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을 가장 편안하게 하는 것을 떠올린다면 역시 어머님 일 것이다

그다음은 사람에 따라 환경에 따라 다르겠지만

아마도 고향의 들판과 시냇가 마을 입구의 느티나무

그리고 평상에 앉아 바라보는 동산에 걸린 둥근 달.

하지만 오늘 문득 나를 편안하게 하고 설레게 하는 것이 있었다.

일상에서 무심코 받아들었던 삶은 계란이 그것이다

삶은 계란.

오늘 아침에 우렁각시가 떼어먹고 내미는 삶은 계란 반쪽을 바라보며

문득 떠오른 색 바랜 추억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간다.

노랑병아리 때 친구들 손잡고 소풍 가던 길. 조금 더 컸을 때 까지도 그랬고

어른이 되어서도 여전히 마음 설레게 한다.

코스모스 길을 손에 손을 잡고 재잘거리며 걸을 때 무지막지한 버스가

황토 먼지를 뒤집어 씌워도 즐거웠고

교련복에 벨트와 수통에 깃발을 들고 제법 어른스럽게 걷던 길도 떠오르고

칙칙폭폭 증기기관차 타고 창밖의 전원 풍경을 바라보며 창틀에 수북이

껍질을 쌓아가며 노닥거리든 정담들에 통기타의 추억도 떠오른다.

그때의 배낭에는 김밥과 함께 언제나 한자리를 꿰차고 우리의 허기를 돋웠다

아직까지도 나에게 삶은 계란은 여행을 떠올린다.

어려웠던 시절이라 특별하지 않으면 요즘처럼 간식으로 먹는다는 건 상상조차

하기 힘든 시절에서 풍요속의 빈곤이라 더 어려워진 현실에까지 추억과 허기를

때워주는 하얀 속살이 더 없이 정겹다.

우리는 변해가도 변하지 않기를 바라는 것이 너무나 많다

부모님이 더 이상 늙지 않았으면 허리가 더 굽지 않았으면 하고 바라고

고향이 변하지 않고 가끔씩 가는 나를 옛 모습으로 기다려 주기를 바라고

정겨운 사람들이 내 곁에서 늘 머물러 주기를 바라고

즐겨 찾는 오솔길 옆 실개천이 항상 그렇게 맑게 흘렀으면 하고 바라고

그리고....

뒷동산에 뜨는 둥근달이 아파트에 가리지 않기를 바라고...

반쪽 받아든 삶은 계란으로 이렇듯 많은 추억들과 바램들이 떠오른다.

나는 누구에게 어떤 그리움을 남기고 살았는가.

내가 잊고 있는 그 누군가도 나를 삶은 계란처럼 추억해 주련가.

하얀 속살을 지그시 깨물면 부드러운 느낌 끝으로 다가오는

노오란 고소함

오감을 자극하여 끌어올린 입안 가득한 침으로 반죽을 하여

세상 시련에 시달리며 흘리다 마른 땀방울에 살짝 찍어 넘기면

짠맛이 오히려 달콤하게 버무려지는 행복 그리고 그리움.

그런 추억으로 나를 삶은 계란처럼 기억해주는 이 있을까.

인생이 덧없음을 깨달아가면서 차라리 부화하지 않고

그렇게 삶은 계란으로 남았어도 많은 이에게 추억과 허기를 메워주는데

고통의 시간을 비집고 또다시 더 큰 고통의 시간을 위해 부화 했었던가

제대로 부화는 한 것인가.

차라리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삶은 계란이 될 것을 그랬다

부드러운 속살이 지금은 세파에 찌들어 삐죽삐죽 가시가 생기고 거기다가

흉하고 거추장스런 털에 질겨진 몸

무엇보다 표독스런 성깔이 사랑하는 이의 식욕을 잃어버리게 만든다.

고슴도치로 부화된 내가 미워진다.

갑자기 그리움들이 밀려온다.

추운 겨울날 간이역처럼 기다리는 따끈한 꼬치와 국물도 있고

수다쟁이들의 마른 입술을 매콤 달콤 버무리는 떡볶이도 있고

다정한 연인들의 애정 나눔의 소품 다슬기와 번데기도 있다

하지만 나는 내 나이와 정서에 품위마저 적당한 삶은 계란이 될 것이다.

부끄러운 속살을 얇은 갑옷으로 가리고 베낭 약간 구석진곳에

성가시지 않게 앵기어 허기진 임의 손길을 기다리는.

반쪽을 베어 먹고도 의심 없이 사랑하는 이에게 건네지는.

내사랑하는 사람에게 애정을 받고 그 누군가에게 추억이 되는

그런 삶은 계란이 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