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명의 유토피아

평소 탈의실에서 벗은 모습을 보여주기 싫어 직원들이 퇴근 후 옷을 갈아 입는다.

오늘은 모처럼 주말 이어 집에 가는 날이다.

두 시부터 10시까지 의 이브닝근무가 제 시간이 아닌 늦은 시간의 퇴근이 당연하지만 오늘은 일찍 옷을 갈아입고 시계만 쳐다본다. 콜 센터의 여직원 둘이 퇴근을 하려 하자 직원 하나가 예기한다.

“아직 7분전인데 O/T 에서 7분 빼야 되요.” 그 소리에 여직원들은 퇴근을 못하고 기다린다.

직원들의 시선을 무릅쓰고 10시가 넘자마자 나선다.

모처럼 금요일 이어 주중 오피스텔에서 보내던 것을 이제 집으로 가는 길이다.

도착한 시간은 12시 이고 피곤한 처는 잠을 못 이기지만 내게는 평화 그 자체이다.

7시경 저녁식사는 병원에서 마쳤고 배는 고프지 않으니 소주 한 잔이면 평화롭게 한 주를 마치는 것인가? 샤워를 하고 베란다에서 땀을 식힌다. 평소 맥주는 즐기지 않는데 이번 주엔 퇴근 때마다 이상하게 맥주 생각이 났었다. 부러 대형마트에 가서 페트 병에 든 맥주를 사기는 귀찮고 오피스텔 인근의 주점에 혼자 가기는 내키지 않았다.

“관리자의 입장에서 회사를 위해서 그러는 것임은 잘 알지만 직원들에게 너무 척을 지지 말라” 는 소장의 조심스러운 말씀에 일순 당황한다.

 새로 시작한 사업장의 체제구축을 위하여 지난 3개월 동안 불철주야 노심초사 하던 노력에 찬물을 뒤집어 쓰는 기분이다. 이달부터는 관리시스템의 정착과 안정을 위해 심기일전 하기로 전사적인 노력 중이며 내주부터는 개인별 업무 기록일지를 받아 성력화에 치중할 예정인데 전쟁터에서 칼을 빼앗기는 기분이다.

90명의 할당된 인원을 급히 채우느라 S의료원의 경력 있는 자원자 10명 미만에 신규 80명을 선발하여 응급실, 중환자실, 임상병리과, 약제부, 이송부문, 의료정보, 콜센터 등에 거의 교육도 못 시킨 채 충원을 마쳤다. 부서별로 급조된 인원 중 적성에 안 맞거나 기대에 못 미치는 경우도 있고 타 부서로 전출을 원하는 직원 등 아직 세심하게 손을 보아야 할 과제가 구석구석 산재해 있는데 한발을 빼라는 격이니 벌써 토사구팽 인지 역시 나설 필요가 없는 것인가 싶다.

퇴근길에 맥주 한 잔을 마시는 것도 주머니 걱정을 하며 절약을 해야 하니 넉넉지 못한 현실과 충족 치 못한 봉급이 나의 위상인데 조직의 효율 제고 라는 꿈만 꾸고 있던 것일까?

근태가 불량한 젊은 직원 하나를 내보냈다.

근무 투입 전 복장 착용하고 15분전에 조회에 참가하라는 지시를 사규에 그런 규정이 어디 있냐며 따지고 언성을 높이던 56세의 직원을 두 번째로 내 보냈다. 중환자실 근무자 중 목소리가 불필요하게 컸던 이를 일반부서로 전출시켰다. 그는 휴일에 내게 전화를 해 평일에도 고생하는데 자신의 휴일 근무가 왜 응급실이냐고 따져 물었다. 숙련된 믿을만한 요원들이 담당해야 하는 일이니 당연한 것이고 모두 그렇게 해 오던 것인데 일반병동보다 일이 많고 험한 응급실근무가 싫었나 보다.

아침에 눈을 뜨니 소파 탁자에는 계란 프라이 남은 것과 뚜껑도 닫지 않은 채 총각김치 통이 놓여있다. 반쯤 찬 소주잔과 조금 남은 소주 병. 간밤에 너무 피곤하여 술을 마시다 잠이 들었나 보다. 평생 처음인 것 같다. 순찰을 돌다 일을 도와준다는 것이 부서별로 인력배치가 적정치 못해 과다한 곳 과소한 곳의 불균형으로 막힌 곳을 푼다는 것이 젊은 직원들보다 더 일을 하게 된다. 허리가 아프고 이러다 몸을 다치는 것이 아닌가 내심 두려운 마음이다.

임상병리과에 들리니 나이트 근무를 나온 우리 요원이 쪼그리고 앉아서 새로운 작업 중 이다. 약 2천 개가 넘는 시험관을 베셀에서 빼내고 세척을 한다. 한 손으로 두 개씩 뽑아내는 것을 곁에 앉아 양손으로 네 개씩 빼낸다. 시험관 속의 유리닌(오줌)이 튀어 돋보기 옆 얼굴에 묻는다. 조심을 하는데도 다시 튄 오줌은 슬리퍼 앞 부분에 묻고 양말을 적신다.

HIV(에이즈), MRSA, VRE 등 각종 감염환자들의 것이 섞여있는데 걱정이다.

안 그래도 바쁜 임상병리과의 일에 새 과제를 준 병원이 야속하지만 성실하고 친절한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이 우리의 과제이니 해당 직원들이 잘 해낼 수 있도록 준비에 만전을 기해야 한다.

“계단이나 화장실에 숨어 있을 때는 인생이 비참한 것 같아요.” 젊은 이송담당이 말 할 때 마음이 찡하다. 휴게실에 앉는 것은 금지사항이고 간호부 모니터링 요원이 사진을 찍어간다. 할 일 없이 서 있는 것은 보이지 않기 위해 피한다. 인적이 뜸한 교수회관 휴게실에서 티브이를 보던 직원은 신고를 받아 시말서를 썼다. 내가 순찰을 도는 이유는 적발보다 사고를 사전에 방지하기 위해서이다.

직원들이 보람과 자부심을 느끼며 근무할 수 있고

급여도 자신이 일한만큼 적정하게 받는다고 느끼며

힘껏 일하며 내일의 희망도 있는 곳이라고 느낄 수 있는

유토피아를 건설해보려는 노력은 망상일까?

열심히 선량한 마음가짐으로 봉사정신으로 임하는 직원들이 많지만 90명의 조직을 급조 하다 보니

쌀에 뉘가 섞이듯 솎아내야 할 자세나 습관도 적지 않다.

술에 취한 채 옷도 거꾸로 입고 나온 직원을 집으로 조퇴시킨다.

무단결근을 한 직원이 간밤에 술을 많이 먹어 오전 근무에 빠졌다며 오후근무에 나오겠다는 것을 쉬라고 한다.

90명 직원들이 너무 열심히 해 줘서 감사합니다.

S의료원의 보조원 관리시스템이 도입 돼서 병원에 많은 도움이 됐습니다.

별관 600병상 증설에 우리회사 남녀 보조원을 2~3백 명 더 증원해주세요.

초기에 적정 임금을 책정 못해 미안합니다. 이번 재계약에 인상 반영하겠습니다.

내년 재계약 때 협의내용을 꿈꿔본다.

지금 우리 90명이 합심하여 최선을 다 할 때 실현 불가능한 백일몽 만은 아닐 텐데.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