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둑일기157, 못난 바둑

부리나케 세수를 하고 저녁도 거른 채 전철을 탄다. 10:30 나이트 근무 시작 시간에 늦으면 안 되는데 평소보다 늦게 나선 것이다. 가다가 편의점에서 샌드위치라도 하나 살까? 생각한다. 아냐 내리는 역에 김밥과 떡을 파는 가게가 있으니 거길 들려봐야지 하나 이미 문을 닫았다.

나는 반성을 많이 해야 돼. 오늘은 근신하는 의미로 담배도 사질 말아야지. 아까 바둑 세 판을 두며 새로 뜯은 새 곽을 이미 거의 다 폈다. 아직도 얼굴이 화끈거리는 느낌이다.

사무실에 들어서며 조회일지를 확인하고 마침 야식을 일찍 먹는 직원이 있어 그 곁에 앉아 허겁지겁 야참을 먹는다. 늦지 않아 다행이군! 긴긴밤을 근무하려면 컨디션 조절을 잘 해야 하는데 컨디션이 엉망이다. 수술장, 중환자실, 임상병리과, 응급실을 모두 순찰하고 영상의학과의 중앙 정 위치에 잠깐 들른 후 으슥한 혈관조영 실 앞에 가 의자에 앉아 티브이에 눈길을 돌린다. 어제 일요일 밤 한시 너머인지 티브이에서 바둑 중계를 하길래 아직도 바둑티브이가 아닌 일반 방송에서도 중계를 하는 군 하고 놀라며 반갑게 바둑왕전의 최철한 박영훈 전을 관전했다. 반 집 승부일 것이라던 노영하9단의 해설과 달리 실리에만 치중하던 박은 결국 최의 예리한 물음에 대마가 몰사하며 무릎을 꿇는다.

티브이의 바둑중계에 영향을 받아 기원으로 발길이 향한 것일까? 괜스레 공연한 짓을 했지.

월요일 오후 기원:

얼굴이 벌개진 것이 나 자신도 느껴진다. 뜨거운 느낌이다.

황  사범에게 바둑을 진 것이 창피해서일까? 마지막 배팅으로 본전을 회복하려다 두 배로 잃은 자신이 부끄러운 것일까?

두 판을 연속 이겼어도 같은 편들이 져 두 번을 잃으며 그래도 두 번 다 1등을 하여 반 본전이다. 병원에 나이트 근무를 나아가야 할 시간이 다가와 일어서야 하는데 그래도 본전생각이 아쉬워 한 번 더 시작한다.

첫 판엔 박 사범을 20여 호 이겼으나 우리편이 둘 다 져 마무리를 짓지 않고 판을 거둔 채 1등 상금만 받았다. 그땐 같은 편이던 황이 20집 이상 이겼네 하며 빨리 마무리를 하고 새로 두자는 재촉을 옆에서 하여 밉상인 저 친구는 계가를 부탁을 한 것도 아닌데 옆에서 방정이군 싶었다.

둘째 판엔 황과 만나 18집을 이겼다. 원래 장고인데다 내기엔 더 신중하여 느린 진행으로 같은 편 둘이 이미 다 졌으니 1등은 맡아 놓았지만 황과의 기 싸움인 격이다. 행마와 사활은 무시한 채 실리를 챙긴 후 요리조리 조잡스럽게 연결만 도모하는 황 사범의 대마 세 개를 천천히 몰아간다. 옆에서 관전하던 왕갈비 가락골 강회장은 역시 삼성이야 하며 연신 혀를 내두른다. 황 사범의 처신과 매너는 반기는 이가 하나도 없어 공공의적이다. 유리한 국면을 사냥을 하듯 몰아가자 관전자 모두들 나보다 즐거운가 보다. 같은 편이 총 43집을 이겨 놓았으니 돈은 따놓은 당상이고 황은 단지 자신이 얼마나 타개를 잘 하는지 보이려는 여유를 오히려 보인다. 박 사범과 둘 때는 박에게 던지라고 하더니 저는 끝까지 붙들고 있는 것이 역시 공공의 적답다.

시간이 문제가 될 것 같은 불안 속에 시작한 셋째 판엔 또 황을 만났다. 8시엔 일어서 돌아가 준비를 하고 9시엔 집을 나서 병원으로 향해야 하는데 한 시간 남은 것은 내게는 적은 시간인데 시작부터 불안하다. 실리만 추구하며 상대를 무시하듯 두는 황 사범의 엉터리 바둑은 두텁게만 두어 나가면 이기는 것은 당근이고 때론 대마사냥도 가능하니 긴 호흡으로 참아나가자고 속으로 다짐한다.

초반 포석부터 자신의 곤마는 돌보지 않은 채 우하 화점에 높은 한칸 걸침으로 다가와 높은 한칸 협공으로 맞서 패가 난 것을 바꿔치기로 해소하여 우하에 세력과 대가를 만든다.

황은 하변에 갈라치기로 착점 한다. 이리 못 두는 바둑으로 남의 돈을 따 먹는데 혈안이 되 있으니 참 가당치 않은 인간이다. 시간만 충분하면 아작을 낼 텐데 시간은 벌써 8:40이다. 늦어도 9시엔 일어나야 하는데 걱정이다. 이번 주는 나이트 근무 책임자인데 지각을 하거나 쉬겠다고 하면 작은 흠집도 침소봉대하여 헛소문을 내기 일수인 병원에서 곤란하지 싶어 내심 전전긍긍이다. 황은 말도 없이 일어서더니 식당에서 배달 온 밥을 먹으러 간다. 아까 두 판을 같은 편 덕으로 모두 이겨 돈을 딴것으로 모처럼 저녁을 먹나 보다. 정말 매너는 똥이군.

잠은 저쪽 기원에서 깃들어 자면서도 낮엔 이곳에 와 있으니 저쪽 원장 속이 어떨까? 그래도 말 못하고 놔 두는 것은 그나마 바둑실력과 사범 호칭 때문이겠지. 누가 저 사람을 사범 시킨 것도 아니고 어디서 월급을 받는 것도 아닌데 황 사범이라고 칭하는 것은 회사운영을 안 해도 의례적으로 김사장 이사장 하듯이 바둑 둘 줄 아는 이라는 뜻일까?

인품이 저 정도면 바둑도 기량에 한계가 있을 텐데 그래도 사범 소리를 듣는 것을 보면 머리가 좋아서 일까? 그것도 아닌 건 틀림없는데 화투도 타짜가 있다듯이 재능과 인품은 없어도 그저 평생 열심히 남의 돈 따 먹으러 노력을 해 소성(작은 성취)을 이룬 것일까?

판 세가 불리하자 되지도 않는 흔들기로 좌변 내 대마 전체를 잡는 척 한다. 우변의 제 대마를 돌보지 않고 방치하던 것에 내 손길이 가자 일석이조의 타개를 찾는 것이겠지만 정말 불쾌하기 짝이 없는 바둑에 그 인물이다. 밥을 다 쳐먹고도 미안하단 말 한마디 없이 자리에 앉아 뒤로 기대 거들 먹 거린다. 정말 불쾌한 인물이군.

이번엔 2인 한 편으로 내 편의 인테리어 사장은 7집을 이미 이겼다. 지지만 않으면 되니 천천히만 가면 되는데 시간이 신경 쓰인다. 전체 사활을 넘보니 수읽기에 시간을 많이 투자해야 하는데 가야 할 시간이고 조금씩 양보를 하다 보니 이슬비에 옷이 젖는 형국이다. 계가가 정확한 같은 편은 곁에서 관전하며 그래도 이겼어 하며 조언을 한다.

계가를 하니 생각보다 더 졌다. 시간관계로 계가도 못하며 둔 것이다.

내 스스로의 느낌에도 얼굴이 벌겋고 뜨거우니 곁에서 보는 이들의 눈엔 얼마나 더 우습게 보일까? 이렇게 바둑 한 판에 연연하는 나 자신이 더 부끄러운 것일까?

도대체 바둑을 왜 두는 것일까?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