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부장님 말씀은 정애를 지정한 분이 회장님이 아니고 일행이신 김회장님이셨다는 거죠.”

“그렇대도. 김회장님이 지난번에 정애를 처음 보고 무척 마음에 들어 하셨대. 이번에도 라운딩 일정이 잡히자마자 정애가 캐디를 하도록 해달라고 간곡히 부탁하더래. 그래서 다른 골프장으로 안가고 이번에도 우리 골프장으로 오신거래.”

“이게 대체 무슨 일이죠.”

“나도 뭐가 뭔지 모르겠다. 최팀장, 이 일은 자네만 알아야하네. 마스터든 조장들이든 직원들 누구도 알아서는 안 돼.”

“그렇다면 다음에도 정애가 지정인가요.”

“그렇게 까지는 안하겠지. 김회장이 밖에서 정애와 따로 보든지 무슨 방법을 찾지 않겠어? 은밀하게 스폰서를 한다든지.”

“그 사람들이 밖에서 무슨 짓을 하든지 저는 우리 직원들이 불편할 일만 없으면 좋겠습니다.”

“그렇게 돼야지. 우리는 입단속이나 잘 하면 돼.”

“밖에서 알면 난리 나죠. 그런데 제가 보기에는 정애씨가 특별한 것이 별로 없어 보이는데요. 그렇게 빠지는 미모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특별하지는 않잖아요. 몸매나 뭐 그런 것도 그렇고 특별하게 일을 잘하는 것도 잘 모르겠던데요. 아무튼 잘 알겠습니다.”

“최팀장 말에 나도 공감이야. 그렇지만 개인 취향이라는 게 있으니 김회장님이 그러시는 것이겠지. 그리 알고 직원들 단속 잘해.”

밖으로 나온 최팀장은 마스터에게 어떻게 말해줘야 하나 고민이었다.

골프장이 숲과 나무가 어우러진 외곽에 있기 때문에 주변이 대체로 한적했다. 최팀장과 마스터는 그 중에서도 사람들의 왕래가 없는 으쓱한 곳에 차를 세워두고 밀회를 즐겼다. 비좁은 차 안이었지만 다양한 체위도 가능했다. 짙게 썬팅을 한 차 유리는 얼굴을 바짝 들이밀어도 자동차 안을 보기 어려웠다. 늘 늦은 시간에 일을 마쳤지만 회사에서 저녁식사까지 했기 때문에 시간도 그리 촉박하지 않은 장점이 있었다.

오늘도 두 사람은 최팀장의 차 안에서 허겁지겁 일은 벌였다. 집에서 배우자와 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만족감에 두 사람의 욕정은 활활 불이 붙었다.

“자기야. 본부장님한테 물어봤어?”

호흡이 잦아들기도 전 가쁜 숨을 내쉬며 그녀가 물었다.

“아, 그거. 회장님 지인이 지난번 라운딩 할 때 정애씨를 칭찬했나봐. 그래서 회장님이 한 번 더 부르신 거래. 다음부터는 그런 일이 없을 거라고 하셨어.”

최팀장이 부지런히 바지를 올리고 옷차림을 매만지면서 말했다. 마스터는 내려진 속옷을 올리고 치마만 정리하면 되었지만, 최팀장은 손이 더 바빴다.

“그럼 다행이고. 캐디들이 좀 말이 많아야지.”

뒷자리에 두었던 커피를 마시며 마스터는 무척 다행스럽게 생각했다.

“이제 집으로 가야지.”

이제 정말 하루 일과를 마친 듯 만족스러운 얼굴로 마스터가 최팀장에게 한 번 더 키스를 한 후 자신의 차로 돌아갔다.

“김회장! 지난번에 도우미 했던 캐디는 어떻게 된 거야.”

천회장은 자신에게 곤란한 일인 것을 충분히 알만한 그가 무엇 때문에 무리한 일을 요구했는지 내심 궁금했다.

“그날은 미안했소, 천회장. 내게 좀 사정이 있거든.”

김회장은 긴 이야기를 풀어 놓을 심산인지 차를 한 모금 마시고 뜸을 들였다.

“김회장이 새 첩이라도 들이고 싶은가보군.”

“그런 것이 아니래도. 우리처럼 레저업체를 운영하는 회사에 저승사자 같은 김차관 있잖아. 집안의 먼 조카벌인데 허심탄회한 자리에서 여자얘기를 꺼내더라고. ‘회장님, 저는 로망이 하나 있습니다. 명기를 한 번 품어보는 것입니다.’ 이러는 거야.”

“그게 우리 골프장 캐디랑 무슨 관계가 있다는 거야.”

“천회장은 그런 것에 별 관심이 없어서 잘 모르나본데, 나는 첫눈에 그 아이가 바로 명기인 것을 알아보았네.”
“정말인가? 뭐 별 특징이 없어보이던 아이였는데.”

“아니야. 내 눈은 정확해. 그래서 확인 차 한 번 더 부른 거였어.”

“그래서 그 애를 김차관에게 상납할 생각인가 보구먼.”

“내가 김치관에게 꼭 처리를 부탁할 일이 하나 있거든.”

“그럼 그 애하고 따로 자리를 만들어줄까?”

“아니야. 다음에 내가 김차관하고 당신 골프장에서 라운딩 할 테니 캐디 배정 순서를 잘 조정해서 그 애가 우리팀의 도우미 할 수 있도록 부탁할게. 김차관 제 눈으로 한 번 보도록 해줘야지. 그거면 돼.”

“그 정도야 직원들에게 짜보라면 될 일이지만. 나는 명기니 뭐 그런 걸 통 몰라.”

“모르는 것이 낫지. 우리 같은 노인네들이 그런 아이를 안았다가는 바로 복상사 당하게 되는 거야. 그렇게 허무하게 죽기에는 쌓아둔 재산이 아깝잖아.”

“허허. 당신은 참 아는 것도 많소. 맞는 말이야, 그건 개죽음이지. 일정이 촉박하지 않게 라운딩 할 날자나 미리 언질을 주셔.”

“여부가 있나. 그럼 꼭 부탁할게.”

“재들은 언제부터 저렇게 가까워진 거야.”

조장들이 현균과 연지가 붙어 다니자 눈치 빠르게 알아챘다.

“그냥 놔둬라. 몸이 많이 힘들 텐데 서로 의지 할 사람이라도 있으면 좀 좋냐.”

한창 젊음이 무르익은 그들이었다. 더구나 같은 일을 하다 보니 서로의 마음이 열릴 기회가 많았다. 고객들에게 진이 빠졌을 때, 캐디들은 가까이 있고 서로의 사정을 잘 이해해줄 수 있는 서로에게서 위로를 주고받았다.

“요즘 애들은 뜨겁게 만났다가 쿨 하게 헤어지더라.”

이직이 무척 심한 직업이었다. 때로는 같이 다른 골프장으로 떠나기도 하지만, 대개의 경우 각자 다른 골프장으로 이직을 하고, 그 경우 서로는 미련 없이 서로를 떠나보내곤 했다.

“잠을 잘 못잔 얼굴이다.”

몸을 섞지는 않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마음을 섞은 그들이었다. 몸을 태운 것보다 마음을 태운 것은 더 강력한 유대감을 서로에게 안겼다. 연지는 점점 웃음기와 생기를 잃어가는 현균이 걱정스러웠다.

“몸이 너무 피곤해서 그런지 요즘 숙면이 잘 안되네.”

“무지개를 찾아다닌다는 소년처럼 네가 너무 이상적인 현실을 바라는 건 아닌지 싶다. 우리 현실과 이상을 혼동하지 말자. 만화영화에 나오는 세상은 어디에도 없어. 어떤 동물도 먹이를 양보하거나 먹잇감을 보호하는 일이 없지. 그런데도 그 속에는 그런 장면들로 가득해. 나는 동화가 청소년의 성장 통을 일으킨다고 생각해. 어릴 때 보고 배운 세상과 성장하면서 본 세상이 극단적으로 다르니 혼란이 생기지. 만화영화 제작자들이나 동화 작가들은 반성해야 돼.”

사뭇 진지하게 말하는 그녀의 얼굴이 너무 몰입한 탓인지 홍조를 띄었다.

“너 참 예쁘다.”

느닷없는 그의 말에 그녀가 픽 웃었다.

“쓸데없이 참견 말고 입 닫으라는 건 아니겠지? 아니면 너무 정곡을 찔렀나.”

“맞아, 내가 현실을 이상과 혼동하나봐. 그런데도 나는 살면서 그것을 포기하지 못하겠어. 그 희망마저 버리면 무엇에 의지해서 세상을 살아.”

“그래서 사람들이 종교를 갖는 것 같아. 현실 세계에 희망이 없으니 사후 세계에 의지하려는 거지. 나는 그것이 참 어리석은 일이라고 생각해. 죽은 후의 세계를 위해 살아있는 시간을 허비하고 있잖아. 죽은 후의 세계가 있는지 없는지도 잘 모르면서.”

“너 오늘 무척 심오하다. 우리는 너무 이성적으로 사귀고 있는 거 아냐? 같이 자면서 섹스도 안하고, 대화는 이렇게 종교와 철학을 넘나들고.”

“몸은 소처럼 일하고 살지만 머릿속이라도 사람의 생각으로 살아야지. 다만, 너처럼 비관이 아닌 낙관으로.”

“나 비관 아니야. 낙관하고 싶어서 몸부림치는 거야.”

“그 몸부림이 너무 심해 보여서 내가 염려하는 거야. 다음에 우리 잘 때는 서로 육체를 탐하자. 네 이상을 현실로 깨트려 주고 싶어.”

“그러자. 뜨겁게 몸을 탐닉해서 내 이상을 박살내줘라.”

심각함으로 찌푸려져 있던 그의 얼굴이 모처럼 밝게 변했다. 그런 그가 대견하고 사랑스러운 듯 그녀는 현균의 등을 애정이 담뿍 담긴 손길로 토닥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