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둑일기 101~107이 나작에 누락되어 있어 2년만에 다시 올립니다.
양해 부탁드립니다.

작은 거인, 바둑일기104

타인을 묘사할 때 좋은 기억을 반가운 마음에 빨리 적어 놓은 후 금세 후회되는 경우도 있었다.

바로 다음날 지나치게 날이 선 외골수의 선입견이나 편향적인 정치색등 전혀 공감할 수 없는 그늘이 너무 큼을 느끼는 경우도 있었다.

반면 몇 번을 빨리 묘사를 하고 싶었어도 여러 이유로 미뤄지던 중에 저 분의 모습을 내가 아는 만큼만 본 만큼만 묘사했더라면 저분의 훌륭한 점 10가지 중에 두세 가지 밖에 소개하지 못했겠구나 싶으며 글쓰기가 늦은 점이 다행스러웠던 경우도 있다.

잠실롯데 동상 밑에서 만나기로 한 그분은 얼굴도 모른다.

어젯밤 늦게 전화로 동행이 무방하시다는 허락에 고속버스로 아침 일찍 혼자 고성으로 가려던 계획을 바꿔 배낭을 벤치위에 놓곤 신문을 보며 기다린다.

저 편에서 다가오는 3쿠션을 보며 속으로 놀란다. 아 저 친구는 안양인데 예까지 와서 같이 동행을 하기로 했나보군. 친구와 인사하는 그 분을 보며 아 저분이 태평역님이시구나! 알게 되며 같이 인사드리고 차에 동승한다.

먼 동해 바닷가로의 원행은 이른 아침의 산뜻함과 설레는 기분이지만 바둑인들 끼리의 동행도 새로운 즐거움이다.

화제는 당연 배팅과 대국실, 게시판의 이야기들인데 나도 잘 알고 오래 드나든 것 같은데도 두 분의 대화는 내가 몰랐던 많은 부분과 많은 기우들의 이야기이다.

배팅에 일가견이 있는 3쿠션, 동호회활동에 천안 울산등지까지 불원천리 다니셨다는 그분.

끝없는 이야기에 어느새 도착한 미시령 험준한 고개 밑의 황태국밥은 멀리 왔음을 실감케 한다.

고성모임에서도 표 안 나게 마치 그림자처럼 뒤에서만 움직이시는듯하던 그분.

슈퍼에서 일행의 먹거리들을 차로 나르는 때 어느 틈에 계산은 치러 놓으신 그분.

먼 전남에서 잠깐 하룻밤이라도 내외가 다녀가시겠다는 것을 한사코 말리셨지만 선비무도님 내외는 물론 다른 분들도 함께 자리를 같이하고 싶었겠지만 그 분을 뵈러 오신 것이 아닌가 싶다. 다른 일정으로 하루 먼저 출발한 그분은 먼 길을 오신 내외분을 못 보신 채 떠나셨다.

서울에서의 만찬 후 돌아갈 길이 멀어 바쁘면서도 굳이 그분에게 전화해 만나려는 내외에게 그 분은 시간과 장소를 일러 주신다. 가락시장 3시. 그곳에서 노상에서 반갑게 인사를 나눈 그분들은 헤어지며 나는 수서역까지 처와 차로 배웅한다.

며칠 후 방문한 수서 그분의 사무실 10층 창에서 가락시장 저편으로 건너보이는 곳의 내 사무실 쪽을 보며 멀지않음을 느끼며 진지한 대화와 오붓한 점심에 바둑인 임이 내심 다시 기쁘다.

한쪽 무릎을 꿇은 채 라면박스속의 다섯 개씩 포장된 비닐을 연신 뜯어 하나씩 그 분에게 건넨다. 백여 개의 라면은 금세 동이 난다. 라면 한 개와 돈 천 원씩을 받기위하여 이 염천에 황량한 가락시장까지 전철을 무료로 이용하여 오셨을 할머니 할아버지들.

나도 벌써 이 자리에 세 번째 왔지만 오늘에야 그 생각이 든다.

해외와 국내에서도 먼 곳만이 아닌 바로 내 사무실 앞 이곳 가락시장에서 노인들을 위한 의료봉사를 할 수 있는 것인데 등에 업은 애기를 찾는다더니 먼 곳에서만 찾았군 싶다.

멘토(스승)가 필요한 세상에서 내가 멘토의 역할만 하여야 하는 것으로 오산을 했었던 나의 멘토가 되어버린 그 분의 깊이가 새삼 다시 느껴진다. 작은거인.

08.8.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