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고구마

군 입대 후 갔던 원주인근, 초봄의 푸름 속에 밭에서 일하는 아낙들에게 물었다. 아주머니 이게 뭐에요? 파릇파릇한 새싹들이 좋아 보여 물었더니 이건 보리 구 쌀 나무도 못 보았겠네. 라며 그 분들은 서울 촌놈을 재미있어한다. 군 생활은 사역을 다니느라 대민지원에 지게도 져 보고 고구마 줄기도 캐 보게 된다.

넝쿨 넝쿨 엮여서 올라오는 고구마 줄기. 팔뚝만한 강원도 옥수수를 개천에서 구워먹던 기억. 시골에선 이장이 힘을 쓰는지 이장 댁에 사역봉사를 나갔다가 이것저것 먹을 것을 엄청 주워 넣었다. 방구를 꼈는지 순간 똥이 군복 속으로 나온다. 배불리 먹어본 것은 좋은 일이지만 똥까지 싸도록 먹다니. 마지막 순간에 먹던 것은 라면땅 이었는데.

고구마를 캐던 기억은 기억 속에 남아 있었나보다. 이장 부인의 손이 험난한 일상과 논 밭일에 갈퀴 같았던 모습은 아직도 기억에 있다.

모처럼 바둑을 둔다. 최근 하도 지기만 하고 어쩌다 이겨도 편이 져 항상 잃기만 해 바둑을 두는 것을 꺼리고 멀리했었다. 두 번을 이기더니 세 번째는 역시 지고 네 번째에 다시 이긴다. 2만원을 땄군. 기료와 담뱃값을 내면 만 원 남은 것이군.

오피스텔로 돌아가는 길에 과메기 범수가 군고구마 장수 옆에 서있다.

빛나리는 잉어빵장사를 시작하더니 범수는 군고구마 장사를 시작한 것인가?

“뭘 사가지고 가세요?”

“라면이 떨어져서.”

길을 멈추고 군고구마 기계 옆에 서서 이야기를 잇는다.

경제가 어려워 사람들이 지갑을 열지 않고 고구마도 안 팔린단다.

옆에 앉아 같이 막걸리를 마시던 이는 노래방 주인이라는데 손님이 없어 고민이란다.

포항의 형이 기원으로 보내 준 과메기 껍질을 손으로 벗기던 범수는 역시 정이 많아 군고구마를 파는 후배 옆에서 서서 지켜주고 있나보다.

3천 원짜리 군고구마를 팔려고 서있어도 안 팔린다는 그. 그 옆에 서서 발길을 옮기지 못하는 나. 범수와 같이 저녁이면 식사를 하러 식당에 가고 노래방에 가고 양주집 섹시 바에 갔던 것이 작년 이었는데 세상이 이렇게 갑자기 어려워 진 것일까?

그러고 보니 오늘 범수는 기원에 오지 않았었다.

돈이 아까워서 이었을까?

돈이 없어서 이었을까?

“건설 경기가 다 죽어버리니 일이 없어.”

기원에도 오지 않으며 군고구마 장수 옆에서 무언의 힘을 실어주는 범수.

그것이 그의 정과 의리의 표현방법이겠지.

복직하면 범수와 빨리 양주 한 잔을 해야겠군. 속으로 생각해본다.

군고구마라는 제목의 바둑 일기를 썼던 기억이 난다.

안양 인천교대의 아름다운 캠퍼스 아늑한 평온한 테니스장에서 체대 교수 노릇하던 동창과 잘 나가는 동기들과 테니스를 치며 군불에 부인들이 구워주는 고구마를 사치스럽게 구워먹던 적도 있었지만 팔기위해 밤을 지새우는 이 옆에서 가던 길을 멈추고 가지 못하며 대화를 하는 이 모습이 잘난 동기동창보다 더 갚진 진정한 사이들이 아닐까?

오늘은 처의 목소리를 전화로 들으니 너무 좋다.

그녀는 테니스장의 군고구마를 기억하고 있을까?

내가 라면을 소주를 봉지에 담아 사가는 모습을 상상해 보았을까?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