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본격적인 무더위가 시작되기 전이건만 매미 울음소리가 시끄럽게 들려오고 있었다.

진주만 공격을 시발로 일어난 대동아전쟁은 막바지를 향해 힘든 고개를 넘고 있었으며 일본인들의 대조선 수탈은 그 어느 때보다 잔인무도했다. 경작한 농작물을 모두 수탈당한 조선인들은 초근 목피로 연명하였으며 집안엔 변변한 놋쇠 숟가락 하나 남아돌지 못했다. 여인들은 정신대로, 남자들은 징병이나 징용의 올가미에 묶여 수천 년 터를 잡고 살아온 조선 땅 밖으로 쫓겨났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숨을 죽이고 살았고 명망 있는 지식인들조차 총독부의 눈치만 살폈다. 순사들과 일본인 앞잡이들만이 제 세상을 만난 듯 네 활개를 치며 거들먹거렸고 국내에 남아 있는 뜻 있는 선지자들은 만주로 상해로 떠나 버렸다.

그나마 설숙도장은 형편이 좋은 편이었다. 봉화에 워낙 탄탄한 재산을 일군 집안의 장손인 설숙에게는 정기적으로 곡식과 돈이 올라왔고, 설숙이 바란 것은 아니었지만 정명운의 아버지인 용인의 정 진사 쪽에서도 틈틈이 그에 준하는 부식이 올라왔다.

설숙은 그 일에 전혀 무관심했으나 수업료라면 수업료일 수도 있는 것을 유일하게 내는 명운에게는 어깨가 으쓱해지는 일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것은 알게 모르게 다른 문하생들로 하여금 되도록이면 명운에게 한 수 양보하게 만드는 요인으로 작용했다. 그간 설숙도장에는 새로운 문하생이 두어 명 다시 입문을 했다.

어느새 동삼은 명운과 두 점으로 대국을 하고 있었다. 입문할 때는 넉 점 바둑이었는데 두 점으로 줄었으니 생각하기에 따라 그 동안 동삼의 바둑이 일취월장한 것처럼 보였지만 실상 동삼과 명운의 격차는 조금도 좁혀지지 않은 상태였다. 정상급에 올라갈수록 돌 한 점의 위력과 느는 속도는 천양지차였다.

이미 명운은 최해수를 포함해 모든 문하생들에게 백을 쥐고 선, 혹은 두 점을 접고 대국을 했다. 그렇게 나날이 발전하고 있는 명운에게 뚜렷한 기재도 없어 보이는 동삼이 두 점으로 버티는 것은 동문들에겐 기적처럼 보였다.

세 시간이 넘어간 바둑은 명운이 절대 유리한 판으로 바둑을 두는 당사자인 명운뿐 아니라 관전하는 여러 사람의 눈에도 동삼의 대마는 죽었고 대세는 요지부동이었다.

여간해서 대마가 잘 죽지 않는 동삼이었지만 중반의 치열한 전투에서 집요한 명운의 추적을 뿌리치지 못하고 기어이 동삼의 대마가 비명횡사했다. 누가 봐도 승부는 그 순간 분수령을 넘어 버렸고 바둑은 흑이 치명상을 입어 도저히 회생이 불가능했다.

바둑을 일찍 끝낸 문하생들은 일정한 거리를 둔 상태에서 동삼과 명운의 바둑을 지켜 보고 있었다.

관전하고 있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동삼이 돌을 던지지 않자 의아해했다. 어지간히 승부가 기울고 역전의 빌미가 없으면 깨끗하게 돌을 던지는 것이 상례였다. 몇몇 문하생들은 승부가 기울어진 바둑을 물고 늘어지는 동삼의 태도에 못마땅해했고, 평소에 동삼에게 호의적이던 최해수마저 동삼의 행동이 올바르지 못하다고 생각했다.

명운은 노골적으로 신경질을 부렸다. 동삼이 착수하자마자 별 생각 없이 후딱후딱 거칠게 돌을 놓았다. 한 수 한 수 놓을 때마다 두꺼운 바둑판이 쩡쩡 울리고 판 위에 놓인 돌들이 요란하게 흔들렸다. 주위 사람들의 분위기와 명운의 반응을 모를 리 없건만 동삼은 꾸역꾸역 바둑판 위에 돌을 놓으며 끈질기게 끝내기까지 판을 몰아 갔다. 고수들간의 바둑에서는 상상이 잘 되지 않는 광경이었다.

동삼은 끝내 돌을 던지지 않았고 마지막 반 패 싸움까지 벌어진 지리한 바둑은 끝이 났다. 빈 공배를 메우고 집을 만드는 명운의 손길은 평소답지 않게 서두르는 기색이 완연했다.

그런데…….

돌연 명운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믿을 수 없는 결과가 판 위에 드러나 있었다.

백 67호, 흑 68호. 흑 1집 승.

심드렁하게 구경하던 사람들은 아연실색 입을 벌렸고 주위는 갑자기 물을 뿌린 듯 조용했다.

명운이 버럭 고함을 질렀다.

「아니야! 계가가 잘못 됐어! 다시 복기해 보자!」

명운의 반론을 기점으로 주위가 소란스러워졌다. 이제까지 줄곧 관전해 오던 문하생들의 눈에도 의문의 빛이 역력했다. 누구도 예상치 못한 결과였다. 모두 한결같이 명운이 최소한 10여 집은 이겼다고 생각했기에 분위기가 술렁거렸다. 원생들이 여기저기서 한 마디씩 한다. 대부분 명운을 지지하는 말이거나 뜻밖의 결과라는 데 찬동하는 발언이었다.

「이상하군. 분명 대마 싸움에서 승부가 결정 났었는데…….」

「끝에 가서 꽤 따라간다고 생각했었지만 설마…….」

노골적인 표현만은 삼가하고 있었지만 모두가 의심의 눈초리로 동삼을 바라보았다. 일상적인 대국인 데다가 계가를 속일 만큼 필연적인 이유가 없다는 것을 누구나 알고 있었다. 이제까지 계가가 잘못된 예는 한 번도 없었다. 기도를 중시하는 도장 분위기상 계가를 속인다는 것은 언감생심 꿈도 꾸지 못할 일이었다. 다만 모두가 명운의 낙승을 예상했지만 엉뚱한 결과가 나왔고, 일부는 이제까지 동삼의 태도가 명쾌하지 못했다는 데 심적으로 동조했다.

명운이 빠른 속도로 흑백의 돌을 쓸어 담아 동삼에게 복기를 재촉한다.

「뭐해. 동삼! 복기해 보자니까!」

명운은 직접 동삼의 흑돌 두 개를 반상 위에 올려 놓고 자신의 첫 수를 놓았다. 지나치게 흥분한 탓으로 명운이 놓은 돌이 제 자리를 이탈했다.

동삼은 명운의 행동을 지켜볼 뿐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때 마당 한 곳에 설숙 스승이 나타났다. 분을 삭이지 못해 씩씩거리던 명운은 재차 동삼에게 복기를 요구했다.

바둑판을 내려다보던 동삼이 조용히 일어났다. 시끄럽게 울어 대던 매미 울음소리가 뚝 그쳤다. 동삼은 아무 말 없이 한 차례 주위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그런 다음 무표정한 얼굴로 대청에서 내려갔다.

동삼이 복기를 거부하고 나가 버리자 주위는 잠시 정적 속에 빠져 들었다. 그러나 그 정적은 이내 동삼이 더 의심스럽다는 해석으로 확산되었고 명운의 복기에 이목이 집중되었다. 명운은 혼자서 미친 듯이 복기를 했다.

명운의 복기가 끝이 났다. 계가를 하자 역시 동삼의 한 집 승이었다. 아무도 입을 여는 사람이 없었다. 대부분의 원생들은 명운의 주장을 너무 쉽게 수긍한 탓으로 쑥스러워했고 그와 눈길이 마주칠까 하여 슬그머니 외면했다.

누군가 눈치 없이 중얼거렸다.

「그 참 이상하다! 대마가 죽었는데…….」

명운의 얼굴이 참혹하게 일그러지더니 눈에 칼날이 섰다. 명운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보기 흉하게 안면이 일그러진 명운이 제 분을 이기지 못해 마루 바닥을 꽝꽝 울리며 대청 아래로 내려갔다.

멀리서 모든 것을 지켜 보던 설숙은 어딘가 모르게 가슴 한 구석이 허전했다. 막연하나마 그 동안 혹시나 하고 생각해 왔던 동삼의 기재가 조금씩 구체화되면서 설숙의 마음은 무거웠다.

어쩌면 나는 동삼에게 평사를 기대했는지 모른다. 그것이 내 판단을 흐리게 했는지도……. 아직 뭐라 단언할 수는 없으나 동삼의 바둑에는 쉽사리 무너지지 않는 철옹성의 기운이 서리어 있다. 두드려도 두드려도 깨지지 않고 부수고 또 부수어도 언제나 그대로인…… 우둔한 것 같지만 깊이를 쉽사리 드러내 놓지 않는 묵직한 성정이 엿보인다. 기재라는 측면에서 볼 때 그건 커다란 장점이 분명하다.

평사는 어쩌면 동삼의 그런 기재를 알고 있었던 게 아닐까? 그래서 나에게 데려온 건 아닐까?

설숙은 처마 끝에 반쯤 걸린 낙조를 우울하게 바라본다. 설숙은 한숨을 길게 들이쉰다. ‘바둑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설숙은 나지막이 속삭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