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는 세상에 드문 기재인데 왜 자식은 그렇질 못했습니까?」

박 화백이 불쑥 질문을 던졌다. 막상 묻고 나니 스스로 생각해도 어이없을 만큼 바보 같은 질문이었다.

「글쎄…… 과연 동삼에게 기재가 없었을까? 또 설사 그렇다 한들 아버지가 대단한 기재였다고 자식 또한 뛰어나란 법이 있는가.」

박 화백은 해봉처사의 그 말에 수긍이 갔다. 실상 자신의 아들 경우만 해도 중학생이 된 지금까지 전혀 그림에 대한 자질을 발견할 수 없었다.

「기재란 도대체 무엇입니까?」

「씨앗과 같은 거지.」

「…….」

「같은 조건 아래에선 질 좋은 씨앗이 탐스런 열매를 맺는다는 건 불문가지일세. 설사 조금 악조건이라 하더라도 지나치게 극단적인 상황만 아니면 질 좋은 씨앗이 좋은 토양에서 자란 질 나쁜 씨앗보다 훨씬 나은 열매를 맺을 수 있네.」

박 화백은 해봉처사의 대답이야말로 기재에 대한 명쾌한 답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유사 이래로 이 땅을 명멸해 간 얼마나 많은 사람이 뛰어난 기재임에도 불구하고 버려진 채로 시들어 갔겠나.」

굳이 사회적으로 드러난 사람을 거론할 것도 없이 박 화백의 기억 속에도 그런 사람이 많이 있었다. 현재 6단의 중견 기사로 틈틈이 신문 기전 본선에 올라 꾸준히 성적을 올리는 이상엽 기사를 TV나 신문에서 접할 때마다 연상되는 인물이 한 명 있었다.

그의 기억 속에서 씁쓸한 느낌으로 남아 있는 허인이라는 후배였다.

박 화백이 이상엽과 허인을 처음 만났을 때는 군을 제대한 직후였다.

집안 형편이 어려워 복학도 뒤로 미룬 채 갈피를 못 잡고 이 기원 저 기원 떠돌아다니며 되는 대로 살아갈 그 무렵이었다. 그림에 대한 열정이 완전히 식어 버린 것은 아니었지만 자신의 불확실한 미래 때문에 정상적인 사회 구성원의 복귀를 뒤로 미룬 채 그저 목적 없이 흔들거리며 하루하루를 기원에 들락거리고 있었다. 그때 즐겨 찾던 기원 중의 하나가 변두리 남도(南道)기원이었는데 거기서 박 화백은 이상엽과 허인을 만났다.

당시 이상엽과 허인은 같은 고등학교 2학년 학생으로서 둘 다 공부보다는 바둑에 빠져 있었다. 지금은 바둑 인구가 늘고 인식이 좋아졌기 때문에 덜 어색한 편이지만 그 당시만 하더라도 학생이 기원을 출입하는 것은 드문 일이었다. 더구나 잔잔한 내기로 야통을 밥 먹듯 하는 변두리 기원은 말할 것도 없었다.

이상엽은 당시 2급 정도의 실력이었고 허인은 5급 정도의 기력이었다. 이상엽은 남자다운 얼굴에 체격이 튼튼했지만 허인은 약간 여성적인 예쁘장한 용모에 몸이 약해 보여 서로 묘한 대조를 이뤘다.

비록 변두리 기원이었지만 남도기원 원장인 송 원장은 쟁쟁한 아마 강자였다. 두 학생의 바둑에 대한 열기와 뛰어난 기재에 끌린 송 원장은 매일 출근하다시피 방과 후면 기원부터 찾는 그들에게 성심성의껏 지도를 해주었고 민수 또한 틈틈이 그들을 지도했다.

이상엽의 재주도 뛰어났지만 허인의 기재는 탄복할 지경이었다. 불과 1년도 안 돼 이상엽은 원장과 호선으로 승부를 점칠 수 없을 만큼 성장했고 허인은 오히려 원장이 호선으로 압박감을 느낄 정도로까지 기력이 향상되어 있었다. 원장은 그런 그들에게 좀더 공부를 열심히 해서 전문기사의 길을 갈 것을 여러 차례 권유했다. 원장과 민수가 은근히 더 기대를 가진 쪽은 허인이었다.

문제는 엉뚱한 데서 비롯됐다. 학교를 졸업한 허인은 어느샌가 떠돌이 독립군이며 전형적인 양아치인 서병석이라는 사람과 어울려 다니고 있었다. 기원 생활을 오래 한 원장과 민수는 그런 허인이 안타까워 노골적으로 서병석이 질 좋지 않은 부류임을 강조하며 그와의 관계를 끊으라고 종용했다. 그러나 허인은 원장과 민수의 충고를 멀리했다.

「병석이 형 정말 좋은 사람이에요. 저는 원장님과 선배님이 그런 말씀하시는 걸 이해할 수 없습니다. 보십시오. 세상에 병석이 형처럼 남자답고 의리가 있고 또 대인 관계까지 좋은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그렇게까지 이야기하는 데야 어찌해 볼 도리가 없었다. 불행하게도 허인은 자신이 가지지 못한 점, 남자답고 의리가 있어 보이는 서병석에게 어떤 동경을 느끼고 있었다. 그 후에도 미련을 못 버린 원장과 민수는 몇 차례 더 허인을 만류해 보았지만 허인의 마음은 이미 돌이킬 수가 없었다.

허인은 원장과 민수가 모르는 사이에 어느새 서병석의 꼬임에 빠져 내기바둑에 깊숙이 개입하고 있었다.

세월이 흐른 뒤 민수는 입단 대회에서 우연히 허인을 만났다. 꾸준히 바둑 공부에 정진해 온 이상엽이 입단한 지 3년의 시간이 지난 후였다.

뜻밖에도 허인은 민수를 못 본 척했다. 민수는 섭섭한 마음을 감추지 못하고 허인을 불러 세웠다.

「어이, 허인. 너 오랜만에 선배를 보고도 못 본 척하기냐?」

민수를 대면한 허인이 마지못해 아는 척을 했다.

「안녕하십니까, 선배님.」

인사를 하기가 무섭게 허인은 그 자리를 벗어나려 했다.

돌아서 가려는 그를 다시 불러 세운 뒤 민수는 허인을 호되게 나무랐다.

「야, 이 덜된 친구야. 너 참 형편없이 변했구나. 그게 몇 년 만에 만난 선배를 대하는 태도냐! 사람이 기본은 있어야지. 듣자 하니 내기바둑으로 돈 좀 만진다고 하더니 자네 아주 못쓰게 되었구나!」

민수가 화를 내도 허인은 딴전만 피웠다.

「너 앞으로 날 보면 아는 척하지 마라.」

민수는 딱 잘라서 말한 후 돌아섰다. 참으로 어이가 없는 만남이었다.

몇 년 전 박 화백은 또다시 우연히 서울 한 호텔 사우나에서 허인을 만났다. 박 화백은 그때의 기억이 되살아나 허인을 못 본 척했다. 이번에는 허인이 박 화백에게 접근해 왔다.

「선배님, 안녕하십니까.」

「누구시더라.」

박 화백이 불쾌했던 기억 때문에 모르는 척하자 허인은 막무가내로 박 화백에게 자신을 설명했다. 허인은 어딘가 모르게 이상했다.

「에이, 선배님 왜 그러십니까. 저 허인입니다, 허인. 과거에 선배님에게 바둑 배웠던…… 왜 모른 척하십니까.」

박 화백은 마지못해 인사를 받았다.

「아, 그래 허인. 요즘 어떻게 지내나?」

허인은 확실히 이상하게 변해 있었다. 전에 없이 말이 많아졌고 말의 내용도 들쑥날쑥 두서 없이 혼란스러웠다. 정신과 의사의 입장에서 보면 영락없는 정서 불안이었다.

그는 쉴 새 없이 떠벌렸다. 한 판에 1억짜리 내기바둑을 두었다는 둥, 전주가 자신을 쾌락에 길들이기 위해서 술에 마약을 타서 먹게 했다는 둥, 자신 때문에 알거지가 된 사람들이 꿈에 보여서 술 없이는 잠을 잘 수가 없다는 둥, 쉴 새 없이 자신의 말만 늘어놓았다. 그러고 보니 허인과 그 전주 때문에 파산한 사람들이 수도 없이 많다는 소문을 들은 기억이 났다.

쓸데없는 이야기를 듣느라고 지친 박 화백이 허인에게 물었다.

「요새 상엽이 한 번씩 보나? 상당히 친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감정을 조절하는 나사가 풀린 사람처럼 허인은 그 물음에 키득키득 웃어 댔다.

「우리 같은 내기바둑꾼이 그런 사람 뭐하려고 봅니까. 아직도 내기바둑으로 붙으면 상엽이쯤은 자신 있지만…….」

처음으로 그의 얼굴에 인간다운 심지가 돋았다.

「그 친구야말로 제대로 제 갈 길 찾아간 거죠……. 나도 이 길로 안 빠졌으면 그 친구처럼 될 수 있었는데…….」

허인이야말로 내기바둑꾼의 전형적인 행로를 걷는 인물이었다.

어릴 때 약하고 여린 심성을 가진 사람이 길을 한번 잘못 들면 걷잡을 수 없이 타락의 길로 빠져 버리고 만다. 죄는 죄대로 짓고, 결국 자신도 돌이킬 수 없는 폐인이 되어 버리는 것이다. 반면에 의외로 어릴 적에 다른 사람 눈엔 좀 거칠게 보이고 난폭해 보이는 사람이 허인과 같은 성격을 가진 사람보다 나이 들어 제 갈 길을 찾아 열심히 살아가는 경우가 훨씬 그 빈도가 높다.
허인은 기재가 있었으나 토양을 잘못 만난 대표적인 경우였다. 더불어 허인에게 있어 바둑의 기재는 오히려 자신의 삶을 망치는 재주였다.

호텔을 나서며 박 화백은 한동안 씁쓸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