不倫 (1)

선비만석

  아침부터 봄비가 질척거렸다. 낯 시간에 그를 만나기로 하였는데 비 오는 날을 좋아하는 그가 어쩌면 기분이 더 업 되어 있을 것 같았다. 그는 비 오는 날을 유난히 좋아했다. 은숙이 그를 만난 것도 비 오는 날 이였다.

  퇴근 무렵 한줄기 소나기가 퍼붓던 지난해 여름 이였다. 일기예보를 잘 안 듣는  천성 탓에 은숙은 우산준비를 게을리 하기 일쑤였고 그럴 때는 무조건 택시를 잡는 버릇이 있었다.  그날도 은숙은 우산을 준비 하지 못한 탓에 회사를 나서자 시작한 빗줄기를 피하여 가까운 거리에 있는 택시 정류장 까지 마치 백 미터 선수처럼 잽싸게 달렸다. 하지만 지붕이 없는 택시정류장에서 택시를 잡을 때 까지는 비를 몽땅 맞을 판 이였다. 그때 누군가가 은숙의 머리위로 우산을 가리고 있었다. 그게 그였다. “송 민석” 그 일로 인해서 은숙은 스물여덟이나 나이를 먹도록 없던 남자 친구가 생기게 되었고 바로 그가 첫 번째 남자 친구였다.  그는 순진한 남자였다. 남의 말을 곶이 곶대로 믿고 거짓말을 잘 못하며 자신의 일 보다는 남의 불행을 아파하는 그런 사람이었다.

  그와의 첫 사랑을 은숙은 운명으로 생각했다. 그리고 이년 후 은숙은 민석의 아내가 되었다. 하지만 결혼은 연애와는 달랐다. 은숙은 그와의 결혼 생활에서 일년도 채 안되어 너무도 무미건조하게 느꼈다. 직장과 가정을 다람쥐 쳇바퀴 돌듯하며 오로지 정직하게 살고자 하는 그에게 은숙은 점차 질리고 있었다.

  그가 유일하게 취미로 하는 것이 있다면 바둑이었다. 휴일이면 그는 기원을 들락거렸고 기원을 안가면 하루 종일 컴퓨터 앞에서 인터넷 대국에 몰두하여 은숙은 그와의 대화단절을 심각하게 생각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자기야, 바둑이 그렇게 좋아?!”

  “그럼, 바둑이 가장 재미있는 신선놀음이지.....”

  “아니, 신선놀음에 도끼자루 썩는 줄 모른다더니 정말 그러네. 그래도 나한테 너무 하는 것 아니야 남들은 일요일에 외출을 한다. 영화를 보러간다 하는데 우리 영화본지가 얼마나 되는지 알기나 해?”   

  “은숙씨도 바둑을 배워 그럼 나랑 바둑 두고 시간을 재미있게 보낼 수 있어.”

  “아니, 바둑이 무슨 재미가 있어 판에다가 한번씩 교대로 흑돌 하나 백돌 하나씩 올려놓는 건데.”

  “그건 은숙씨가 바둑을 몰라서 그래 죽었던 것이 살아나기도 하는 것이 바둑이거든, 바둑은 마치 인생의 축소판 같은 심오한 것이야”

  “아이고, 바둑이 무슨 철학인가...”

  “그럼 바둑은 철학이고, 예술이고. 인간의 마음을 움직이는 마술이고 정을 나누는 수담이고....머 여하튼 인간이 만들어낸 게임 중에 가장 창조적인 게임이지”

  “바둑이 게임이야?”

  “그럼, 승패가 갈리는 아주 짜릿한 게임이기도 하지”

  민석이 바둑에 대해서 입에 침이 마르도록 예찬을 늘어놓자 은숙은 바둑에 약간의 흥미를 가지게 되었다. 하지만 민석이 미워 민석에게 바둑을 가르쳐 달라지는 않았다. 그러나 우연한 기회에 은숙은 바둑을 배우게 되었다. 고향에서 죽고 못 사는 죽마고우 친구였던 소영이 바둑을 두는 프로기사와 결혼을 한다고 청첩장을 보내 것이 그녀가 바둑을 배우게 되는 계기가 되리라고는 그녀도 알지 못했다.

  바둑은 마치 운명처럼 그녀에게 다가왔고 그녀는 바둑을 알게 되자 어느새 바둑에 흠뻑 빠져드는 자신에게 소스라치게 놀라고 있었다. 소영이 결혼 후 단짝 친구들을 집으로 초대했을 때 소영의 남편이 유명한 프로기사임을 알게 된 은숙은 소영을 졸라서 민석 몰래 소영의 남편으로부터 바둑을 일주일에 한번씩 배우기 시작했다.

  어떤 일에 빠지면 집중력이 강한 그녀가 바둑에 빠지자 그녀의 집중력은 그 위력을 발휘하기 시작했고 그녀는 일년 후에 소영의 남편에게 넉 점을 접히고 둘만큼 일취월장으로 실력이 늘었다. 그 때부터 은숙은 아마추어 바둑대회에 참가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여성들만의 바둑대회에 참여하다가 그녀는 실전 경험이 쌓이자 아마강자들이 득시글거리는 아마최강부에 도전하였다. 처음은 예선에서 전패를 당했으나 참가횟수가 늘어  날수록 그녀의 도전 의식이 그녀를 강하게 만들었고 급기야는 16강과 8강을 왔다 갔다 하면서 아마 바둑계의 그녀의 이름 석자를 서서히 알리기 시작했다.

  그녀는 바둑을 두러 다니면서도 민석에게는 철저히 비밀로 하였다. 물론 우승을 하였더라면 바둑지를 보는 민석이 알게 되었겠지만 그녀가 우승을 한 적이 없으므로 민석은 은숙이 바둑을 배웠는지 바둑을 두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녀가 바둑을 두는 것을 철저히 비밀로 한 이유는 바둑대회에 참가하다가 만난 기철 때문이기도 하였다.

  기철은 연구생 출신의 아마강자였다. 연구생 일조에서 입단을 못하고 나이가 넘어서 연구생에서 나왔으나 그는 집안이 서울에서도 워낙 잘 사는 집안이라 그저 바둑을 두는 것으로 소일하는 룸펜이었으며 같은 취미를 가진 은숙이 자연스럽게 그를 만나게 된것이고 민석과의 답답함에서 느꼈던 좌절이나 절망 보다는 기철 그와는 대화가 통했다. 수담은 물론, 바둑이 두기 싫어졌을 때 기철과 은숙은 많은 이야기를 주고받는 사이로 발전하였다.

  민석이 은숙을 밖에서 만나자고 한 것은 의외였다. 어찌 되었거나 비오는 날 민석을 만나러 간다는 것이 처음 민석을 만나던 날을 떠올리게 하여 은숙은 가슴이 뛰기까지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