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력거에서 내린 숙향은 지난해부터 자신이 맡아 경영해 오는 동명관(東明館)을 새삼스런 눈길로 바라봤다. 우연한 기회에 자신의 소리에 반한 한 갑부와 연을 맺은 후 동명관을 인수하여 스스로 관리해 오고 있었다. 주인이 따로 있다지만 그 사람은 한 달에 두어 번 이곳에 들러 술과 소리를 즐길 뿐 일체의 간섭이 없었고, 사실상 동명관은 숙향의 것이나 진배없었다.

흐뭇하게 동명관을 바라보던 숙향은 들어가려다 말고 걸음을 멈추었다. 어둑어둑해진 길가 골목 한 귀퉁이에 초라한 몰골의 소년이 눈에 띄었다. 소년은 자신을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어딘지 모르게 소년의 얼굴이 낯이 익었다. 숙향은 잠시 망설이다가 소년을 불렀다.

「얘, 너 이리 와 봐.」

소년이 느릿느릿 숙향 앞으로 다가왔다. 가까이 다가올수록 소년의 얼굴이 어슴프레 되살아났다. 소년은 동삼이었다.

「너 동삼이 아니냐! 아니, 네가 웬일이냐!」

숙향이 덥석 동삼의 손부터 잡는다. 동삼의 손은 차갑게 굳어 있었다.

「우선 들어가자. 꼴이 이게 뭐람! 어쩌다 이리 됐누!」

혀를 끌끌 차며 숙향은 동삼을 거의 감싸안다시피 해서 동명관으로 들어간다. 대문 안으로 들어서자 잘 꾸민 넓은 정원이 나타났다. 손길이 많이 간 정원엔 향나무 몇 그루를 제외하고 가지만 앙상한 나무들뿐이었다.

동삼은 어릴 적 가끔 어머니를 따라왔다가 뛰놀곤 하던 그 정원이 어렴풋이 기억이 났다.

「얘야, 옥화야!」

숙향이 소리를 지르자 어디선가 분홍색 치마 저고리를 입은 기생 하나가 달려 나왔다.

옥화는 남루한 옷차림의 동삼을 보고 걸음을 멈추었다.

「가서 목욕물 좀 데워라. 몸을 씻을 수 있게 돌봐 드리고.」

옥화는 거지꼴의 동삼을 아래위로 훑어본다.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사람을 목욕 시키라는 것도 이상하거니와 돌봐 드려라 하는 말투가 어째 상전을 뫼시라는 소리처럼 들린다. 아닌 밤중에 홍두깨 같은 숙향의 분부에 옥화는 쉽게 다가서지 못한다.

「무얼 하는 게냐!」

숙향이 호통을 친다. 숙향의 불 같은 성미를 익히 아는지라 옥화는 마지못해 동삼을 뒤채에 따로 마련된 욕실로 안내한다.

목욕을 마치고 옥화가 가지고 온 옷으로 갈아입은 동삼의 외양은 그런 대로 반듯했다. 야위긴 했지만 땟물이 쭉 빠지고 본래의 신색을 회복하고 보니 욕탕에 들어갈 때에 비해 용모가 단정했다. 옥화는 눈을 가느스름하게 뜨고 동삼을 바라본다.

동삼이 갈아입은 옷은 옥화가 이복 동생을 주려고 설빔으로 마련해 둔 것이었다. 그 이복 동생은 옷을 입어 보지 못한 채 지난해 겨울 학병으로 끌려갔다.

「어서 가시오. 어머니께서 기다리겠소.」

옥화가 앞서 걷는다.

기름을 먹여 윤이 반질반질한 긴 회랑에 들어서자 옥화가 동삼에게 묻는다.

「어머니하곤 어떤 사이요?」

동삼은 아무 대답이 없다. 옥화의 입이 조금 튀어나온다.

「입이 붙었소?」

옥화가 괜히 화를 낸다. 옥화는 긴 회랑을 쿵쿵 울리며 걷는다.

회랑 끝에 있는 내실 앞에서 옥화가 숙향에게 고한다.

「어머니, 데려왔습니다.」

옥화가 조심스럽게 여닫이 문을 연다. 숙향은 비단 보료 위에 앉아 있었다. 청동 화로에는 발갛게 숯이 타 들어가고 삼발이 위에 걸쳐 놓은 놋쇠 주전자에서 물 끓는 소리가 요란하다.

숙향은 동삼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오똑 선 코하며 반듯한 턱이 보면 볼수록 화정을 쏙 빼닮았다.

화정은 품위 있는 요조숙녀였다. 비록 기생이었지만 그녀의 품행은 방정했고 그 어떤 여자보다 기품이 있었다. 화정은 언제나 가슴 한곳에 추평사라는 사람을 안고 살았다. 추평사가 일본으로 떠난 뒤 소식 한 줄 없어도 화정은 끝없이 평사를 기다렸다.

동삼이 여섯 살 때 경성에 호열자가 돌았다. 방역 당국이 재빨리 대처하여 일찍 가라앉긴 했으나 운 나쁘게도 동삼이 호열자를 앓게 되었다. 방역 당국에 알리면 격리 수용할 뿐 치료는 신경을 쓰지 않아서 대부분이 시체로, 그것도 화장한 뼛가루로 돌아왔다.
애를 살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많은 돈을 들여 사설병원에 입원시키는 수밖에 없었다. 생활이 넉넉찮았던 화정으로선 동삼의 간병은 힘에 부치는 일이었다.

화정은 아이를 살리기 위해 밤낮으로 쫓아다녔다.

한번은 한밤중에 화정이 동명관으로 자신을 찾아왔다. 참빗으로 꼭꼭 다져 땋아 올린 쪽진 머리와 물색 깨끼적삼은 평소같이 단정했지만 어딘가 옷 한쪽 모서리가 허물어져 있었다.

「언니. 나 술 한잔 주시오.」

「전주가 있는 모양인데…….」

「안 줄 거면 가겠소.」

화정은 주저 없이 일어났다. 당황한 숙향이 화정을 잡았다.

술상이 들어오고 숙향이 따라 준 술을 반 잔쯤 마신 화정이 술잔을 내려놓으며 자신을 빤히 쳐다본다. 보면 볼수록 고운 눈매다. 이유도 없이 숙향의 가슴이 저릿하다.

「밤늦게 웬일이냐?」

「언니가 보고 싶어 왔소.」

「오래 살고 볼 일이군.」

화정은 웃었다.

「미안해요 언니.」

화정은 잔의 술을 마저 마셨다.

「나, 가겠소.」

화정이 일어났다.

「벌써 가려고?」

「얼굴 봤으니 됐소.」

화정은 늦은 밤에 집으로 돌아갔다.

며칠 후 화정은 재가를 했다.

그런 시절이 있었다. 통곡이랄까, 비애랄까, 그런 것을 쓸어안고 벙어리처럼 웃기만 하던 시절이 있었다.

당시의 내가 지금의 반만 됐더라도…….

숙향이 동삼에게 손을 내민다.

「이리 가까이 오너라.」

동삼의 손을 숙향이 꼭 붙든다. 숙향은 법고 스님을 통해서 평사의 죽음을 알고 있었다. 얼마 전 법고는 동삼을 찾으러 동명관에 들렀다.

「오나 가나 그놈의 케케묵은 법도.」

숙향은 동삼을 찾으러 와 미주알고주알 동삼에 대해 떠들고 간 법고의 이야기를 되새긴다.

「법도 따지는 양반들 별 거 아니다. 화신 백화점 옥상에서 돈을 다발로 뿌려 봐라. 양반들이라고 뒷짐만 질 것 같니? 아서라. 겉으로 체신 차리는 사람일수록 실속은 더 차리느니. 내 이날 이때까지 오만 사내를 다 겪어 봤지만 양반일수록 더 개차반이더라. 서푼 값어치도 없는 게 양반님네 법도니라. 진짜 사내는 사람을 보지 출신을 따지지 않느니.」

숙향은 혀를 끌끌 찬다.

「돌아다니느라 고생이 많았다.」

방문이 열리고 옥화가 밥상을 들고 들어온다.

「많이 먹어라.」

동삼은 상 앞에서 주저한다.

「왜 그러느냐?」

동삼과 옥화의 눈이 마주친다. 옥화가 밖으로 나간다.

옥화가 나가자 동삼이 수저를 들고 밥을 먹기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