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유본말(物有本沫)하고, 사유종시(事有終始)하니, 지소선후(知所先後)면, 즉근도의(卽近道矣)라.」

설숙은 『대학(大學)』의 한 구절을 읊은 후 좌중을 주욱 둘러보았다.

설숙은 제자들에게 틈틈이 한학을 가르쳤다. 학문적인 가치도 가치려니와 한학은 바둑의 논리와 일맥상통하는 바가 적잖아 정신 수양에 많은 도움이 되었다.

문하생들이 모두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데 유독 동삼만은 딴 곳에 정신을 팔고 있었다. 필경 바둑 생각을 하고 있을 것이었다.

동삼은 한학 공부에 관심이 없었다. 입문한 그날부터 동삼은 종일 바둑에만 매달렸다. 바둑 이외에는 모든 것에 둔감했다. 한학도 마찬가지였다. 처음에는 그러려니 했지만 날로 그 도가 더해 가는 것 같았다.

「방금 그 구절의 뜻을 새겨 보아라.」

설숙이 동삼을 거명했다. 거명당한 동삼은 어쩔 줄을 모른다.

설숙은 잠시 동안 동삼을 노려보더니 훈독(訓讀)을 계속했다.

「물(物)에는 본(本)과 말(末)이 있고, 일에는 종(終)과 시(始)가 있으니 먼저 하고 뒤에 할 바를 알면 곧 도에 가까운 법이다.」

문하에 든 지 1년이 지났건만 설숙은 동삼에게 전에처럼 시종 냉담했다. 단 한 번도 동삼에게 관심을 보인 적이 없었다. 동삼이 누구보다 열심히 노력해도 설숙의 동삼을 대하는 태도는 입문하기 전이나 다를 바 없었다. 명운을 바라볼 때의 따뜻함도 없었고 최해수를 대할 때의 엄격함도 없었다.

스승에게 꾸지람을 듣고 고개를 떨구고 있는 동삼을 명운은 차갑게 쏘아 보았다.

명운은 동삼을 볼 때마다 아니꼬왔다. 우선, 집안의 일이나 하던 주제에 같은 동문이 된 것부터가 불쾌했다. 입문하기 전부터 명운은 동삼이 밉쌀스러웠다. 하인이나 별반 차이도 없는 주제에 뻣뻣하기만 한 동삼의 태도가 도무지 싫었다. 동삼이 문하에 들고 나자 명운의 그런 감정은 점점 더 깊어졌다. 차츰 명운은 자신만 그런 것이 아니라 일부 문하생들의 심정도 자신과 비슷하리라 생각했다.

입문 때 넉 점 접바둑이었던 동삼이 어느새 슬그머니 석 점으로 따라붙은 점도 명운을 거북하게 했다. 물론 고수가 될수록 바둑이 느는 속도는 늦추어지게 마련이고 같은 양의 공부를 하더라도 하수의 발전 속도가 빠른 법이다. 문제는 동삼이 자질이 있는 것인지 없는 것인지조차 불분명하다는 점이었다.

겉으로 보기엔 동삼은 평범했다. 그러나 동삼의 바둑은 여간해서 잘 무너지지 않는 끈기가 있었다. 겉보기와는 달리 실제로 맞부닥쳐 보면 의외로 녹록치 않아 쉽게 이길 수 없는 상대였다. 숨이 길고 우직한 데다 밟아도 밟아도 되살아나는 투박한 생명력이 있었다. 그런 것들이 알게 모르게 동삼과 대국하는 상대에게는 부담감으로 작용했다.

최근에 스승으로부터 책망을 당한 것도 명운의 심기를 불편하게 했다. 발단은 동삼 때문이었다.

정식으로 도장에 입문한 후 동삼은 행랑채에서 문하생들이 거주하는 별채로 거처를 옮겼다. 동삼의 방은 명운의 바로 옆방이었다. 동삼이 방을 옮긴 그날부터 명운은 밤마다 돌 놓는 소리에 시달렸다. 동삼의 방에선 끊임없이 돌 놓는 소리가 들렸다. 처음 얼마간은 대수롭지 않게 넘겼으나 근래 들어 밤낮으로 들려 오는 돌소리에 점차 신경이 곤두섰다.

그날도 새벽 두 시가 넘도록 동삼의 방에서 돌 놓는 소리가 들려 왔다. 저녁 늦게 끝이 난 유민재와의 대국으로 인해 명운은 기분이 상해 있었다. 초반 포석에 무리를 범해 중종반까지 계속 밀리다가 막판에 들어서야 유민재의 과수를 낚아채 판을 뒤집었다. 승패 여부를 떠나 스스로 만족치 못한 대국이었다.

그러던 차에 동삼의 방에서 들려 오는 바둑돌소리는 평소보다 한층 더 신경을 건드렸다.

따악. 따악.

명운은 방문을 열고 동삼에게 고함을 쳤다.

「야, 동삼! 시끄러워!」

동삼의 방에서 돌 놓는 소리가 그쳤다. 명운은 방문을 닫다 말고 깜짝 놀랐다. 처마 끝 어둠 속에 한 사람이 장승처럼 서 있었다. 스승이었다. 명운은 가슴이 덜컥했다.

입문 후 자신에겐 항상 따스했던 스승의 눈에 처음으로 노기가 비쳤다.

스승이 나를 질책하고 있구나.

명운의 다리가 후들후들 떨렸다.

설숙 스승이 사라지자 명운은 일시에 맥이 탁 풀렸다. 불현듯이 동삼이 미웠다. 입문하고 한 번도 스승의 눈 밖에 벗어난 적이 없는 명운이었다.

이 모든 이유가 동삼 때문이었다.

그날 이후 명운은 동삼과 대국하면 더욱더 모질게 승부를 탐했다. 명운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모든 수를 동원해 동삼에게만은 기어이 이겼다. 이기고도 명운은 항상 뒷맛이 나빴다.

명운은 옆 자리의 동삼을 꼬나 보았다. 보면 볼수록 동삼이 밉살스러웠다.

명운은 아직 홍안의 소년이었다.

「현현기경(玄玄碁經)에 이르기를…… 바둑은 천지방원(天地方園:바둑판과 바둑돌)의 상징이며, 음양(陰陽)과 동정(動靜)의 이치를 갖추었을 뿐 아니라 성신분포(星辰分布:포석)의 질서를 나타내고, 풍운기미(風雲機微:바둑의 변화)를 간직하고 춘추변천(春秋變遷:바둑의 사활)의 원리를 내포하며 산하지형(山河地形)의 기세(氣勢:바둑의 성쇠)도 남김없이 거기에서 나타난다 했다.」

김개원은 거기서 일단 말을 끊고 좌중을 돌아보았다. 원생들은 엄숙히 개원의 말을 경청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바둑에 정통한 자만이 인(仁)에 의해 자신을 삼가할 줄 알고 의(義)에 의해 행동하며 예(禮)에 의해 마음가짐을 바르게 갖추고 지(智)에 의해 사물을 올바로 판단할 수 있다. 그러므로 보통 일반의 여러 가지 예(藝)와 동등시하고 있으니 어찌 이를 가볍다 할 수 있으리오!」

개원의 음성이 우렁차게 도장 안에 울려 퍼진다. 동삼이 입문하고 처음 도장에 나타난 개원은 동삼이 설숙의 문하생이 되어 앉아 있는 것을 보고 흐뭇해했다.

며칠 전 설숙에게 평사의 이야기를 전해 들은 개원은 밤이 이슥할 무렵 동삼이 거처하는 방으로 찾아갔다.

「선친의 기보를 보여 다오.」

동삼이 기보를 개원 앞에 내놓았다. 개원은 피로 물든 기보를 받아 들고 복기를 시작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개원의 눈이 충혈된다. 중반을 지나자 개원의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진다.

바둑이 끝났을 때 개원의 얼굴은 온통 눈물투성이였다. 그날 개원은 복기를 수차례 하며 밤새도록 울었다.

지난번 동삼이 추평사의 자식임을 알고 난 후 개원은 돌아다니면서 마음 한구석이 허전했다. 한때 자신이 우러러보았던 추평사의 자식이 하인처럼 일만 하고 있다니, 개원은 추평사를 생각하면 울적한 기분을 지울 수가 없었다. 평사가 여목 스승에게 쫓겨날 때도 개원은 내심으로 스승의 처사가 너무 과하다고 생각했다.

평사가 도장에서 쫓겨나던 날은 바람이 몹시 불던 초겨울이었다. 도장 뒷채 담벼락을 끼고 멀어져 가던 평사의 뒷모습을 개원은 오랫동안 잊지 못했다. 그래서인지 개원은 평사의 자식인 동삼에게 더욱더 연민이 갔다. 다행히 설숙의 심경에 변화가 있었고 동삼이 정식으로 도장에 입문하자 개원은 큰 짐을 던 듯 마음이 홀가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