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숙도장으로 돌아온 동삼이 다시 바둑돌을 잡게 된 것은 돌아온 지 6개월이 지나서였다.

동삼이 떠나 있었던 1년여 동안 설숙도장엔 작은 변화가 있었다. 정명운만큼 설숙 스승의 관심을 끌지는 못했지만 오성(悟性)과 근성(根性)이 뛰어났던 김재석이 일본으로 바둑 유학을 떠난 것이다. 당시 일본에서 뿌리를 내리고 있던 그의 형들은 그 동안 백방으로 김재석의 도일을 추진해 왔다. 그들이 김재석을 불러들인 이유는 이러했다.

현대 바둑의 본맥(本脈)은 일본이다.

객관적으로 보면 분명히 일리 있는 주장이었다. 바둑을 공부하는 사람으로서 장래성, 즉 세인들의 인식, 사회 구조, 장성한 후 필히 고려되어야 할 생활 근거 등 모든 여건에서 한국은 일본에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낙후되어 있었다.

한때는 열 명 이상의 문하생을 두고 바둑을 가르쳤던 설숙도장은 일제 말기의 참혹한 수난기를 겪으며 문하생들이 많이 줄어들었다. 김재석은 설숙 스승에게 도일의 뜻을 밝혔고 설숙은 한 점의 미련도 없이 그를 놓아 주었다.

동삼이 설숙도장에 돌아온 후에도 쉽게 문하에 들지 못한 이유는 설숙의 무관심 때문이었다. 그는 동삼이 도장을 말없이 떠났던 일에 대해서도, 그리고 스스로 다시 돌아온 사실에 대해서도 일체 언급이 없었다. 반년 동안 주위를 서성거려도, 어느 날인가 동삼이 다시 문하에 들었어도 오로지 침묵으로 일관했다.

동삼은 그것이 스승의 말없는 용서라 여기며 모든 잡념을 지워 버리고 바둑에만 전념했다.

해방 후의 그 긴 사회적 격동기도 설숙도장과는 무관했다. 좌익과 우익으로 갈라져 한 민족끼리 피 흘리며 싸워도, 신탁통치 찬성이니 반대니 온 나라가 시끄러워도 설숙도장은 그런 사회적 혼란에 초연했다. 그렇게 여름이 가고 가을이 가고 다시 겨울이 찾아왔다.

동삼은 명운에게 영원히 뛰어넘을 수 없는 벽을 느꼈다. 자신의 출신에 대한 갈등으로 도장을 떠나 있었던 탓도 있었지만 그 동안 명운은 더욱 몰라보게 발전해 있었다. 한 발 다가섰는가 하면 어느새 저만큼 앞서 가고 있었고, 다시 다가섰는가 싶으면 저 앞에서 넌지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동명관에서 내기바둑을 두며 형세를 보는 시야가 다소 넓어졌다곤 하나 한계가 있었다. 역시 바둑은 정식으로 도장에서 수업을 닦는 것이 지름길이었다.

차츰 동삼은 지치기 시작했다. 추격해야 할 상대가 있다는 사실은 통상 약이 되곤 하지만, 그 상대보다 배에 가까운 노력을 하는데도 불구하고 간격이 좁혀지지 않으면 그것으로 인해 마음은 병이 드는 법이다.

동삼만 지쳐 가는 게 아니었다. 같은 동문인 유민재는 명운으로 인해 아예 좌절에 빠져 있었다.

느닷없이 방문이 덜컥 열렸다. 어지간해서 동삼의 방을 찾은 적이 없는 민재가 안으로 들어섰다. 불빛을 등진 민재의 얼굴은 어두웠다. 민재는 바둑판 위에 즐비한 돌과 동삼의 손에 들린 기보를 보고 냉소를 지었다.

「공부는 해서 뭐하나? 자네나 나나 죽으라고 애써도 쫓아갈 수 없어.」

유민재의 그 말은 명운을 지칭했다.

그 즈음 명운은 도장의 문하생들 중 명실상부한 일인자였다. 호선으로는 상대할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그날 오후 민재는 명운에게 선으로 두어 참패했다. 어떻게 하든 명운을 이겨 보고자 발버둥친 민재는 오히려 무리수를 남발했고 결과는 늘상 그렇듯 명운의 완승이었다.

처음에는 땀을 줄줄 흘리며 버티다가 중반을 넘어서자 오기도 독기도 다 빠지고, 완전히 탈진하여 허탈한 모습으로 바둑판을 내려다보던 유민재. 혼신의 힘을 다해 봤건만 승부의 근처에도 못 가 보고 남은 건 치욕스런 패배였다. 판 앞에 쭈그리고 앉아 있는 유민재의 모습은 같은 동문들이 보기에도 딱했다.

동삼도 그의 말마따나 아무리 애를 써도 이길 수 없는 상대가 있음을 절감하고 있었다. 도장으로 다시 돌아온 지도 1년여의 세월이 흘렀건만 정명운에 대한 치수는 움직일 줄 몰랐고 뒤쫓아가는 자신의 마음은 절망으로 가득했다.

유민재 역시 과거엔 선으로 버티던 바둑이 근자에 와서 선으로 일방적으로 밀렸다.

「자네 영조 시대의 국수 최칠칠(崔七七)이 애꾸된 사연을 알고 있지?」

동삼은 민재가 거론하는 주정뱅이 국수 최칠칠에 대해서 익히 알고 있었다.

최칠칠의 본명은 최북(崔北)인데 북자를 파자(破字)한 칠칠(七七)로 이름을 쓰는 괴이한 사람이었다. 그는 뛰어난 화가로서 하경산수도(夏景山水圖), 관폭도(觀瀑圖) 등을 남겼지만 그보다는 주정뱅이 국수로서 더욱 이름이 높았다. 그의 주량은 당대에 필적할 사람이 없었고 바둑은 당대에 대적할 사람이 없었다.

대부분의 호주가들이 그렇듯 최칠칠은 철저하게 술로 자신을 소진시켰다. 게다가 방약무인하기까지 하였으니, 그 때문에 그는 평생을 방랑 기객으로 떠돌아다녔다.

대군과 바둑을 두면서 대군이 한 수만 물러 달라고 애걸하자 일수불퇴라며 매정하게 거절했던 인물. 바둑에 대한 기개가 칼날처럼 시퍼랬던 그가 애꾸가 된 사연은 이랬다.

그는 평소에 스스로 악수를 두었을 때마다,

「이런 악수를 두다니 내 눈이 썩었지!」

하고 탄식하며 눈을 원망하는 버릇이 있었다. 어느 날 취중에 그는 자신의 눈을 원망하다가 급기야는 제 손으로 눈을 후벼파고 말았다. 무적의 국수라고 알려져 왔지만 그와 기예를 다툴 인물이 전혀 없지는 않았던 모양이었다.

「그가 눈을 후벼팠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아.」

「…….」

민재는 신산스러운 얼굴로 단 두 마디 말을 남기고 제 방으로 돌아갔다. 동삼은 쓸쓸히 방을 나서는 그에게 아무런 위로의 말을 할 수 없었다. 동삼은 자신과 비슷한 고통을 받고 있는 민재에게 늘 인간적인 연민을 가지고 있었으나 그렇다고 동문의 가슴속에 웅크리고 있는 승부의 그늘을 어찌해 볼 도리는 없었다.

어차피 승부사들에겐 적고 많음의 차이는 있겠지만 누구나 감당해야 할 그늘이 있게 마련이고 그 패배의 기억들이야말로 생각하기에 따라 보다 진정한 승부사로 가는 데 있어 필요 불가결한 요소가 아닌가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 모르나 자신도 답답하기는 매일반이었다. 다만 동삼의 입장에선 뒤늦은 입문과 지난번의 외도로 스스로를 변명할 수 있는 구실이라도 있었으나 민재의 경우는 달랐다. 명운과 비슷한 시기에 입문해 동일한 양의 수업을 닦았기에 그 충격의 아픔은 동삼에 비해 한층 더 깊었다.

동삼은 오래 전부터 민재가 설숙 스승에 대한 깊은 애증으로 시달려 왔음을 짐작하고 있었다. 민재는 설숙 스승이 가장 아끼는 제자인 명운을 꺾는 게 목표였다. 그리하여 스승으로부터 고통으로 얼룩진 애증의 긴 세월을 보상받고 싶었다.

민재는 실상 설숙 스승으로부터 거절당한 제자였다.

경기도 광주(廣州)가 고향인 민재의 집안은 손이 귀한 게 흠이었으나 대제학을 두 명이나 배출한 명망 높은 가문이었다.

민재의 아버지는 양반가 법도에 따라 허약한 몸으로 고집스럽게 선친의 3년 상 시묘살이를 하던 중 병을 얻어 시름시름 앓았다. 민재가 여섯 살 나던 해 그는 부인 서씨의 헌신적인 보살핌에도 불구하고 결국 세상을 떠났다.

동네에서는 조상의 묘자리를 잘못 써서 그렇다느니, 서씨 부인 팔자가 드세어서 시아버지와 서방을 잡아먹었다느니 온갖 흉측한 소문이 나돌았다. 여염집 여자로서는 보기 드문 미모를 지닌 서씨 부인을 헐뜯기 위한 악의에 찬 모함도 다분히 섞여 있었다. 견디다 못해 서 여인은 탈상을 하자마자 전답을 정리하고 고향을 떠났다.

청상이 된 서 여인과 유민재가 필동 도장 근처로 이사를 온 것은 9년 전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