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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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말[67회] 13부 떨어지는 큰 별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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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사는 여목의 죽음 이후 화정의 살림집에서 하루하루 세월만 보냈다. 화정이 일을 가고 나면 하루 종일 집에서 정원의 나무들을 바라보며 무료함을 달랬고, 화정이 일을 마치고 돌아오면 다시 술과 애욕의 밤을 지샜다. 남의 눈에는 평사의 삶이 한갓 한 여자의 기둥서방에 지나지 않았으나 평사에겐 난생 처음 가져 보는 안락한 시간들이었다. 그렇게 반 년이 지났을 무렵 정 역관이 평사를 찾아왔다. 「여자 치마폭에 싸여 세월 가는 줄 모르시는구만.」 정 역관이 평사를 비꼬며 마루에 걸터앉는다. 「어쩐 일이십니까?」 「자네가 보고 싶어 왔네.」 정 역관이 데리고 온 짐꾼들이 쌀 가마니와 생선 꾸러미를 바닥에 내려놓는다. 정 역관은 궐련을 꺼내 입에 물고 불을 당긴다. 「자네, 여기서 이렇게 세월만 보낼 작정인가?」 「…….」 「이렇게 덧없이 세월만 보낼 게 아니라, 나하고 일본에 한번 가보지 않겠나?」 「일본이라 하셨소?」 「그렇다네.」 평사가 고개를 들어 정원을 내다본다. 정원에는 어느새 하얀 백목련이 활짝 피어 있다. 「여목 선생도 가셨고, 이제 경성은 잊어버리게.」 정 역관이 은근히 평사를 달랜다. 「자네의 재주가 이런 곳에서 그냥 썩기에는 너무 아깝네. 알다시피 일본은 지금 전국이 바둑의 열기로 뜨겁지 않은가. 그곳에 가면 뛰어난 기사들도 많을 것이고, 그리고 내기바둑도 성행하고 있으니……. 누가 아는가, 운이 좋으면 일본에서 전문기사로 생활할 수 있을지.」 당시 일본은 전 국토가 바둑으로 인한 열병을 앓고 있었다. 1924년 춘추전국시대를 방불케 했던 일본의 기계는 재계의 거인인 오쿠라 시치로(大倉喜七郞)의 주도하에 동경에 일본기원(日本碁院)을 창설함으로써 기계(碁界)가 하나로 통일되어 군웅할거 시대는 막을 내리는가 했었다. 그러나 며칠 후 가리가네(雁金) 7단을 필두로 다섯 명의 전문기사가 일본기원을 탈퇴하여 단독으로 기정사(碁正社)를 설립했다. 가뜩이나 바둑 열기로 뜨겁던 일본이 그 사건으로 인해 의론이 분분했다. 일본기원은 곧 기정사를 제명했다. 1926년 요미우리 신문이 일본기원에 대한 기정사의 도전기를 신문에 게재했다. 전 일본의 기대와 관심 속에서 일본기원과 기정사의 대결이 벌어졌는데 그 첫판이 불패의 명인 슈사이(秀哉)와 가리가네의 대국으로서 슈사이가 장장 20일 만에 중반에 접어들어 묘수를 냄으로써 낙승했는데, 슈사이 명인 불후의 명국으로 유명했다. 어쨌거나 슈사이와 가리가네의 기보 및 해설을 연재한 결과로 요미우리 신문사는 자신들 신문의 판매 부수를 단번에 세 배나 증폭시키는 엄청난 성과를 올렸다. 그만큼 일본 바둑의 열기는 대단했다. 정 역관이 몸을 일으켰다. 「잘 생각해 보게.」 대문을 열고 나가다가 그가 한마디 덧붙인다. 「승부사가 승부를 떠나면 그건 죽은 목숨일세.」 자시가 지나서 화정이 돌아왔다. 화정은 술상을 차려 평사와 마주 앉는다. 술을 한 잔 따르고 화정이 평사에게 말했다. 「주(周)나라 태공망(太公望)께서 빈 낚싯줄을 강가에 드리우고 세월을 낚아 보려 했던 이유를 아십니까?」 「…….」 「서방님이 여기 오신 지 벌써 여러 달이 지났습니다.」 평사는 묵묵히 듣고만 있다. 「아녀자는 아녀자의 길이 있고 장부가 나아가야 할 길은 따로 있습니다. 설마 하니 그것을 모를 서방님은 아니실 테지요.」 긴 세월은 아니지만 평사는 화정과 같이 지내면서 그녀가 매우 현명하고 강한 여자라는 것을 자주 느꼈다. 뒤틀린 자신을 상대하면서도 화정은 한 번도 자신의 마음을 상하게 하는 일이 없었으며 행동거지에 있어서도 결코 흐트러진 모습을 보인 적이 없었다. 화정이 평사의 잔에 다시 술을 채운다. 화정의 긴 손가락이 유난스레 어여쁘다. 「정 역관께서 오늘 술청엘 다녀갔습니다.」 평사는 화정의 뜻을 이미 짐작하고 있었다. 화정의 성격으로 보아 더 이상 이 집에 머무를 수도 없을 것이었다. 언젠가 이런 날이 오리라는 것을 평사는 예상했었다. 평사는 술을 마신다. 여자와 보낸 지난날들이 평사의 머리 속을 어지럽힌다. 여자의 얼굴이 흐릿해지고 흐릿한 얼굴이 속절없이 멀어진다. 여자가 일어나서 나간다. 어두운 정원에는 달빛이 내려 꽃들이 화사하다. 막 꽃망울을 터뜨린 도화(桃花)처럼 붉은 여자의 모습이 곱다. 그 고운 여자의 얼굴 위로 눈물이 흘러 눈물은 무심히 핀 꽃망울 위로 툭 떨어진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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