄지는 소스라치게 놀란다.

바닷가 산중턱이라 아침이 이르고 여독 때문인지 숙면을 취한 모양이다

문득 옆자리가 허전하여 침대에서 뛰어 내리며 가운을 들쳐들고 허둥대는데

“일어났어.”

창문가 의자에서 까치 목소리가 들린다.

다소 안도하며 그에게로 다가가니 눈을 감고 앉아 있었다.

“오늘부터 아침에 일어나 한 시간씩 명상을 하라고 했잖아”

“아직 한 시간이 안 되었으니 계속할게“

엄지는 가만히 어깨를 만져주고 목에다 입을 맞추고 돌아섰다

당분간 아침과 저녁은 미음이다. 점심은 야채와 생과일주스와 전복죽

그리고 단계적으로 식단을 짜뒀다

아침을 준비하고 엄지는 서둘러 집을 나선다.

한 시간 남짓 거리의 산 정상 언저리의 약수터로 가서 약수를 떠온다.

까치는 아침에 명산과 휴식 그리고 점심 후 가까운 거리를 산책하고

저녁 때 까지 무리하지 않는 선에서 기보 보기나 복기 정도만 허락된다.

컴퓨터도 안 되고 TV와 전화도 안 된다.

그래서 바둑판과 그동안 미루어 오던 바둑책들과 기보만 들고 왔고

명상과 휴식 외에는 바둑 그것이 그들만의 치유책이다

엄지는 일주일에 한 번씩 서울로 올라가 약을 타오지만 절대로 집에는

들르지 않았다. 행여 아이들과 남편사이에서 갈등 할까봐.

모든 것에서 떨어져 둘 만의 시간은 처음엔 고통이었다.

외로움과 그리움 특히 두고 온 아이들과 부모님에 대한 죄스러움.

하지만 날이 갈수록 초연해짐은 어차피 대마가 죽는다면 판을 새로 짜야한다

엄지는 그래서 대마사활에 승부를 걸었고 까치는 엄지의 정성 앞에서 묵묵히

따르는 길 외에는 달리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원래 조용한 사람인데다 엄지에게서 건강에 대한 이야기 외에는 화제에 올리지

못하게 하는 엄명이 있었기에 더더욱 말이 없었다.

하지만 그도 인간이기에 내면의 갈등은 수 없이 일어나고 사라지곤 하였다

인생에서 부부사이란 어쩌면 연기바둑을 두는 건지 모른다.

그래서 까치는 지금 형국에서 별다른 묘수가 없다면 엄지를 위해서 자충수라도

두지 않아야겠다고 다짐 한 것이다

두 사람의 고행은 같이 있어도 따로 그러면서도 한마음으로 수도하듯 지나갔다

처음 문 앞에서 배웅하던 까치가 조금씩 멀리까지 마중을 나오기 시작한 것은

그로부터 5개월 후였고 엄지는 무리하지 않는다는 전제하에 가만히 지켜보았다

늘 말이 적고 조용한 사람이나 까치는 속으로 악전고투를 하면서 정진하였다.

일 년이 지나고 숲속의 남녀만 있는 산장에서 바둑 돌 놓는 소리가 자주 들렸다

딱.    딱.   ........ 달그락 달그락   .....   딱.

그동안의 생활은 그들만이 아는 것.

그리고 어느 날 오로 게시판 티카방에 어느 중년부부 두 사람의 사진이 올랐다

산 정상인 듯 한곳에서 좀 촌스럽게 나란히 손가락으로 V자를 그리며.

제목은. (여러분 감사합니다.)

뜬금없이 올라 온 사진에 별 다른 반응은 없었고 평범하게 지나갔으나

얼마 후 엄지의 감사 글이 올라 온 후로 그들의 이야기가 입에서 입으로 전해졌다

모두 몇 자 적어 격려 했을 뿐인데 오히려 감사해 했다 그리고 박수를 보낸다.

두 사람이 기원을 다시 시작했다는 소식에 모두들 진심으로 축하해 주었으며

그렇게 하나 둘 모였고 어느 듯 십년의 세월이 지나 오늘에 이른다.

동안에 광장에서 티격태격하던 사람들도 모두 화해를 했고 오히려 더 친숙해졌다

인신공격이 난무하던 광장엔 건전한 대화와 소통의 장이 되어 북적거렸다

진정한 바둑 허브농장이 되었고 그렇게 오로도 건강한 20세가 되었다

오늘은 귀한 손님들이 참석 의사를 많이 보내왔다

오로 포인복지재단 이사장님과 영원한 오로의 무소뿔 정. 그가 오로의 대표작가

이선생과 여선생을 동행해 참석한다고 전갈이 왔고 연리지님이 부군과 함께

격려차 애들을(셋) 데리고 잠시 들르고 싶다고 전해왔다.

잔치가 벌어진 것이다.

“어이 원장.”

“뭐여. 어젯밤에 밀린 숙제 한거여.”

‘아..예 .예. 잠시 생각 좀 하느라고...죄송함돠“

가면무대라는 인터넷에서 바둑으로 만난 인연들이 모여 허심탄회하게 마음을 나누는 곳

그곳은 광장을 거친 그리고 지금 활동하고 있는 글 객들이 모이는 인터넷 한국기원이다

그곳에서는 상시 벙개가 열리고 혹 보고 싶고 궁금한 사람이 있으면 가면 다 있다.

잔치를 준비하는 사람들이 분주하다.

** 사실 이글은 단편으로 오로묵시록님과 AHHA님의 쾌차를 빌고

   지난 5월에 꽃잎처럼 떨어져간 만석님처럼 너무 쉽게 포기하지

   마시고 꼭 이겨내시라는 저의 작은 염원을 전하고 10주년을 맞은

   오로가 건강하게 성장하여 다시 10년 후에도 더 풍성하고 유익한

   바둑 허브농장이 되기를 비는 마음을 간단하게 올린다는 게...

그래서 혹 마음이 산만해질까 답 글도 달지 않고 나름 최선을 다하였는데

어저께 AHHA님의 댓글을 보고 자칫 누가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으로

여기서 급히 마무리를 하게 되었습니다.

글 보다는 의도를 살펴주시고 그동안 짧은 글 격려 해 주신 분들에게 감사드리며

오늘은 답 글을 올리겠습니다. ^^&

모쪼록 어려운 환경에서 위로 받으려 오시는 분들도 많다는 점을 헤아려

여기서마저 상처를 받는 일이 없었으면 하는 바램이 꼭 이루어졌으면 합니다.

기우님들.

모쪼록 오로에서 늘 행복 하세요. (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