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봉화에 갔을 때는 스승님과 동삼의 갈등이 깊을 대로 깊어 있었지…….」

해봉처사가 그 당시를 회상하는지 지그시 눈을 감는다.

「그때의 광경이 지금도 선명하게 떠오르는군. 아침 저녁으로 제법 선선한 바람이 불던 가을 초입이었네. 오랜 전쟁으로 인해 나는 많이 지쳐 있었네. 그러나 그보다 더한 건 동족상잔의 비극이 뿌린 마음의 상처였네. 전쟁이 끝난 지 1년이 넘도록 그 떠도는 영혼들의 고통스런 얼굴들이 밤마다 떠올랐다네. 그대로 속세를 떠나 중이 되고 싶었네. 그래서 그 영령들을 달래 주려 했다네. 마지막으로 한 번만 스승님을 찾아뵙고 절로 들어가려고 봉화를 찾았었는데…… 그만 발이 묶이고 말았지.」

「…….」

「스승님은 마당에 서서 멀리 서산으로 지는 낙조를 바라보고 계셨네. 그 모습이 너무나 쓸쓸해 보여 가슴이 미어질 것 같았네.」

「어째서 그렇게 쓸쓸하다고 느꼈습니까?」

「모르겠네. 그저 내 가슴에 그렇게 와 닿았네. 오랜 세월 뒤에 가만히 생각해 보니 그건 스승님의 치유될 수 없는 상실감이었네. 그렇게 일생을 노력해 왔음에도 불구하고 기도(碁道)의 정점에 다다르지 못했고, 여목 대스승으로부터 물려받은 도장을 제대로 지켜 내지 못했다는 자괴감…….」

최해수가 고가로 돌아온 이후 최해수의 끝없는 노력에도 불구하고 설숙과 동삼의 간격은 조금도 좁혀지지 않았다. 설숙은 한사코 동삼에게 냉담했으며 동삼은 동삼대로 스승과의 대화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과의 교분도 일체 삼가했다.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혼자 호롱불을 밝혀 놓고 자기 혼자 기예를 연마했다.

그렇게 가을이 깊어 갈 무렵 이번에는 정명운이 고가로 찾아 들었다. 전쟁으로 인한 피해는 별로 없었던지 건강한 모습이었고 예전과 다름없이 부유해 보였다.

비록 집이 염려되어 그랬다고는 하나 명운은 엄연히 그 위급한 상황에서 스승을 떠난 사람이었다. 그러나 설숙은 그 모든 것을 잊었는지, 아니면 애초부터 섭섭하게 생각해 본 바가 없었는지 주위 사람들이 확연하게 느낄 정도로 명운을 반겼다.

「왔느냐?」

설숙은 허겁지겁 신발을 신고 마당까지 내려가 명운을 맞았다. 명운을 바라보는 설숙의 얼굴은 너무나 흡족했다.

스승의 기뻐하는 모습을 보자 동삼의 마음은 더 무거웠다. 스승 밑에 있으면서 자신은 한 번도 그와 같이 밝은 스승의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동삼은 점점 더 말을 잃어 갔다.

명운이 꽤 큰돈을 가져왔기에 동삼이 더 이상 들일을 나갈 필요가 없었는데도 동삼은 일을 계속했다. 최해수가 몇 번 말려 보기도 했지만 동삼은 일을 그만두지 않았다.

도장은 다시 동삼이 처음 입문하던 옛날 필동에서의 상황으로 되돌아갔다. 동삼은 부목이 되어 하루 종일 일만 했고 정명운을 비롯한 다른 동문들은 설숙의 가르침에 따라 하루하루 기도 탐구에 열과 성의를 다했다.

설숙은 동삼의 일상에 대해 결코 한마디 언급이 없었다. 마침내 최해수마저 두 사제간의 갈등을 해소해 보려는 노력을 포기하고 말았다. 그리고 도장은 완전히 옛날의 활기를 되찾았다.

정명운이 돌아왔던 그 해 겨울. 해방 전 일본으로 유학 갔던 김재석이 당당히 일본기원 소속의 전문기사가 되어 동료 기사 두 명을 데리고 도장을 찾아왔다.

오랜만에 만난 동문들끼리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 김재석은 곧장 설숙 스승에게 달려가 큰절을 올렸다.

「그래, 일본에서 바둑 공부는 열심히 하느냐?」

「예. 스승님으로부터 받은 가르침에 힘입어 몇 년 전 입단하여 지금은 4단에 올랐습니다.」

뒤이어 김재석은 자신과 같이 온 두 사람을 설숙 스승에게 인사를 시켰다.

「여기 계신 이분은 시마즈(島津)상이라고 지금 일본기원 5단의 가장 촉망받는 기사입니다.」

김재석이 소개한 20대 후반의 사내는 머쓱한지 안경테를 만지작거린다. 김재석은 또 다른 일행인, 앞서 거명한 사내보다 몇 살 더 들어 보이는 근엄한 표정을 짓고 있는 사내를 다시 소개했다.

「이분은 일본기원 7단의 고단 기사 아카기(赤木) 선생입니다. 개인적으로 저에게 많은 도움을 주셨고 현재 일본에서 오청원, 기다니, 하시모도 같은 최정상급 기사들의 뒤를 잇는 차세대 선두주자에 속합니다. 다까가와, 사까다 선생 등과 함께 전 국민의 주목을 받고 계시지요. 지금 본인방, 왕좌전 등 3대 기전 본선에서 맹활약중이십니다. 이번에 제가 한국에 들른다고 하자 스승님께 인사나 드릴까 하고 저와 같이 동행해 주셨습니다.」

두 사람은 앉은 자리에서 설숙에게 예의를 표한다.

「먼 길을 오시느라 수고가 많았소.」

「많은 지도 편달을 바랍니다. 한수 지도를 바라고 이역 만리까지 멀다 않고 찾아왔습니다.」

아카기가 내리뜬 눈을 치켜 뜨며 느닷없이 도전장을 내밀었다. 화기애애하던 분위기가 갑자기 심각해졌다. 그제서야 김재석이 도장을 방문한 목적을 정식으로 밝혔다.

「언젠가 제가 사석에서 이 도장을 언급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정명운, 유민재 등 기라성 같은 준재들의 집단이라고……. 그랬더니 이분들이 한번 그 기량을 겨뤄 보고 싶어했습니다. 그래서 오랫동안 벼르다가 이제서야 찾아뵙게 되었습니다.」

좁은 방 안에 팽팽한 긴장감이 돈다. 설숙이 아카기에게 차분히 말했다.

「가르쳐 주는 것은 좋지만 먼 길에 피곤할 테니 우선 쉬도록 하시오.」

「배려해 주심에 감사드립니다.」

아카기가 인사를 한 후 김재석을 돌아보았다.

「히가루(岡光), 이제 그만 나가세.」

아카기가 김재석을 데리고 나간다. 김재석이 일본인으로 귀화를 했는지 개명이 되었다.

「재석이 자네 일본에 귀화했나?」

최해수가 따라 나오며 김재석에게 정색을 하고 물었다. 김재석이 어물어물 답을 한다.

「그런 셈이죠.」

김재석과 그 일행이 마당을 가로질러 바깥채로 사라진다. 최해수가 사라지는 김재석의 뒤를 멍하니 바라본다.

동삼을 제외한 모든 문하생들은 결전의 날을 앞두고 숙의를 거듭했다. 주사위는 이미 던져졌다. 이제 남은 건 한국과 일본 양국간의 명예가 걸린 승부밖에 없었다.

비록 비공식적이지만 한국과 일본의 자존심을 건 승부는 아무도 모르는 한 산간벽지에서 벌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