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상남은 4승 6패로 이미 탈락일 뿐 아니라 시드에도 남을 수 없어 큰 의욕 없이 나머지 한 판을 두게 되었다.

상대편 대국자 강명선이 조용히 고상남을 불렀다. 강명선은 8승 2패로 막판을 이기면 입단에 절대적으로 유리한 입장에 있었다. 강명선은 고상남에게 그 판을 져 주면 50만 원을 주겠다고 제의했다. 입단도 시드도 다 잃어버린 고상남으로서는 굳이 거절할 이유가 없어 그러마고 약속을 했다.

마지막 판이 시작되었다. 초반부터 눈에 띄게 짜고 두는 느낌을 줄 수 없기 때문에 그런 대로 최선을 다해 판을 짜 나갔다. 바둑이 중반전에 접어들었다. 현역기사인 심판장의 눈을 피해 고상남이 돈을 달라고 채근을 했지만 자기의 판세가 유리하다고 판단했는지, 돈이 아까웠는지는 몰라도 강명선은 자꾸 회피하면서 ‘두고 나서 봅시다.’ 하고 발뺌을 했다.

고상남은 사실 50만 원은 고사하고 10만 원 정도 차비만 줘도 져 주려고 했었다. 그런데 준다 준다 애를 태우면서 강명선이 돈을 안 주는 바람에 고상남은 슬슬 약이 올랐다. 강명선의 행위에 인간적인 배신감마저 들었다. 약발을 받은 고상남은 판을 빡빡하게 짜 나갔다.

「어이, 강형! 사람 이런 식으로 대접할 수 있나?」

고상남이 핏대를 올렸다. 자신이 유리하다고 판단했던 강명선이 어물어물 발뺌을 했다.

「에이, 그냥 바둑이나 둡시다. 아까 일은 없었던 걸로 하고…….」

화가 나서 씩씩거리던 고상남이 화장실에 갔을 때였다. 누가 고상남의 어깨를 툭 쳤다. 돌아보니 다른 쪽에서 동시 대국을 하고 있던 박원하의 형이었다. 그는 고상남에게 30만 원을 건네 주며 만약 강명선을 잡아 주면 그 돈을 그대로 줄 뿐 아니라, 강명선을 잡아 준 덕분에 박원하가 입단을 하게 되면 그 돈을 포함해서 100만 원을 채워 주겠다고 약속했다. 물론 강명선에게 고상남이 지면 30만 원을 되돌려 주기로 했다.

「박원하는 그때 7승 3패였고, 그와 두는 김명수는 8승 2패였지. 알다시피 두 장의 티켓 중에 한 장은 10승 1패로 이미 바둑을 마감한 유인석이가 가져갔고 나머지 한 장이 문제였어. 내가 강명선을 잡아 줘야 강명선이 8승 3패. 박원하도 어느 정도 승부의 윤곽이 드러나 있었는데, 김명수에게 이기면 8승 3패. 자기에게 진다는 가정하에 김명수도 8승 3패. 결국 3자 동률로 재대국을 가져야 되지.

그런데 내가 강명선에게 지면 강명선은 9승 2패가 되니까 자기 입장에서는 오히려 김명수를 밀어 줘야 할 입장에 있는 거야. 어차피 시드에는 남고 자기와 친분이 있는 김명수를 밀어 주는 게 백번 낫다고 생각하고 있었지. 원래 강명선이란 그 친구 다른 데 가서도 싸가지가 없이 놀잖아.

그렇게 되니 박원하 입장에서는 미치겠는 거라. 결국 자기가 이겨 봐야 강명선이만 입단하게 되니. 남 좋은 일만 시켜 주게 되고 옆의 판을 볼 수가 없으니 이겼는지 졌는지, 혹은 어느 쪽이 유리한지 확인할 수도 없고 그야말로 환장할 지경이었지. 바둑은 끝나 가는데 김명수를 밀어 줘야 할지 그냥 닦아 버려야 할지. 그런데 우리 쪽 표정을 보니까 뭔가 합의가 안 된 얼굴이었거든? 격려차 와 있던 형에게 그런 상황을 설명했고, 형을 통해 나에게 제안을 해 온 거야.」

「그러니까 고형이 강명선을 잡아 줘야 실낱 같은 희망이라도 생긴다는 건데 희망의 대가로 30만 원이라, 박원하 입장에선 과감한 투자군. 그래서?」

「그래서는 뭘 그래서야. 안 그래도 강명선이 밉던 차에 냉큼 30만 원을 받아 들었지. 그리고 강명선을 끝까지 물고 늘어져 반 집으로 비틀어 버렸지.」

「그렇게 된 거구나…….」

민수가 혀를 끌끌 찼다.

「아무튼 결과는 예상대로 세 명이 다 8승 3패가 되어 동률 재대국을 벌이게 되었는데 내일이나 돼야 결과가 어느 정도 드러날 테니까 두고 봐야지. 잘하면 공돈 70만 원이 다시 생길지도 몰라. 두고 봐야겠지만 박원하는 나와 흥정을 잘한 덕분에 극적으로 입단하게 될지도 모르고. 강명선은 약속을 지키지 않았기에 일단 힘들게 또 승부를 해야겠지. 강명선 그 친구 지금쯤 땅을 치고 있을 거야. 약속을 지키기만 했어도 부담이 훨씬 적었을 텐데, 지금 심정으로 어디 바둑이나 제대로 되겠어? 바보 같은 사람, 차비라도 얼마 내놓을 일이지.」

다음날 벌어진 동률 재대국에서 충격을 받은 강명선은 두 판을 내리 졌다. 입단할 수 있는 유일한 기회를 순간적인 판단 착오로 날려 버린 강명선은 그 후 영원히 꿈에도 그리던 프로기사가 되지 못했다. 반면에 박원하는 동률 재대국에서 승리함으로써 염원하던 프로기사가 되어 지금까지도 심심찮게 승률을 올리고 있다.

박원하. 내기바둑꾼이었던 박원하는 입단을 한 후에 승단도 하지 않고 떠돌이 낭인의 냄새를 물씬 풍기면서 고단자 킬러로 한때 명성이 자자했다. 같은 해 입단했던 유인석은 승승장구, 지금은 각종 세계 대회에서도 두각을 나타낼 정도로 성장했지만 박원하는 밀려드는 신진 세력에 쫓겨 지금은 서서히 무대 뒤편으로 사라져 가고 있다.

고상남은 입단하면 주겠다던 박원하의 70만 원을 끝내 받지 못했다. 고상남은 한일기원에 들를 때마다 박원하를 만나면 70만 원에 대해 추궁했다. 소문엔 20년 가까이 흐른 지금도 박원하는 고상남을 먼 발치에서만 발견해도 고양이를 만난 쥐처럼 슬금슬금 피해 다닌다고 한다.

욕심과 약속이 무엇인가를 생각케 하는,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웃음을 머금게 하는 사건이었다.

어쨌든 뜻밖에 생긴 공돈으로 기분 좋게 술을 산 고상남은 술을 마시고 남은 돈으로 잔잔한 내기바둑이나 한 번 두어야겠다며 민수를 끌고 청계천의 한 여관으로 찾아들었다.

전자상가 뒷길을 따라 좁은 골목으로 들어서자 막다른 곳에 허름한 구식 여관이 나타났다. 구접스럽기까지 한 좁은 마당을 돌아서니 뒤채가 나왔다. 삐걱거리는 나무 계단을 올라간 두 사람은 2층 방문을 열고 들어섰다.

방 안에는 대국이 한창이었다. 너댓 평 정도 되어 보이는 넓은 방에는 많은 사람들이 편을 나누어 승부를 하고 있었다. 일반 기원에서는 잘 찾아보기 힘든 광경이었다. 고상남은 그 안에 있는 대다수의 사람들과 안면이 있었다.

자리에 앉자마자 고상남은 어떤 사람을 상대로 선을 접고 내기바둑을 두기 시작했다.

20여 수가 진행되었을까. 민수가 주위를 휘둘러보는데 방 한쪽 구석에서 술을 마시고 있는 사람들 중, 한 사내의 모습이 민수의 시야에 들어왔다. 사내를 보자 민수는 흠칫했다.

어디서 본 듯한 얼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