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공일이라 학교가 일찍 파하였다.
희철은 두만강 변으로 산보를 가기로 했다.
회령에 온지 여러 달이 지났지만 두만강에 놀러가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학교일이 바빠서 차일피일 미루다보니 벌써 다섯 달이 훌쩍 지나가버린 것이었다.

강변으로 가는 도중 기찻길을 만났다.
석탄을 가득 실은 기차가 남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기차가 너무 길어 한 참을 기다린 후에야 건널목을 건넜다.
아이들이 부르던 노래가 귓전을 맴돌았다.
‘원숭이 똥구멍은 빨개, 빨가면 사과, 사과는 맛있어, 맛있으면 바나나, 바나나는 길어, 길으면 기차, 기차는 빨라, 빠르면 비행기, 비행기는 높아, 높으면 백두산, 백두산 벋어내려 반도 삼천리 무궁화 이 강산에 역사 반만년 대대로 이에 사는 우리 삼천만 복 되도다 그 이름 대한이로세’

강변에 다가가자 산더미 같이 쌓인 목재들이 눈에 띠였다.
 뗏목을 만들어 하류로 떠내려 보낼 목재들이었다.
강변에는 수양버들들이 한 창 가지를 늘어뜨리고 초록의 봄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문득 고향 옥천의 시냇물이 생각났다.
금강으로 흘러가는 시냇가에도 봄이 되면 늘 상 버들가지들이 휘늘어진 가지들을 자랑하였었다.

희철은 소학교시절에 천재소리를 들었다.
책 보따리를 가지고 다니지 않았다.
책에 들어있는 모든 내용은 이미 희철의 머릿속에 들어있었다.
재능을 눈여겨 본 친척의 도움으로 희철은 한양에 가서 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였다.
학교를 다니는 동안에는 신문배달과 우유배달로 학비를 벌었다.

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는 무슨 일을 할 건지 고민에 잠겼다.
대학교에 진학하는 것은 가정형편상 무리였고 그냥 평범하게 취직하여 돈을 버는 것은 젊음이 허락하지 않았다.
머릿속에 조선독립군이 떠올랐다.
 “그래, 만주로 가서 독립군이 되자.”
독립군 생각만하여도 희철의 젊은 피는 들끓었다.

여비를 마련하여 만주로 향하였다.
그러나 만주에는 이미 조선독립군이 사라진지 오래였다.
일제의 압박으로 조선독립군의 잔존 세력들은 모두 중국의 내지로 자리를 옮긴 상태였다.
 중국으로 갈 형편이 못 되었던 희철은 두만강 변에 자리 잡은 회령에 정착했다.
소학교 교사로 취직하였다.

아이들과의 생활은 행복하였다.
자기가 가진 지식이 새록새록 아이들에게 전달되는 것이 참으로 대견하였다.
아이들은 눈을 빛내며 희철의 가르침을 따랐다.
험준한 산에 둘러싸인 회령이지만 고향의 옥천과 다를 바 없는 조선의 땅 이었다

일본이 항복하였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온 동네마다 꽹과리와 징과 북소리가 울려 퍼졌다.
사람들이 거리마다 쏟아져 나와 춤을 추었다.
희철이도 사람들과 같이 어울려 같이 춤을 추어대었다.
먹지 않아도 배가 불렀고 저절로 흥이 났다.

소련군이 진주하였다.
라디오에서 들었다.
남한엔 미군이 진주하고 이북엔 소련군이 진주한다고 하였다.
소련군들은 집집마다 다니며 재산을 살피었다.
값나가는 물건이 있으면 바로 압수하였다.
인민들은 사치하지 말고 소박하게 살아야한다는 주장이었다.
사치스런 물건은 위화감을 조장하니 모아서 전 인민을 위하여 써야한다고 하였다.
무표정한 소련군 보다 옆에서 따라다니는 인민군들이 더욱 더 설쳐대었다.
그들의 팔에는 고급 시계가 몇 개씩 채워져 있었다.

희철이는 어서 빨리 고향으로 돌아가야겠다고 생각하였다.
간단하게 짐을 꾸려서 남쪽으로 출발하였다.
검문검색이 심하여 기차나 버스는 탈 수가 없었다.
오직 두 발로 걸었다.
한 참을 걸어 청진에 도착하였다.
여기서 배를 타고 남쪽으로 간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나 그런 시도는 꿈속에서나 할 수 있는 일이었다.
오직 걸어서만 가야했다.
청진에서 생태 국으로 든든히 요기를 하고는 남으로 걸음을 재촉하였다.

시장에서 마른 명태 몇 두름을 샀다.
검문에 걸리면 장사꾼으로 변통하였다.
소련군과 인민군의 눈치가 살벌해지면 명태 몇 마리를 공짜로 주어서 위기를 모면하였다.
 마른 명태는 식사대용으로도 제격이었다.
보름 만에 원산까지 내려왔다.

원산에서는 길이 두 갈래로 갈라졌다.
해변을 따라 걷는 길과 내륙의 산간지방으로 가는 길이었다.
해변으로 가는 길이 걷기는 편하지만 검문이 심할 듯이 보였다.
내륙의 산길로 접어들었다.
길은 험하지만 경치가 참으로 볼만했다.
첩첩 산길을 홀로 걸었다.
도중에 멧돼지를 비롯한 많은 산 짐승을 만났지만 산 짐승은 무섭지가 않았다.
오직 인간이 무서울 뿐이었다.
왼쪽으로 고산준령이 보였다.
“저 산들을 따라가면 그 유명한 금강산에 이르게 되겠지? 일정이 바쁘지 않고 평화로워서 금강산 구경을 하고 가면 얼마나 좋을까?”
금강산 구경을 하지 못하고 그냥 지나치는 것이 너무나 아쉬웠다.
 “그래, 시절이 좋아지면 꼭 구경을 오겠다. 금강산아 기다려라.”

삼팔선이 가까워올수록 가슴이 떨렸다.
길거리마다 소련군과 인민군들의 검문이 심했다.
낮에는 수풀 속에 숨어 있다가 밤에만 발걸음을 재촉했다.
하루는 수풀 속에 숨어 있는데 낯선 소리가 들렸다.
소련군들이 숲을 뒤지는 모양이었다.
군인들은 점점 희철이가 숨어있는 곳까지 다가오고 있었다.
틀림없이 들키는 순간이었다.
그 때 왼쪽 숲에서 푸드덕 하고 꿩이 날아가는 소리가 들렸다.
소련군들은 부산하게 꿩을 쫒아 왼쪽 숲으로 뛰었다.

삼팔선을 넘어서며 안도의 한 숨을 내쉬었다.
이제는 자유였다.
넓고 큰길을 마음 놓고 걸어도 되었다.
옥천의 집에 도착했을 때는 회령에서 길을 떠난 지 두 달이 넘어있었다.
고향에서는 부모님과 동생들이 희철이를 반갑게 맞이하였다.
부모님께 큰절을 올리고는 동생들을 부둥켜안고 울음을 터뜨렸다.

고향에 와서는 앞으로 무슨 일을 할지 많은 고민을 하였다.
 다시 학교에 나가볼까도 생각해봤지만 급박하게 돌아가는 시세에 한가하게 아이들과 어울리는 것은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
무언가 더 치열한 모습으로 조국에 봉사하고 싶었다.
마침 경찰 모집 공고가 눈에 띠었다.
시험을 봐서 합격하였다.

경찰근무를 시작한지 얼마 후 휴무일에 사촌누나가 집에 찾아왔다.
“희철아, 갈데가 있다. 경찰정복을 입고 따라오너라.”
웬일인지 묻지도 않고 따라나섰다.
똑똑한 사촌누나의 말이라면 팥으로 메주를 쑨대도 믿을 만큼 신뢰감을 주는 누나였다.
누나의 소개로 건넌 마을에 사는 처자와 결혼을 하였다.
처음 맞선을 보는 자리에서 마음에 들지 않으면 어떡하나하고 고민했지만 다행이도 수수한 처자의 순진한 모습이 마음에 들었다.

행복한 몇 년이 지나갔다.
아내의 배가 남산만큼 부풀어 올랐다.
출근하여 서류정리를 하고 있을 때 긴급회의가 있다는 명령이 내렸다.
대규모 북한군이 탱크를 앞세우고 새벽에 삼팔선을 넘었다는 소식이었다.
즉시 비상근무가 시작되었다.
집에 갈 수도 없었다.
경찰서에서 먹고 자고 하였다.
인편을 통하여 필요한 옷가지를 집에서 가져왔다.
얼마 지나지 않아 경찰대가 모두 남으로 철수를 할 수 밖에 없게 되었다.
짧은 짬을 내어 집에 들렀다.
가족들이 희철과 같이 행동을 할 수는 없었다.
위급하면 산 넘어 골짜기 동네로 피신하라고 이르고는 희철은 가족과 헤어졌다.

경찰대는 때때로 전투를 하면서 부산까지 철수를 하였다.
부산에서는 치안유지에 투입되어 전시하의 도시의 질서를 바로잡았다.
온갖 범죄자들과 실랑이를 벌이고 가끔은 간첩들과 총격전도 벌였다.

인천상륙작전이 성공적으로 마무리되고 군군과 유엔군이 북으로 진격함에 따라 경찰대도 북으로 이동하였다.
희철이도 다시 옥천경찰서로 돌아왔다.
아내는 그 동안 해산을 하였다.
아들이었다.
꼼지락거리는 아들을 보면서 희철은 자기도 모르게 마음이 든든해지는 것을 느꼈다.
이듬해 봄 휴무일에 아내와 아들과 함께 옥천의 시냇가로 천렵을 갔다.
꼬물꼬물하던 아들은 어느새 살이 올라서 보송보송한 얼굴을 하고 희철을 보면 방그레 웃음을 짓고는 하였다.
버들가지가 바람에 휘날리었다.
하얀 백사장에는 물새들이 뛰어놀고 맑은 시냇물이 유유히 흘러갔다.

잠시 한가하던 경찰서가 다시 바빠졌다.
지리산에 은거하던 공비들이 산을 타고 북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공비들은 깊은 산에 머물면서 밤에는 민가에 내려와 식량을 강탈해갔다.
경찰들은 곳곳에 보루를 세우고 공비들을 막았다.

국군을 도와 경찰도 공비 색출에 나섰다.
하루 종일 산을 뒤지며 공비들의 흔적을 찾았다.
별다른 성과 없이 하루가 지나갔다.
국군과 경찰들은 작전을 마무리하고 흩어졌다.
희철도 후미진 산길을 따라 혼자서 집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 때 숲에서 인기척이 났다.
총을 겨누고 숲을 뒤졌다.
다리에 부상을 입은 인민군이 앉아있었다.
상위계급의 젊은 장교였다.
 “꼼짝 마라. 움직이면 쏜다.”
인민군은 손을 들었다.
“살려주시오. 회령에 처자식이 있소.”
회령이란 말에 희철의 가슴이 움찔했다.
 “저를 경찰에 넘기지 말고 국군에 넘겨주시오. 국군포로가 되고 싶소.”
인민군은 경찰들이 공비를 즉결처분한다는 소문을 어디선가 들었다고 하였다.
잘 못된 소문이었지만 희철은 공비를 끌고 경찰서보다 한참 멀리 떨어진 국군 헌병대에 인민군을 넘겼다.

며칠 후에 큰 사고가 터졌다.
공비들이 보루를 습격하여 경찰 네 명을 죽이고 한 명을 납치해갔다.
그 한 명의 경찰이 바로 희철이었다.
얼마 후 공비들에게서 통보가 왔다.
백미 두 가마를 주면 희철을 풀어준다는 제안이었다.
희철이네는 집에서 키우던 닭을 모두 팔고 집을 전당잡히어 쌀 두 가마를 마련하였다.
그러나 옥천경찰서에서는 공비들과는 절대 협상할 수 없다며 쌀을 못 갖다 주게 하였다.
희철이 아내가 울부짖으며 경찰서 앞마당에 널브려져서 뒹굴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희철이 아들은 마당에 앉아서 흙장난을 하였다.

희철이는 공비들의 제안이 먹힐 리가 없다고 체념하고 있었다.
공비들이 희철이의 눈을 수건으로 가리고 말뚝에 세웠다.
총을 장전하는 소리가 들렸다.
희철이의 눈에 시냇가에 늘어진 버들가지 밑에 누워서 방긋대던 아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동수야, 아프지 말고 무럭무럭 잘 자라 거라.”
공비 두목에게 청을 했다.
 “죽게 전에 노래 한마디만 부르게 해주시오.”
공비두목은 청을 들어주었다.
고요한 숲속에 노래 소리가 울려 퍼졌다.
“노들강변 백사장, 휘휘 늘어진 가지에다가 무정세월 한 허리를 칭칭 동여서 메여나 볼까....”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