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삼은 두레박으로 물을 길어 올렸다. 세숫대야에 한가득 물을 부은 동삼이 얼굴을 씻고 또 씻었다. 무겁고 무거운 철갑을 벗어 던진 것처럼 마음이 개운했다.

대마를 잡았다고 계가를 소홀히 한 정명운의 잘못도 분명 있었지만 동삼은 끝내기로 접어들며 극미한 판세를 정확히 읽어 냈다. 사실 동삼은 대마의 사활이 결정 지어졌을 때 투석을 하려고 생각했다. 바로 돌을 던지지 못한 이유는 돌을 거두기에는 대마가 죽기 전까지의 형세가 자신에게 너무 좋았다.

동삼은 혹시라도 있을지 모를 승부처를 찾아 판 위를 훑어보았다. 몇 군데 눈에 들어오는 곳이 있었으나 도저히 승부를 뒤집을 정도로 커 보이지는 않았다.

이 난국을 타개할 방법이 전혀 없단 말인가.

온몸의 힘이 빠진 동삼은 멍하니 바둑판을 바라보았다. 아무 생각 없이 수읽기도 포기한 채 그저 반상만 바라보았다. 그 순간, 갑자기 바둑판이 동삼의 눈에 확 빨려 들어왔다. 이제까지 망망한 바다 한가운데 서 있던 자신이 갑자기 저 높은 곳에 올라가기나 한 듯 한눈에 바다를 내려다보는 것처럼 전 국면이 일목요연하게 눈에 들어왔다.

상황은 간단했다. 흑의 두터움. 집으로 계산되지 않는 두터움의 위력이 충분히 살아 있는 바둑이었다. 대마 사활을 미끼로 외부에서 두세 수만 죄어 주어도 두터움의 위력이 십분 발휘될 바둑이었다. 그리고 그 두터움은 끝내기에 접어들면서 더욱더 가공할 위력을 보여 주었다.

동삼의 머리가 투명하게 맑아 오기 시작했다. 수년 간 고통스럽게 매달려 온 형세 판단의 화두가 일시에 풀리는 것 같았다.

「한 판의 바둑에서 승부의 기회는 한 번 아니면 두 번이다. 그 때 판을 결정 짓지 못하면 승부사가 될 수 없다. 판을 결정하는 힘은 수읽기와 형세 판단이다.」

술 취한 아버지의 모습이 다가왔다.

「승부사는 결코 감각에 의존해선 안 된다. 함부로 승부를 포기해선 더욱 안 된다.」

아버지의 음성이 폭죽처럼 머리 속에 울려 퍼졌고 물로 씻어 낸 듯 눈앞이 환해졌다.

그렇다. 아버지는 바둑에 있어 가장 중요한 형세 판단의 묘(妙)를 가르쳐 준 것이다.

그 동안 나는 얼마나 어리석었던가. 그저 수박 겉핥기 식으로 눈앞에 드러난 현상으로만 형세 판단을 하고 그것이 최선이라는 우(愚)를 또 얼마나 범해 왔던가…….

용솟음치는 희열을 억누르며 바둑을 두었다. 정명운의 손끝에 실린 짜증스러움이 차츰 노골적으로 변해 갔고 아무도 의식하지 못한 사이에 승부는 점차 동삼 쪽으로 기울어졌다.

마지막 반 집 패를 이으며 동삼은 한 집 승리를 확신했었다.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스르륵 방문이 열린다. 방문 밖엔 박 화백이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어린 사미승이 서 있다. 사미승의 조그만 손에는 함지박이 들려 있었고 함지박 안에는 감자가 들어 있었다. 막 쪄 내온 감자에서 모락모락 김이 났다.

사미승은 조심스럽게 함지박을 방 안으로 밀어 넣고 돌아갔다. 박 화백이 감자를 하나 끄집어내며 해봉처사에게 물었다.

「그렇다면 그때 추동삼씨가 어떤 경계를 넘어섰다는 말씀입니까?」

「글쎄…….」

박 화백이 감자를 건네자 해봉처사는 별로 식욕이 당기지 않는지 손을 내저었다.

「그럴 수도 있겠지. 아마 그 순간 돌 하나의 깨달음은 얻었을 것이네.」

「…….」

「아마 세인들은 상상도 못할 것이네. 입신의 경지에 도달하기 위해 넘어야 할 그 숱한 깨달음의 경계를.」

「깨달음을 얻기까지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해봉처사가 빙그레 웃는다.

「그걸 어찌 말로 표현할 수 있겠나.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깨달음을 지키는 것이지. 각자(覺者)가 가장 경계해야 할 것은 다름 아닌 마음속에 일어나는 마(魔)일세.」

열어젖힌 들창 밖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맵다. 박 화백은 몸을 움츠린다.

「어느 깊은 산 속 암자에서 홀로 불도와 싸우며 용맹정진하는 스님이 한 분 계셨네. 어느 눈 오는 날 『유마경(維摩經)』과 씨름하고 있는 스님의 귀에 한 여인네의 목소리가 들렸지. 밖을 나가 보니 암자 밖에 한 여인이 쓰러져 있었는데 기식이 엄엄하여 곧 숨이 끊어질 것만 같았네. 스님은 급히 그 여인을 데려와 아랫목에 눕히고 정성을 들였지. 애쓴 보람이 있었는지 새파랗게 얼어 있던 여인의 숨결이 고르게 되고 얼굴엔 화색이 돌기 시작했네. 그제서야 여인의 얼굴이 스님의 눈에 들어왔는데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천하의 절색이라. 일이 되려고 그랬는지 풀어 헤쳐진 여인의 풍만한 가슴까지 눈을 찌르고 들어왔네. 20년 수도는 물거품이 되고 참을 수 없는 욕망에 눈이 뒤집힌 스님은 여인을 덮쳤네.」

박 화백은 다 깐 감자를 입에 넣는 것도 잊고 해봉처사의 말에 귀를 기울인다.

「막 결정적인 순간이 다가왔을 때 여인이 감았던 눈을 번쩍 떴네. 한 점 티 없이 순수한 눈망울이었네. 여인의 눈을 본 스님은 벼락처럼 몸을 떨었지. 유마경 경전의 글들이 올올이 살아서 감로수와 같이 스님의 몸을 적셨어. 그러자 생각뿐이었는데도 스님의 몸은 법당에 앉아 있었고 눈을 들어 앞을 보니 그 여인은 어느새 관세음보살로 화해 빙그레 미소 짓고 계셨네. 또다시 한 생각을 돌리자 스님은 북망산 꼭대기에서 안쓰러운 눈으로 대중을 바라보고 있었네. 스님은 시공을 초월한 무위자재(無爲自在)의 대각을 얻은 것이지. 스님은 그 길로 저잣거리에 내려와서 자신이 깨친 바를 대중들에게 설파하기 시작했네. 몇 년 후 그 스님이 어떻게 되었는 줄 아는가?」

「…….」

「그 스님은 무위자재의 경지를 잃어버리고 평범한 범승으로 돌아갔다네. 속세로 나온 스님은 스스로 걸림이 없다고 술 먹고 고기 먹고…… 계율에서 벗어난 스님은 그 벗어남으로 인해 오히려 계율의 그물에 다시 갇혀 버린 것일세…… 득도란 것은 그냥 득도일 뿐이지 득도를 하기 전과 차이를 두려 하면 그건 이미 득도가 아닐세.」

만질 수도 느낄 수도 없는 기묘한 감동이 박 화백의 가슴 깊은 곳에서 조금씩 치밀어 올라온다.

그 일이 있고 난 지 열흘이 지났다.

후덥지근한 여름날 오후였다. 설숙 스승은 평소 친분이 있는 영남 유림(儒林)의 거봉이자 퇴계(退溪)의 후손인 영암(影庵)선생의 타계 소식을 듣고 문상차 이틀째 도장을 비웠다. 스승이 없는 도장은 한가했다.

동삼은 뒤뜰에 있는 우물가 근처 밤나무 밑으로 갔다. 바람 한 점 없는 무더위였지만 탁 트인 곳이라 답답한 방 안보다는 한결 시원했다.

나무 그늘에 앉아 전대 명인들의 바둑을 복기하며 동삼은 점차 더위를 잊어 갔다.

어디선가 푸드득 하는 물소리가 들려 왔다. 명운이 우물가에서 세수를 하고 있었다. 동삼은 하던 복기를 계속했다. 물소리가 그치고 동삼 앞으로 명운이 다가왔다.

「기보대로 놓아 보면 다 알 것 같지?」

명운이 동삼을 비꼰다. 동삼은 개의치 않고 꾸준히 복기에 열중한다.

「이봐, 동삼. 너의 아버지도 바둑 두는 사람이었지.」

「…….」

「그런데 떠돌아다니는 비렁뱅이 바둑꾼이었다면서.」

동삼이 주먹을 불끈 쥔다.

「그리고 네 엄마는 장안에서 날리던 기생이었다는데. 어떻게 기생이 네 아버지 같은 비렁뱅이…….」

순간 동삼은 떡갈나무로 만든 돌통을 들어 명운의 얼굴에 던졌다. 명운은 비명을 지르며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창졸간의 일이었다. 돌들이 사방으로 흩어지고 얼굴을 감싸고 주저앉는 명운의 손바닥 밑으로 피가 흘러 내렸다.

명운의 비명소리에 우루루 동문들이 나타났다. 동삼은 핏기 하나 없이 돌처럼 서 있고 명운은 주저앉은 채 이마에 피를 흘리며 동삼을 노려보고 있었다.

최해수가 명운을 부축해 일으켜 세운다. 명운이 일어나며 동삼을 향해 욕을 한다.

「이 천한 종놈의 자식아! 네깟놈 주제에…… 감히…… 감히…….」

최해수가 명운의 입을 틀어막으며 명운을 끌고 황급히 안채로 사라진다. 원생들이 모두 그 뒤를 따라간다.

헛간 안은 어두웠다. 헛간 한켠에 붙어 있는 작은 들창에서 손바닥만한 빛이 스며들어 겨우 지척을 분간할 수 있을 뿐이었다. 동삼은 어둠 속에서 쪼그리고 앉아 있었다.

종놈의 자식이라고 명운이 악 쓰는 소리가 귓가에 쟁쟁하다. 화살처럼 가슴 한가운데에 내리꽂히던 그 소리. 종놈의 자식…….

아버지와 같이 처음 이곳에 온 날 사모(師母)는 꼿꼿이 선 채 아버지의 공손한 인사를 받았다. 눈부신 청잣빛 갑사 치마 저고리를 입은 사모는 얼음처럼 차가웠다. 아버지가 허리를 숙여 인사를 드리자 아랫사람 보듯이 고개만 까닥하고 사모는 아버지 앞을 지나쳤다.

간혹 그 기억이 떠오를 때마다 석연찮은 점이 있었지만 원래 도도하고 쌀쌀맞은 사모의 성격 탓이려니 생각했었다. 그런데 그 이유가…….

법고 스님 밑에 있을 때 처음 아버지를 보았다. 아궁이에 불을 지피고 있을 때 웬 사람이 멀리서 다가왔다. 그 사람은 관골이 툭 불거진 얼굴에 몸이 수척해 보였다. 똑바로 자신을 겨냥하듯 다가오는 그 사람을 보면서 무언가 표현하기 어려운 막연한 느낌으로 가슴이 두근거렸다.

다가올수록 보통 향화객과는 확연히 다른 그 사람의 어둡고 쓸쓸한 분위기에 이유도 없이 울적했다. 무어라 말할 수 없는 아버지의 그 독특한, 가슴에 사무치는 황량한 냄새는 노비의 냄새였던가…….

며칠씩 수염을 깎지 않아 꺼칠꺼칠했던 아버지의 얼굴, 다른 사람들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었던 우울하고 그늘진 눈, 어쩌다가 한 번 손을 잡아 줄 때마다 받았던 메마른 느낌…… 아버지의 굵게 마디 진 손은 노비의 손이었다.

막연하고 아득하기만 했던, 꿈에도 자신과 연관시켜 본 적이 없던 노비라는 어휘의 비루한 느낌이 그제서야 확실하게 다가왔다. 천대받던 노비의 피가 자신의 몸 속에도 흐르고 있었다. 한으로 얼룩진 노비의 삶이 자신의 가슴에 깊게 새겨지고 있었다. 동삼은 어둠 속에서 오랫동안 움직일 줄 몰랐다.

며칠 후.

송곳 같은 장대비가 퍼붓던 이른 새벽, 동삼은 모두가 잠든 시각에 도장을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