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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회] 2부 숨겨진 기보 한 장 (3)

2007-03 조회 4283추천 0 프린트｜스크랩

추동삼의 현 주소인 삼양동 집은 이미 재개발로 헐리고 없었다. 그 주소가 있던 자리에는 자그마한 4층 건물이 들어서 있었다. 삼양동 동사무소로 찾아가 동사무소 직원에게 사정을 이야기하고 도움을 청했지만 그곳에도 30여 년 전의 기록은 남아 있지 않았다. 동이 분할되어 서류가 여기저기 나누어지는 과정에서 분실되거나 폐기되었을 것이라는 막연한 추측뿐이었다. 박 화백은 이틀간 주민등록이 생긴 시점을 전후하여 지금까지의 퇴거인 명부를 훑어보았으나 끈질긴 그의 인내에도 불구하고 어디에도 추동삼의 이름은 없었다. 추동삼은 주소지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진 것이었다. 다음날, 실마리가 끊어진 박 화백은 차를 몰고 경북 봉화군에 있는 추동삼의 본적지를 찾아갔다. 일곱 시간 가까이 걸려 봉화군 봉성면에 도착한 박 화백은 우선 면사무소에 들러 추동삼의 이름과 본적을 대고 호적등본을 한 통 떼었다. 호적등본상의 인적 사항은 다음과 같았다. 추동삼(秋東三) 1928년 11월 13일 서울특별시 종로구 인사동 147-26번지에서 부 추평사(秋平斜), 모 김정임(金貞任) 사이에서 출생. 추동삼의 호적상의 내용은 간단했다. (날짜와 주소는 아마 호적을 재정리하는 기간에 수정된 내용 같았다. 추동삼의 출생 당시에는 대정(大正) 몇 년이니 소화(昭和) 몇 년이니 하는 식의 표현을 썼을 것이며 서울이 아닌 경성이라는 명칭을 썼을 것이다.) 박 화백은 아직 사망 처리되지 않은 추동삼의 호적등본을 손에 쥐고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최소한 기록상으로 추동삼은 분명히 살아 있었다. 박 화백은 외삼리를 찾아가 보았다. 아직도 이런 곳이 남아 있을까 싶은 사, 오십 가구밖에 살지 않는 작은 동네였다. 그나마 살던 사람은 거의 도시로 떠나고 노인들 몇 분과 환갑이 다 되어 가는 부부 몇 사람이 농사를 지으며 고향을 지키고 있었다. 동리 이장을 찾아가서 추동삼이란 사람을 아느냐고 물어 보았지만 이장의 대답은 그런 사람은 모른다는 것이었다. 박 화백이 호적등본을 내보이며 그 주소를 보여 주자 이장은 자기 기억으로는 그 집에 김씨 성을 가진 사람이 살았는데 10여 년 전 도시로 솔가하고 지금 그 집은 아무도 살지 않는 빈 집이라고 했다. 박 화백이 난감해하자 이장은 실제로 그런 사람이 살았다면 마을의 최연장자인 장 노인은 기억할지 모른다며 직접 박 화백을 데리고 장 노인을 찾아갔다. 팔순이 넘었다는 노인은 얼굴 전체에 검버섯과 주름살이 가득한 전형적인 상노인이었다. 눈은 주름 속에 파묻혀 탁한 회색빛을 띠고 있었고 가는귀가 먹었는지 고함을 치다시피 목청을 높여야 겨우 말귀를 알아들었다. 막걸리를 좋아해서 아직도 하루에 두어 통을 거뜬히 비운다는 장 노인은 박 화백이 가져온 안주는 거들떠보지도 않고 신김치 쪼가리를 안주로 막걸리 두 대접을 물 마시듯 비워 댔다. 「어르신, 요 아래 언덕빼기 참에 감나무 집 안 있십니껴. 그 집에 살았다 카는데 추동삼이라고 혹시 기억에 있십니껴?」 이장이 고함치듯 물어 보았다. 「누구?」 노인이 귀를 이장의 얼굴에 바싹 갖다 대며 되물었다. 「추 동 삼.」「……잘 모리겄는데…… 몇 살이나 묵었는데?」「60이 훨씬 넘었다 캅디더.」「60이 넘었다꼬……글시 …… 그 집에 옛날에 추씨 성을 가진 사람이 살기는 했제. 그 집 자식이 내보다 몇 살 연상이께…… 살았시만 90이 넘었을꺼로.」「그 사람이 누군데요?」 박 화백이 짚이는 데가 있어 다그쳐 물었다. 「추평사라고…… 대단한 사람이었제.」 장 노인은 먼 기억을 더듬는지 눈언저리가 가물가물거렸다. 추평사라면 호적상으로 추동삼의 아버지가 되는 사람이었다. 「뭐 하던 사람이었습니까?」「바둑쟁이였제. 왜정시대…… 하루 밥 세 끼도 묵기 심든 시절에 바둑 배운다꼬 고향을 떠난 사람이었제. 들리는 소문에 따르마 바둑 하나는 귀신이 곡할 만큼 잘 뚜었다 카더라.」 노인은 다시 막걸리를 반 대접 들이켠 다음 입가를 훔쳤다. 「왜정 때…… 우리거치 땅 파묵고 사는 사람이 바둑이 뭔지 알기나 하것나만서도…… 일본에서 바둑 잘 뚜는 놈들이 조선땅에 와가꼬 다른 사람은 다 이겼는데 추평사 그 사람한테만은 일패도지, 한 번도 이기지 못하고 개꼬리 말 듯이 해가 다시 저거 나라로 도망 갔다는 소문이 있었제…….」「그래서 어떻게 되었습니까?」「그리고 그 사람도 나중에 일본으로 건너갔다 카더만. 일본 가가 내기바둑 뚜가지고 천석지기 장만했다 카는 소문도 있었고, 바둑을 너무 잘 뚜갖고 왜놈한테 맞아가 빙신이 됐다 카는 말도 있었고…… 뜬금업시 들리는 소문잉께 믿을 수는 없지만서도…… 바둑 하나만은 동서고금 어디 내놔도 손색이 없었다 카는 거는 사실인 갑더라.」 박 화백은 추동삼이란 사람을 추적하다가 뜻밖에 드러나지 않은 바둑 가문을 발견하고 가슴이 두근거렸다. 어눌한 말투와 조리 없는 노인의 이야기였지만 근대에 와서 그러한 가문이 존재했다는 사실 자체가 경이였다. 「바둑 잘 뚜마 머하노…… 지 아비 임종도 지키지 못한 불효자가…….」「예? 무신 말씀입니꺼.」 이장이 노인의 말에 놀라서 되묻자 노인은 이장의 말을 못 들은 척 대꾸가 없었다. 「그분은 뒤에 어떻게 됐답니까?」 박 화백이 장 노인의 귀에 대고 고함을 질렀다. 「모리제. 어데서 객사했다 카는 이야기도 들리고, 폣빙으로 죽었다 카는 이야기도 들리고, 어떤 사람은 해방 후 서울에서 고래등거튼 집에서 사는 걸 봤다 카기도 했고…… 고향이라꼬 한 번 찾아오는 뱁이 없었잉께 어는 기 맞는가 알 수가 있어야제…….」 노인은 술 몇 잔에 취해 횡설수설했다. 노인은 목침을 베고 자리에 누웠다. 박 화백과 이장이 그 자리를 물러나오는데 노인이 몸을 뒤척이며 중얼거렸다. 「허기사 종살이했던 고향이 머 좋다꼬 들리겠노……. 누가 반기 주는 사람이 있나…… 내라도 안 돌아오겄다.」 그리고 나서 노인은 불과 1, 2초도 안 되는 사이에 코를 골고 있었다. 본적지에서 추동삼의 실마리는 완전히 끊어진 채 추동삼의 아버지 추평사에 대한 기억의 편린만 몇 점 주워 모아서 박 화백은 그 두 사람이 실존했던 사람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호적등본 한 장만 들고 서울로 돌아왔다. 서울에 당도하니 정 국수의 부고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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