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둑일기 195, 장충동 족발집

첫 판은 같은 편이 29집, 40집 무려 69집을 이겨 내가 14집을 졌지만 승리 한 편이다.


술을 먹은 후엔 바둑을 안 두는데 오늘은 기분도 얼콰해 둔 것이 첫판을 이겼으니 둘째 판에 져도 그만이지 싶어 다시 두나 세 점 하수에게 무려 29집을 지고 꼴찌로 벌금 만원까지 문다.

중앙에 삭감 갔던 말이 설마하다 대마가 죽어 일찍 포기하고 집 차 라도 줄이려 애썻건만 큰 차이이다. 역시 음주운전은 금물이지.

오늘 동창들을 만났더니 첫 마디는 모두 너 아직 바둑 두니? 였다.

20~30년 만에 만난 친구들도 많은데 그들의 어린 시절 기억엔 나는 바둑만 두던 아이였나 보다.

선생님이 수업시간에 너 불러내서 바둑 두고 그랬지?

수업시간에 불러내는 건 말이 안 되는데.

오래전 기억이라 모르겠지만 교무실에서 바둑 둔 적은 없는 것 같은데 그저 대꾸를 않고 가만히 앉아 듣는다. 무슨 연유가 있어서 저리 기억하는 것이겠지 싶으며 그렇게라도 관심을 가져주니 고마워해야 하는 것이겠지.

저 친구 이름이 뭐였는지 기억을 해 보려 해도 기억을 못한다.

이젠 성근머리에 얼굴 살은 쪽 빠지고 안경까지 써 누군지 알아보지 못했다.

영락없는 초로의 영감이 된 당뇨환자라는 그는 학창시절 유명한 주먹이었던 친구 아닌가?

학생과에 불려 다니고 훈육선생의 요시찰 대상이었던 그가 나를 기억하는 건 이제 생각하니 나 역시 요시찰 대상이어서 였나 보다.

언젠가 고교시절 훈육선생이 복도에서 불러 나가니 대뜸 따귀를 연이어 8대 인지 때리더니 너 어제 종3기원에 갔었지? 라던 기억이 난다.

장충동 족발집 2층 커다란 방을 꽉 채운 동기들은 연신 술잔을 기울이며 밀린 얘기들을 나눈다. 한켠에는 부인들만 10여명 따로 앉아 계시고 오늘 모인 동기들이 모두 121명 이어 최다 참가 상으로 금일봉을 받았다.

90주년 기념이어 과거의 영광을 되살린다며 Vision 2020 으로 재학생까지 참여한 성대한 축제였다. 1971년엔 S 대 진학이 305명 이었는데 작년엔 7명이란다.

장충체육관에서 校技인 농구잔치를 벌인다.

우지원 전희철 유명스타들과 방열, 김인건 감독이 청백 팀으로 나뉘어 재학생과 대학 프로 선수들을 혼성팀으로 친선경기는 덩크슛의 연발이다.

이수만 선배의 기획사 소속이라는 fx라는 아이돌 스타들이 농구장 중앙에서 잠깐 쇼를 펼친다. 재학생들을 열광하여 농구장 트랙으로 순식간에 몰려들어 난장판이다. 200명은 될까?

연 이는 농구잔치에서 흥을 돋우는 치어리더들은 한 팀에 4명씩 편을 갈라 열띤 응원이다.

중간에 그녀들도 농구장 복판으로 나와 그룹댄싱을 선보인다.

8명 치어리더들의 춤은 한층 더 선정적으로 자극적이다. 재학생과 졸업생 환호하는 군중속에 혼자 생각한다. 무명의 저 8여인과 아까 fx라는 소녀들의 차이는 무엇일까?

내 보기엔 오늘 이 자리에 더 어울리는 열심히 노력한 이들은 무명의 치어리더들이 아닌가 싶다.

내가 애청하는 티브이 프로 짝패와 달자의 봄에서 열연 중인 공형진 후배는 사회를 보며 따끔한 일침도 잊지 않는다. 후배들이 관중석의 지정된 자리를 벗어나 무대 앞으로 몰려든 무질서를 일갈한다.

옆자리의 동기들이 그저 좋다. 젊은 시절 그들과 얽히고설킨 궂은일도 무수하지만 이젠 다 세월이 흘러 지난 일일 뿐이다. 족발과 빈대떡 안주에 연신 소주잔을 기울인다.

저 쪽 옆자리의 친구는 모 대학 학장인데 이번에 총장이 유력하단다.

그의 인사말은 유려하다. 역시 똑똑한 친구들이지!

나는 무엇을 이룬 것일까?

곁의 친구는 아파트 경비를 나간단다. 육사 재학시절 4학년 때 동기에게 답안지를 보여주다 퇴학당했는데 그렇지 않았으면 장군이 되었을 이가 경비라니 세상사 팔자대로 인 것이겠지.

평소보다 많은 주량인데 별로 취한 기분이 아니다.

감회가 너무 깊어서 였을까?

결국 음주운전 바둑의 대가를 치른다.

그래 그래도 후회는 없다.

내 인생은 일관되게 바둑을 벗으로 삼아오지 않았던가?

바둑은 내게 위안이었고 내게 인생의 전기를 마련해 주었고

지금 내 자리도 바로 이 자리도 만들어 주는 것이 아닌가?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