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듯 일본은 바둑으로 국난을 극복하고자 했다.

「아버지.」

「말해 보아라.」

「앞으로는 보다 다양한 세상이 옵니다. 한 방면에 뛰어난 사람이 이기는 세상이 옵니다.」

「누가 너에게 그렇게 가르치더냐?」

재석이 쑥스러워하며 대답했다.

「큰형님입니다.」

일본에서 유학중인 재석의 형은 매우 현명한 사람이었고 아버지는 큰아들을 깊이 신뢰했다. 재석의 친부는 더 이상 아무런 말이 없었다. 그날 이후 재석은 자유롭게 바둑을 공부했다.

한 달 후 재석은 다시 친부 앞에 불려 갔다.

「바둑을 계속하겠느냐?」

「예.」

「한 방면에 뛰어난 인재가 되려면 그에 걸맞는 재질이 필요한 법. 그만한 이치는 알고 있으렷다?」

「예.」

「우선은 너의 재질을 시험해 보도록 하자. 듣자 하니 조선에도 설숙도장이란 게 있어 바둑을 가르친다 하더구나. 소질이 있는 사람만 받아들인다 하니 그곳에서 너의 재주를 알아보자. 다행히 거기서 받아들인다면 네가 하고자 하는 공부를 막지 않으마. 그러나,」

친부는 재석에게 단단히 다짐을 받는다.

「그곳에서 너의 재주를 인정받지 못하면 그 길로 바둑을 잊고 공부에 전념해야 할 것이다. 약조할 수 있겠느냐?」

「약속드리겠습니다.」

그 길로 김재석은 설숙도장을 찾아왔고 정식으로 문하생이 되었다.

김재석은 부지런히 공부했고 기력도 큰 기복 없이 꾸준히 늘었다. 설숙은 그를 볼 때마다 언젠가는 제 몫을 충분히 할 재목이라고 여겼다.

정명운과 유민재는 비숫한 시기에 입문했는데 언제부턴가 정명운이 앞섰다. 유민재의 피 나는 노력과 집념에도 불구하고 좀체 그 간격은 좁혀지지 않았다. 좁혀지지 않을 뿐 아니라 그 간격은 점점 더 벌어져 근래 와서는 유민재가 정명운에게 선으로 두는 형편이었고 그런 민재의 고통과 광기에 찬 얼굴을 대할 때마다 설숙은 심히 염려스러웠다.

설숙은 맨 마지막에 앉은 최해수와 동삼을 바라본다. 동삼이 두 점을 놓았는데 중반을 넘어서는 그 시점까지도 두 점의 위력은 여전히 살아 있었다. 최해수의 한 수가 반상 위로 떨어진다. 굴복을 강요한 수로서 기세상 굴복하고 싶지 않은 자리이다. 동삼은 한참 장고하더니 반발하지 않고 묵묵히 웅크린다.

개원에게 질타당할 것을 번연히 알면서, 김재석이 착수했던 곳을 굳이 고수하던 태연자약하던 모습이 생각난다. 비굴하지도, 교만하지도 않던 침착한 행동거지가 함께 떠오른다.

묘한 아이다. 저만한 나이, 저만한 기력에서는 있기 어려운 자기 나름대로의 우직한 고집이 엿보인다. 제 아비 추평사의 그 화려하면서도 어둡고, 날카로우면서도 음산한 행마는 찾아볼 수 없지만 어쩐지 동삼은 제 갈 길을 꾸준히 가고 있는 것 같다.

구체적으로 그것을 증명해 주거나 반증할 징후가 아직 보이지 않았지만 설숙은 그런 느낌을 강하게 받았다. 빛나는 기재와는 분명 격이 다른 불가해한 평범함이 그의 바둑에 숨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상상을 뛰어넘는 피 나는 노력 탓인가.

처음 입문할 때보다 동삼은 확실히 진보해 있었다. 최해수나 정명운에게 정확히 한 점을 접근하고 있었다. 고수의 한 걸음 전진은 황소 걸음처럼 더딘 법이고 하수의(그들에 비해) 한 걸음은 승냥이처럼 빠른 법이다. 동삼의 기력 향상은 빠른 편도 아니고 느린 편도 아니다. 나름대로 기재가 있는 사람들이 모여 있는 이곳의 일반적인 발전 속도로 보면 약간은 더딘 편이었다.

그러나 설숙의 입장에서 보면 놀라운 발전이었다. 그렇게 기력이 향상되리라고는 애초부터 기대하지 않았고 그런 만큼 예상치 못한 일이기도 했다. 설숙은 그 이유가 동삼의 피 나는 노력이라고 이해했다.

설숙이 그것을 발견한 것은 명운과 동삼의 대국에서였다.

전날 밤을 새워 공부한 탓인지 동삼의 눈에는 벌겋게 핏발이 서 있었다. 석 점을 접고 두는 바둑이라 명운은 이곳 저곳을 찔러 보며 난해한 바둑으로 판을 몰아 갔다. 하수의 심리를 이용하기 위한 측면도 있었지만 그날따라 과도할 정도로 판을 흔들어 댔다.

그때 설숙은 일순 동삼이 비틀하며 바둑판 앞으로 쓰러지는 듯한 모습을 보았다. 순간적인 일이었으나 설숙은 직감적으로 동삼이 지나친 공부와 과도한 체력 소모로 한순간 정신을 놓쳤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설숙은 제자들의 생활을 손바닥 들여다보듯이 훤히 알고 있었다.

재기는 떨어지나 승부의 집념만은 제 아비를 닮았구나.

평사가 얼마나 독하게 공부했는지를 설숙은 기억하고 있었다. 가슴 밑바닥에 영혼을 불사르는 승부의 기질이 없다면 결코 있을 수 없는 피 나는 수련이었다. 최소한 그 점에서 동삼은 제 아비의 피를 그대로 이어받았다.

솔직히 그때까지 설숙은 동삼에게 무관심했다. 어쩌면 불세출의 천재인 평사와는 판이한 동삼의 재질 때문에 오히려 기울여야 할 관심을 애써 외면해 왔는지도 몰랐다.

그날 이후 설숙은 조금씩 동삼에게 관심을 기울였다. 거기다가 설숙은 오늘 또 다른 동삼의 일면을 발견했다. 뿌리가 든든한 고집이었다.

바둑은 동삼이 두 집으로 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