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둑일기105, 밥 한 끼

평소 더위를 잘 느끼지 않던 내게도 요즘의 염천은 괴롭기 그지없다.

저녁이면 샤워를 한다. 필리핀에 있던 시절 하루 두 번을 샤워하던 외엔

항상 아침에만 한 번 샤워를 했었는데.

공항을 나서면서부터 훅 하고 습한 뜨거운 공기가 느껴지던 필리핀의 더위도 이곳 기원의 더위엔 무색할 것 같다.

그 흔한 에어컨디션 조차 없이 창문을 모두 열어놓고 조그만 선풍기 몇 대가 전부이다.

선풍기의 방향과 회전조절을 한 방향으로만 해놓은 염치없는 영감들의 손길을 가끔 제지한다. 자린고비 원장도 알긴 아는지 누가 방향을 제 쪽으로 고정해놓으면 바로 가서 돌려놓는다. 사람들 더운 것을 알긴 아는 게지.

바둑을 몇 판 두고 돌아오면 온몸은 땀투성이이다. 마치 한 낮의 뜨거운 태양 밑에서 테니스 시합을 막 마친 직후처럼.

매일같이 변함없이 오는 분당 박 사장이 지난 일주일여 안 오기에 5일 날 동백으로 이사를 가신다고 했는데 새집에 이사 뒤처리를 할 일이 많아서 그러나 싶다가 여름 휴가기간엔 미국 유학간 아들 보러 해마다 다녀오던 기억이나 멀리 가셨나 궁금했었다.

선풍기 앞에 서있던 박에게 반가이 악수를 청한다. 벌써 여러 해를 알고 지내지만 그러고 보니 악수를 한 일도 처음이다. 반갑게 손을 맞잡는 상대도 순간 어색하고 머쓱한 표정이 얼굴에 스치는 것을 보았다.

같이 둔 바둑이 몇 백 판도 넘을 텐데 수담이라면서 손 한번 안 잡아보았었군!

“이사 갔더니 새 아파트인데도 손댈게 끝이 없어서.”

모처럼 한번 편 바둑을 두자는 여러 사람의 청을 사양한 채 약속이 있다며 박은 돌아선다.

바둑 둘 시간도 안 되면서도 기원소식이 궁금해 들린 것이겠지.

참새가 방앗간을 그냥 못 지나치듯이.

회사 직원들 야유회를 갈 때도 본인은 토요일 늦은 오후까지 기원에 있다 합류한 후 두고 간 전화기를 찾으려 밤늦게 강원도에서 다시 기원으로 오던 그의 열성을 운전해주던 wife는 어떻게 여길지 궁금하다.

“술 안 먹고 쓸데없는 짓 안하니 wife는 바둑 두는 걸 좋아하지“

두산의 수입파트에서 일하다 자신의 의료기수입상을 차려 연간 몇 십억인지 판매를 한다는 그는 두세 개인지 회사는 오전에만 들리고 오후에는 기원에서 소일한다. 여직원들의 전화에 중요사항을 전화로 결정을 해주느라 바둑 두는 중간에 전화가 많다.

“외상주지 마.”

“물건주지 마.”

그의 바둑은 힘이 세고 세력 활용과 공격이 능하다. 하수를 잘 잡고 이기건 지건 크게 차이가 난다. 나와는 항시 이기건 지건 몇 집이니 별 재미가 없나보다. 실리를 착실히 닦으며 기다리다보면 그의 과수가 등장하고 응징하고 하다보면 보통 쉽게 이긴다. 하수에게는 무리수나 억지수가 통하겠지만 맞수들에게는 무리한 만큼 자신이 손해이겠지.

기원의 기우들끼리 생맥주 한 잔이나 삼겹살에 소주를 추렴해 먹거나 가끔 노래방까지 가는 경우도 자주는 아니어도 있게 되는데 그러고 보니 박 과는 한 번도 밖에서 어울린 일이 없다.

술을 안 한다지만 점심을 혼자 먹고 기원에 들어서는 그의 습관으로 보면 점심 한 끼라도 기원의 상주 객들과 한 번 청할듯한데 그런 적이 없다.

세상일에 피해를 주지도 않고 받기도 싫어하는 것인가 보군!

어렵게 사는 정이나 신은 오히려 다르다.

택시운전을 하며 기원에서 숙식해도 노상 남들에게 술을 사려하는 정, 보쌈집에서 오토바이 배달을 하면서도 밥 한 끼를 내려는 신, 어려운 이들이 의리가 있고 정을 느끼며 정말 어려운 일이 닥쳤을 때 마음의 도움이라도 마다하지 않겠지.

떠벌이 기원애칭 오락부장 젊은 김이 구치소에서 편지가 왔을 때 면회를 다녀온 이는 정 이었다지.

수담 속에 마음속 문까지 여는 것은 공연한 기대일까?

끝.

08.8.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