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상 주위로 문하생들이 모여 있는 넓은 뜨락에 김개원이 들어섰다. 머리를 맞대고 무언가 골몰해 있는 문하생들은 그가 나타난 줄도 모르고 있었다. 한쪽 귀에 사활 문제가 놓여 있는 바둑판을 아이들은 정신없이 들여다보고 있었다. 꽤나 난해한 사활 문제였다.

설숙도장의 문하생 대부분이 그 자리에 있었다. 장형(長兄)격인 최해수(崔海秀)를 비롯해 유민재(柳敏在), 김재석(金在析), 정명운(鄭明雲) 등이 모두 나와 있었다. 한 발 떨어져 최해수의 뒤편으로는 도장에서 허드렛일을 하는 소년이 보였다. 소년의 손에는 싸리 빗자루가 들려 있었는데 발치에는 낙엽이 수북이 쌓여 있었다. 소년 역시 바둑판에 정신이 팔려 있긴 마찬가지였다.

김개원의 시야에 정명운의 단정한 모습이 들어왔다. 1년 가까이 못 본 사이에 명운은 많이 어른스러워져 있었다.

명운을 설숙도장에 처음 데리고 온 사람은 김개원이었다.

명운의 집은 윗대에서 여러 명이 벼슬을 지낸 바 있는 뼈대 있는 가문이었다. 농촌에서는 아직도 옛날 풍습이 남아 있어 양반에 대한 마을 사람들의 예우로 명운의 아버지는 정 진사로 불리었다. 가문도 가문이려니와 정 진사는 천석지기가 넘는 용인(龍仁)의 손꼽히는 갑부였다.

명운은 정 진사의 세 아들 중 막내였다. 유복한 집안의 막내로 태어난 명운은 다섯 살 때 천자문을 깨칠 정도로 총기가 비상했다. 정 진사 부부에게는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귀한 아들이었다.

그런 명운의 기재를 맨 처음 발견한 사람은 여목의 마지막 제자 김개원(金介源)이었다.

김개원은 스승 여목이 타계한 후 도장을 나와 일정한 거처 없이 세상을 떠돌아다녔다. 사람을 사귀는 데 격의가 없는 김개원은 조선 팔도를 돌아다니며 많은 인사들과 교분을 맺었다. 정 진사도 그 중 한 사람이었다.

몇 년 전, 어느 화창하게 개인 봄날 오후 정 진사 집 사랑에 들른 김개원은 그곳에서 한 어린아이가 바둑을 두는 모습을 우연히 목격했다.

소년은 첫눈에 영특하고 총명해 보였다. 꽉 다문 입매에서 투지가 넘쳐흘렀다. 침술에 일가견이 있는 읍내 조 의원과 소년은 두 점 접바둑을 두고 있었는데 행마의 품세가 나름대로 소신이 있어 보였다.

투지만만한 소년의 바둑을 보며 김개원은 느닷없이 그 옛날 스승 여목과 자신의 첫 대면이 생각났다. 자신도 그만한 나이에 백부의 손에 이끌려 여목도장을 찾았다.

일찍이 조실부모한 개원은 백부의 손에서 자랐다. 아무도 구박을 하거나 눈치를 주는 사람은 없었지만 넉넉찮은 집안 형편으로 인해 개원은 손위 사촌들을 대하기가 안쓰러웠다. 그러다 보니 본의 아니게 개원은 집 밖으로 나돌았고 우연한 기회에 바둑을 접했다. 1년 가까이 지났을 때 개원은 그 동네에서 적수를 찾을 수 없게 되었다.

인근에 개원에 대한 소문이 자자할 무렵, 하루는 밤늦게 백부가 개원을 불렀다. 늘 엄하기만 했던 백부가 처음으로 자상하게 물었다.

「바둑을 공부하고 싶으냐?」

「예.」

「집을 떠나 있어도 좋겠느냐?」

「…….」

다음날 백부의 손을 잡고 개원은 여목도장으로 향했다. 시골에 묻힌 일개 서생에 불과한 백부였지만 여목 스승은 백부를 환대했다.

여목도장의 촉망받는 문하생의 한 사람인 동설에게 개원은 자신만만했다. 동네에서 신동으로 소문 난 자신이 아닌가. 선학처럼 보이는 어른 앞에서 반드시 이겨 문하로 들고 싶었다.

그러나 넉 점을 놓고 둔 대국에서 개원은 참패했다. 개원은 태어나서 그런 바둑은 처음 보았다. 화려하면서도 날카롭고 동에 번쩍 서에 번쩍…… 도저히 자신의 능력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수들이었다. 어떻게 하든 입문을 하겠다는 일념으로 이를 악물고 승부에 임했지만 불가항력이었다.

개원은 눈앞이 캄캄했다. 백부를 대하기가 민망스러워 개원은 바둑돌을 거두며 슬며시 자리에서 벗어났다.

개원이 밖으로 나가자 여목 스승이 동설에게 명했다.

「저 아이가 거처할 방을 마련해 주어라.」

백부가 당황했다.

「하릴없는 자식에게 과분한 처사가 아닐는지요.」

여목의 흰 눈썹이 꼿꼿이 섰다.

「기재란 갈고 닦은 이후에 솟아나는 법이외다.」

개원은 새삼 그 당시를 생각하며 가슴이 벅찼다.

바둑이 끝난 후 조 의원에게 개원이 물었다.

「못 보던 아이인데, 뉘집 자제요?」

「이 집 막내아들입니다. 재기가 승(勝)한 편이지요.」

조 의원이 아이에 대해 설명한다.

「이제 열한 살인데 어린아이가 보통 고집이 아니외다. 부잣집 막내아들로 자라서 그러한지…… 오늘만 해도 어지간하면 던질 만한데 끝까지 물고 늘어지지 않더이까. 전엔 이런 일도 있었지요. 중반에 대마 수상전이 붙었는데 한 수 빠른 걸 수읽기 착각으로 되려 자신의 대마가 잡히게 되었지요. 대마가 죽자 그제사 한 수 착각한 걸 알고 아이가 그만 혼이 빠져 앉아 있는데…… 참 당혹스러웠소이다.」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승부에 집착하는 아이가 신통했다.

개원이 사랑에 머무는 동안 소년은 내내 그의 주위를 맴돌았다. 며칠을 지낸 개원이 떠날 때가 되어 이른 아침부터 먼 길을 떠날 채비를 하는데 소년이 개원을 찾아왔다.

「어르신네. 저에게 바둑 한 판 가르쳐 주십시오.」

소년은 당돌했다.

개원은 스스럼없이 그 청을 받아들였다. 막상 바둑을 두어 보니 재주도 재주려니와 승부에 대한 소년의 집착이 남달랐다. 떠나면서 개원이 아이에게 일렀다.

「처음부터 다시 놓아 보면 승패의 연유를 알게 될 것이다.」

개원은 소년의 근성이 마음에 들었다. 여섯 점 접바둑이었지만 오랫동안 기억에 남는 대국이었다.

3개월 후 다시 용인에 들른 개원의 숙소로 밤늦게 소년이 찾아왔다. 소년의 손에는 조그마한 소반이 들려 있었다.

「늦은 시간에 어쩐 일이냐?」

「조금 전 어르신께서 오셨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공손하게 절을 하며 소년은 손에 들린 소반을 개원 앞에 내밀었다. 여름철이라 제삿상에나 겨우 올릴 만큼 귀한 곶감이 가득 들어 있었다.

「그래, 바둑 공부는 좀 했는고?」

「…….」

「패인이 무엇이더냐?」

소년을 떠볼 요량으로 개원이 물었다.

「변에 있는 제 돌을 살린 게 패인입니다.」

소년은 정확하게 패인을 짚었다.

「그래 바로 보았다. 바둑은 사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다. 자신의 돌을 버릴 줄 알아야 한다.」

개원의 대답에 소년이 되물었다.

「버림으로써 득을 취하라는 뜻이온지?」

「돌에 대해 집착하지 말라는 것이다.」

「매사가 그러합니까?」

「아니다. 돌을 가벼이 보되 업수이 여기면 안 된다. 버려야 할 때가 있고 반드시 취해야 할 때가 있다.」

소년의 눈빛은 초롱초롱했다. 개원은 소년이 자신의 말을 대부분 이해한다고 생각했다.

그날 밤 개원은 소년과 밤늦도록 한 판의 바둑을 두었다. 지난번과 같이 여섯 점 접바둑이었는데 100여 수 남짓에서 개원은 결과를 보지 않고 돌을 거두었다. 소년의 기력은 불과 3개월 만에 비약적으로 발전해 있었다. 딱히 가르쳐 주는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니건만 불가사의한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