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숙이 출타하여 돌아온 후 벌써 사흘째 도장은 깊은 적막에 싸여 있었다.

설숙은 사흘 밤낮을 방안에서 두문불출했다. 설숙의 방은 밤새도록 불이 밝혀져 있었다. 문하생들은 이러한 스승의 침묵에 모두 초조해했다.

스승의 주위를 얼씬거리는 제자는 아무도 없었다. 대낮이건 밤이건 도장은 고요했고 항상 청아하게 울리던 바둑돌 놓는 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간혹 불어오는 바람이 마당을 쓸고 지나갈 뿐 시간마저 정지되어 버린 듯 도장은 괴괴한 침묵 속에 잠겨 있었다.

사흘 동안 뜬눈으로 밤을 지샌 설숙은 벽송을 마주하고 있었다. 벽송 위에는 반면 가득히 흑백의 돌들이 놓여 있었다. 설숙은 반면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설숙의 눈은 움푹 꺼진 채 충혈되어 있었다. 입술도 허옇게 부르터 있었고 수염 난 자리가 꺼뭇꺼뭇했다.

벽송 위에 여러 사람의 얼굴이 두서 없이 지나갔다. 여목 스승, 평사, 스승의 임종 직후 어디론가 떠나버린 동설, 자운 선생…….

며칠 전 만난 정 역관은 다짜고짜 자신에게 기보 한 장을 내밀었다.

「어쩐지 이 기보를 전해 줘야 할 것 같았소. 그것이 죽은 사람에 대한 내 마지막 도리라는 생각이 드오.」

정 역관은 전에 비해 근력이 못해 보였다.

「어떻게 이 기보가 내 손에 들어왔는지는 묻지 마시오. 다만 그 기보가 추평사의 마지막 대국이었다는 것만 알아 두시오.」

설숙은 기보를 받아 들었다. 손에 들린 기보가 한줌의 재와 같다. 기보용지에 빽빽하게 표기된 수순들이 어지럽게 교차한다. 희고 검은 기보의 수순들이 음울한 평사의 눈이 된다. 가슴이 서늘하다. 마지막 대국이라…… 결국…….

정 노인 집 넓은 안마당에 서 있는 감나무 한 그루가 눈에 들어왔다.

「그는 북해도 근처 어느 길에서 객사했소.」

철 지난 감나무에 가지가 앙상하다.

설숙은 손에 들고 있던 기보를 집어 품속에 넣었다.

「반평생 이어져 왔던 스승에 대한 애증은 어이했을꼬…….」

정 노인의 목소리가 허허롭다.

「그렇게 갈 것을…….」

정 노인의 목이 잠긴다. 주름지고 퇴색한 얼굴, 탁한 눈망울에 물기가 번진다.

설숙은 말없이 그 자리를 떠났다.

그날 설숙은 정 역관의 집을 떠나 걸어서 도장으로 돌아왔다.

결국 이것이란 말인가…….

지난 사흘 내내 설숙은 벽송 앞에 앉아 자신을 책망하고 있었다. 벽송 위에는 평사의 살아 생전 마지막 대국이 놓여 있었다. 수십 번 검토를 해 보아도 결과는 매한가지였다.

그 동안…… 나는 무엇을 하고 있었더란 말인가.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살아왔다고 자부했건만 평사가 남기고 간 바둑을 보고 난 설숙의 심정은 참담했다.

눈앞에 놓인 바둑돌들이 무슨 오르지 못할 거대한 벼랑 같았다. 설숙은 눈을 감았다. 거칠고 메마른 평사의 얼굴이 선명해진다. 바라보기만 해도 날카롭게 파고드는 평사의 눈이 가슴을 찌른다.

「모름지기 승부사의 눈빛이 저쯤은 되어야지!」

평사의 눈을 보고 허허거리며 자운 선생은 웃었다. 스승 여목은 평사의 그 눈을 좋아했다.

평사의 눈과 동삼의 눈이 겹쳐진다. 관골이 불거진 평사와는 달리 선이 뚜렷한 동삼이었지만 왠지 그 어두운 눈빛만은 제 아비를 닮아 있었다.

서방님…….

그가 동삼을 맡기러 왔을 때 그는 그렇게 자신을 불렀다. 그가 자신을 서방님으로 부르게 했던 단 하나의 이유, 그것은 그의 자식 동삼이었다.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길을 떠나며 그는 평생 처음 자식을 위해 고개를 숙였다.

창호지가 석양에 붉게 물든다. 설숙은 다시 눈을 뜨고 바둑판을 바라보았다. 바둑판 위에는 깊은 절망이 숨쉬고 있었고 스승의 질책이 흐르고 있었다. 영혼을 혹사하는 아픔이 묻어 있었다.

절망의 시간은 길고도 치열했다. 그러나 그 절망의 시간은 차후 설숙의 바둑을 한 단계 높이는 데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스승님께서 널 찾으신다.」

최해수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동삼은 보던 바둑책을 덮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시각은 이미 새벽 두 시를 넘어서고 있었다. 동삼은 댓돌 아래 놓여 있는 신발을 신었다.

무슨 일일까. 이 늦은 시각에.

설숙은 단 한 번도 밤늦은 시간에 자신을 부른 적이 없었다.

설숙의 거처에는 불이 환하게 켜져 있었다.

「들어오너라.」

동삼이 방문을 열고 들어섰을 때 설숙은 뜻밖에 벽송을 앞에 두고 곧은 자세로 앉아 있었다. 설숙의 얼굴은 창백하고 부스스했다. 불빛을 정면으로 받아 눈 주위로 음영이 짙게 드리워져 있었다.

바람에 불빛이 흔들린다. 흔들리는 불빛을 따라 설숙의 그림자가 좌우로 일렁거린다. 동삼은 조심스럽게 여닫이 문을 닫았다. 어디선가 찌르르르 여치 울음소리가 적막을 깬다.

「게 앉거라.」

설숙이 손을 들어 가리켰다. 설숙이 가리키는 곳은 명반 벽송의 건너편 자리였다. 나무 막대기처럼 뻣뻣하게 서 있던 동삼이 흠칫했다.

무슨 뜻인가.

동삼의 다리가 후들후들 떨린다. 동삼은 벽송 앞에 꿇어앉았다. 수백 년 세월을 내려온 벽송의 자태가 고색창연하다. 맑고 곧은 옻줄이 불빛 아래 뚜렷하고 뭐라 형언할 수 없는 향기가 코끝에 스민다. 동삼은 숨을 죽인다.

꼿꼿하게 앉아 있던 설숙이 평사의 기보를 집어서 벽송 위에 놓았다.

「그 기보를 판 위에 놓아 보아라.」

설숙의 음성에 온기라곤 한 점도 없었다. 동삼은 설숙을 올려다보았다. 두 사람의 눈이 정면으로 마주친다. 설숙의 눈은 맹렬하게 타오르는 불꽃 같았다.

동삼은 설숙의 시선을 피해 기보를 집어 들었다.

黑 : 白石光秀

白 : 秋平斜

귀퉁이 부분이 낡아 너덜너덜해진 종이 맨 위에 아버지 추평사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아버지…… 이젠 아슴프레해져 꿈속에서나 더러 보이던 얼굴. 언제부턴가 그 외롭고 어둡던 얼굴은 기억 속에서 차츰차츰 잊혀져 갔다.

기보를 든 동삼의 손끝이 떨린다.

하나밖에 없는 자식이 그 아비가 마지막으로 둔 바둑을 복기한다. 절세의 명반 위에 절세의 명국이 재현된다.

「명반 위에 놓일 자격이 있는 바둑은 세상에 드물거니……」

설숙은 두 눈을 감고 반석같이 앉아 있다. 천년 세월 비바람에 씻겨도 한 점 흔들림이 없을 것 같은 오연한 모습이었다.

「네 아비는 죽었다.」

동삼의 심장이 덜컥한다. 설숙의 말이 멀리 아득하게 들린다.

눈앞이 부옇게 흐려 오고 열네 살 난 소년의 눈에서 눈물이 떨어진다. 판 위에 놓인 흑과 백의 돌들이 눈물 속에서 어른어른거린다.

한 식경이나 지났을까. 돌 놓는 소리가 다시 들린다.

방 안은 무겁게 가라앉아 일체의 정적으로 침묵하고 있었다.

마침내 복기는 끝이 났다.

「그 기보는 너의 아비가 생전에 마지막으로 둔 것이니 네가 간직하도록 하여라.」

「…….」

「이제부터 너도 바둑을 배우도록 해라.」

백랍처럼 굳어 있던 동삼의 얼굴에 전혀 기색이 없다. 고대하던 그의 제자가 되었건만 아무런 감동이 없다. 5년 만에 비로소 맺어진 스승과 제자 사이에 어색한 기류가 흐른다.

동삼은 벽송 위의 흑백의 돌들을 갈라 돌통 속에 쓸어 담는다. 그리고 동삼은 기보를 들고 자리에서 일어나 방을 나왔다. 먹장 같은 어둠을 헤치고 눈발이 조금씩 비치기 시작했다. 첫눈이었다.

멀어져 가는 동삼의 발걸음소리를 들으며 설숙은 동삼을 받아들이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설혹 기재가 떨어진다 하더라도 동삼의 바둑에 대한 남다른 애착만은 이미 알고 있는 설숙이기에 자신의 결정에 후회는 없었다.

어쩐지 그래야만 할 것 같았다. 그 빼어난 기재로 거인 여목 스승의 마음을 흔들었던 추평사의 아들이 아닌가. 그 옛날 한때는 그로 인해 숱한 좌절과 고통 속에 몸부림쳤다. 그것은 벽송을 물려받은 이래로 지금까지 자신을 놓아 주지 않았다. 그러나 이제 그의 죽음 앞에서 그 동안 자신의 가슴속에 남아 있던 열패감의 사슬은 그 질긴 고리를 끊어 버렸다. 허탈감과 회한의 물결이 온몸 가득히 차 올랐다.

설숙은 평사와의 마지막 만남을 생각했다. 병이 깊은 몸으로 동삼을 맡기고자 찾아온 추평사. 스승 여목에게 내쫓김을 당했지만 이 도장이야말로 그의 영원한 고향이었다.

그는…… 아마도 죽는 순간에 스승을 생각했을 것이다. 그것이 아니라고 수백 수천 번 발버둥쳤지만 평사의 삶, 그 시작도 여목이었고 그 마지막도 여목이었다. 그 애증의 평행선 위에서 한평생 몸부림쳤지만 결코 한 발짝도 거기에서 벗어나지 못한 평사였다.

애초부터 평사의 바둑은 비극을 내포하고 있는 바둑이었다. 도장에서 쫓겨난 것은 빌미에 불과했다. 비극의 서막은 스승과의 결별이 아닌 스승과의 만남이었다. 스승 여목은 평사에게 희망을 심어 주었고 끝내는 그것을 거둬 들인 것이다.

그래 잘한 일이야.

지난 사흘간 뜬눈으로 지샌 번민의 끝은 평사의 자식 동삼에게 바둑을 한번 시켜 보자는 결심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