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둑일기136, 평정심

돌이 반듯하게 놓이지 않으면 신경이 거슬린다. 내가 놓은 돌은 물론 상대의 돌도 가끔 손을 대 반듯하게 다듬는다. 돋보기를 쓰는 탓도 있겠지만 이제는 제자리에 있던 물건이 그 자리에 있어야 마음이 편한 것이 나이 탓일까?

알들이 덜덜 떨린다. 이상해서 옆의 판을 보니 그곳도 덜덜 떨리는데 모두 가만히 보고만 있다.

옆자리엔 땅딸이 정 원장과 꼼지락의 두 점 대국이다. 난폭한 엉터리 바둑의 정은 되지도 않는 엉터리 초식으로 정석을 거스르며 하수를 잘 잡기로 유명한데 꼼지락 에게는 오히려 두드려 맞고 있다. 만방으로 가는 바둑을 어떻게든 수를 내 보려고 장고를 하느라 바둑판이 덜덜거리는 것도 모르고 있나보다.

건방의 광기 꼼지락은 기탁 밑의 가로 받침목에 양발을 올려놓곤 몸을 들썩거려 반상의 돌들이 춤을 추고 있는데도 모르는 것인지 즐기는 것인지 특유의 흥얼거림이다.

중2이래 바둑둔지 어언 40년이어 반상에서 기원에서 별의별 인물과 별의별 사연도 겪었지만 새로움과 경이로움 놀라움을 주는 이들과 인물들은 그치질 않는다.

그와는 평소 말도 잘 섞지 않는 편이어 옆자리의 꼼지락 에게 무릎근처에 손을 펴 제지한다.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 없지만 알아 는 들었는지 양 발을 내린다. 초장부터 신경이 거슬리는 게 영 운수가 사나울 듯싶다.

첫 대국은 빛나리 이다. 같은 편 양복 최는 강 원장에게 걸렸으니 무조건 질 테고 내가 최소 두 방은 이겨야 할 텐데 빛나리 에겐 쉽지 않은 일이다. 10급짜리 하수와 두듯이 상대를 무시 하듯이 뻔한 수만 밀어붙이는 그는 사람은 좋은데 바둑 두는 매너는 영 아니다. 그와 같은 편이 되면 모두들 싫어한다. 되지도 않는 욕심을 부리다 이긴 판도 몇 방씩 지기 일쑤 여서 같은 편에 피해만 끼친다. 서로 친한 꼼지락과 빛나리가 옆에 앉아있어서 바둑판이 덜덜거려도 아무 말 없이 모르는 척 한 것일까? 조금만 유리하면 옆의 사람들에게 어쩌구저쩌구 하면서 상대를 우습게 여기는 듯한 모션을 취하는 그의 모습엔 오히려 연민을 느낀다. 가방끈이 짧아서들 저럴까? 혼자 하는 놀이 바둑만 좋아하느라 사회성이 결여된 것일까?

가진 자와 없는 자는 반상에서도 관전에서도 조금 다르다. 밑천이 짧은 이는 한 판 한 판에 일희일비하며 목숨 걸고 두는 프로처럼 집착한다. 졌어도 던질 줄 모르고 포기하지 않고 되지도 않는 반전을 도모하며 더 많이 진다. 가진 자는 마음의 여유가 옆에서도 엿보인다. 설령 제가 져도 옆의 편들이 이겨 돈을 따는 경우가 많다. 이기든 지든 항시 미소를 잃지 않는다.

기력에 걸맞는 인품도 오랜 세월 연마하다보면 도야가 될 것 같은데 기력과 인품은 비례하는 것은 아닌가 보다.

빛나리 에게 9집을 이겼으나 최가 16집을 져 첫판에 잃는다. 수입상을 운영하는 최는 최근 이태리에 다녀왔다는데 사업도 잘 되나보다. 항시 지는 편이어 같은 편에게 원망을 많이 듣고 돈도 많이 잃는 것 같지만 개의치 않는 그의 바둑사랑은 정말 깊은 것 같다. 동생이 프로라는 것 같던데.

부담스럽게 옆에 바짝 붙어 앉아 관전하는 조는 말 한마디 없지만 빛나리가 이겼으면 싶어 마음의 성원을 보내는 것이 보인다. 불과 얼마 전부터 기원에 나타나 숙식하는 그는 재떨이 청소나 술추렴에 안주사오기 심부름 등 시키지 않는 일도 나서 잘 한다. 밑천이 없는지 종일 바둑은 두지 않지만 구경을 좋아한다. 스스럼없이 대해주는 빛이 좋았겠지.

네 판을 모두 이겼든 졌든 잃었다. 몇 달에 한번이나 있을까 평소에 거의 없는 일인데.

결국원인은 나 스스로에게 기인한다.

신경이 거슬리는 것이 반상의 무아지경을 이루지 못해 기량이 충분히 발휘되지 못한 것이지.

그러고 보면 꼼지락이나 빛나리의 반상에서 상대의 신경을 거슬려 놓는 것들이 의미가 있는 그들 나름의 처세술이자 생존 방법이군.

목숨 걸고 고층외벽에 밧줄에 매달려 일을 하는 그 투혼이 반상에 돌을 늘어놓는 것쯤은 내 시간 들여 돌을 놓아주었으니 돈은 내 놓아야지 인가보다.

평정심을 잃지 않는 것이 승부의 요체이며 생활의 지혜일 텐데 아직도 연마가 덜된 내 바둑이군!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