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의 혼란이 가라앉을 무렵 고가엔 하나 둘씩 사람들이 찾아 들었다.

첫눈이 내린 겨울날, 초라한 행색의 한 청년이 고가를 찾아왔다.

「설숙 선생님 계십니까?」

마당에는 키가 훤칠하게 크고 잘생긴 청년이 서 있었다. 동삼과 비슷한 연배인데, 비록 차림새는 남루했지만 부리부리한 눈매, 당당한 행동거지가 범상치 않게 보이는 사내였다.

「실례지만 설숙 선생님 안에 계시오?」

「무슨 일로 오셨소?」

「오호라. 그대가 설숙 선생의 제자 되시는구만.」

말투가 니글니글하다. 동삼이 고개를 끄덕이며 묻는다.

「댁은 뉘시오?」

사내의 얼굴이 별안간 환해지며 빙글빙글 웃는다.

「반갑소이다. 나는 박갑수(朴甲修)라고 하오. 따지고 보면 우린 같은 동문이나 진배없소이다. 내 스승님 당호가 동설(冬雪)이오. 오는 길에 눈을 밟지 않으려 애먹었소이다.」

「……?」

「왜는 왜겠소. 스승님 당호가 동설 아니오. 겨울 눈. 그러니 제자 된 도리로 눈을 밟는 게 당최 스승님을 밟는 것 같아서…… 스승님이 노하면 눈 위에 미끄러져 허리가 삐끗, 장가도 못 간 놈이 신세 망칠 수도 있고…….」

박갑수가 쉴 새 없이 너스레를 떤다. 동삼이 그를 설숙 스승에게 데려간다.

박갑수는 서슴없이 스승의 방으로 들어간다. 문이 닫히고 절을 올리는지 잠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나고 이내 두 사람이 나누는 말소리가 들려 온다.

「그래 스승님께선 강녕하시더냐?」

「지난 여름에 타계하셨습니다. 생전에 술을 너무 즐기시더니 결국…….」

설숙이 크게 낭패한다.

「애석한 일이로다.」

「돌아가시기 전에 저더러 선생님을 찾아뵈라는 유언이 계셨습니다. 난리통에 필동 도장이 문을 닫았으면 아마 여기 계실 거라고.」

「문하가 자네뿐인가?」

「여러 명 있었으나 스승님께서 자리에 몸져눕고부터 모두 떠나 버렸습니다. 저 혼자 남아 스승님을 마지막까지 보필했습니다.」

박갑수가 침통해한다. 침통해하는 박갑수의 일면엔 스승을 끝까지 지켰다는 자랑스러움도 은근히 엿보인다.

「애썼다. 그래 그 분 문하에선 얼마나 수습하였더냐?」

「10년이 넘었습니다.」

설숙이 박갑수의 상을 본다.

「스승님과 동문이었던 김개원 선생님께선 동란중에 납북을 당했습니다.」

박갑수는 묻지도 않은 김개원의 소식을 전한다.

호방하고 자유분방했던 김개원이 북으로 끌려갔다는 소식에 동삼은 우울해진다. 아버지 평사의 기보를 보고 밤새도록 울던 그분의 모습이 새삼 떠오른다.

방 안에서는 더 이상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동삼은 고민스러웠다.

그냥 단순한 목적으로 찾아온 것 같지는 않고…… 어쩐다.

잠이야 방이 넉넉하고 땔감만 더 해 오면 별 문제가 없지만 문제는 양식이었다. 그렇찮아도 내년 봄 춘궁기를 넘길 일이 걱정인데 객식구까지 하나 더 늘게 될지 몰라 동삼은 마음이 어수선하다.

동삼의 걱정이 현실로 나타난다. 한참 후 스승의 방을 나온 박갑수가 싱글거리며 동삼에게 말한다.

「앞으로 잘해 봅시다.」

찾아오는 사람은 박갑수에 그치지 않았다.

얼마 후 또 한 사람의 청년이 고가를 찾았다. 이십 언저리의 청년은 들어서자마자 거두절미하고 설숙 스승을 찾았다.

「여기 설숙이라는 분 계시오?」

청년의 말투는 방약무인했다. 마침 동삼 옆에서 주절주절 쓰잘데없는 이야기를 지껄이던 박갑수가 나선다.

「왜 찾소?」

「설숙이라는 사람이 바둑을 꽤 잘 둔다길래 모처럼 머리나 식힐 겸 해서…….」

「머리를 식히다니?」

청년은 한번 헛기침을 하더니 잔뜩 거드름을 피운다.

「나 장이라 하오.」

「그런데?」

「안동(安東)에 가서 장승표(張乘表)라 하면 모르는 사람이 없소. 어릴 적부터 바둑 신동이 났다고 인근 지역에 소문이 자자했소이다. 그런고로 아직 입때까지 상대를 만나지 못했소. 듣자 하니 서울에 한일기원이 생겼답디다. 내 그곳으로 진출하기 전에 이곳 소문을 듣고 손이나 풀 겸 해서 들렀소.」

「손을!」

박갑수가 일부러 놀라는 척을 한다.

「그렇소 손이요」

「손을 다쳤소?」

「다친 게 아니고 풀겠다 그 말이오」

「아! 풀겠다…….」

박갑수의 표정이 제자리로 돌아오며 장을 꼬나 본다.

어디서 굴러온 개뼉다귀인가. 박갑수가 하품을 한다.

「뜻은 큰데…… 우선 거기 앉으시구랴. 온종일 상대가 없어 심심하던 차에 잘 왔소.」

장승표가 박갑수의 아래위를 훑어보며 계속 시건방을 떤다.

「나는 설숙인가 하는 사람을 찾아왔지, 당신 같은 수하를 찾아온 게 아니오.」

「날 이기면 어련히 알아서 스승님께 고해 올리지 않을까. 염려 꽉 붙들어 매시구려.」

장승표가 피식 웃는다.

「하긴 설숙인가 하는 사람을 만나기 전에 재미로 한 두어 판 두어 보는 것도 괜찮겠지.」

두 사람의 자존심을 건 대결이 시작되었다. 출발은 호선이었다.

다음해 봄농사를 위해 동삼이 밭에다 거름을 주고 돌아와 보니 어느새 장승표는 두 점을 놓고 두고 있었다. 식은 땀을 뻘뻘 흘리는 모양새가 그 판도 영 시원찮아 보였다. 얼핏 보니 거의 만방에 가깝게 장승표가 판을 망쳐 놓고 있었다.

오후 늦게 나무를 한 짐 해 온 동삼은 뜻밖의 광경을 목격하였다.

석 점으로도 내리 세 판, 도합 아홉 판을 처참하게 날아간 장승표가 박갑수 앞에 꿇어앉아 용서를 빌고 있었다. 그런 장승표를 앞에 두고 박갑수가 호통을 친다.

「모름지기 바둑이란 인의예지신을 겸비해야 한다 일렀거늘, 무엇을 일러 인이라 했는가. 바둑을 둘 때는 항상 어질 인(仁)자를 염두에 두고 승부에 임하라는 것이다. 어째서 어질 인을 염두에 두어야 하는가?」

박갑수의 설교는 호기롭다 못해 경탄스러웠다. 더욱 가관인 것은 앞뒤도 맞지 않는 그 말을 무슨 부처님 말씀이나 되는 듯이 장승표는 숙연하게 듣고 있었다.

「돌아가신 내 옛스승, 그 천의무봉한 바둑의 경지로 일세를 풍미하셨던 동설 스승께서 말씀하시길 바둑에 어진 기운이 없으면 인간된 도리를 모르는 백정과 같은 놈이라 하셨다. 반상의 법도가 그러하거늘 항차 네놈이 무엇이관대 마구잡이로 시비를 걸어 오느냐!」

장승표의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다.

「네가 우물 안 개구리라는 것을 이제야 알겠느냐?」

「예.」

눈물이 뚝뚝 떨어진다. 눈물을 보자 박갑수는 더욱 신이 나서 함부로 지껄이는데 자기 감정에 도취되어 본인도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모른다.

「바둑은 음양의 이치요, 수읽기와 형세 판단의 기예다. 흐르는 물처럼, 날아가는 새처럼 꽃이 피고 지는 자연의 법칙이다. 그곳에는 너도 없고 나도 없고 천지만물 모두가 없으니 이를 두고 무아의 경지라 한다.」

생전 듣도 보도 못한 희한한 설법이다.

박갑수의 앞뒤 없는 일장 훈시는 장장 한 시간이 넘었다. 생땀을 줄줄 흘리며 꿇어앉아 있던 장승표는 훈시가 끝나자 박갑수에게 애원한다.

「나도 이곳 형님 밑에서 바둑 공부를 할 수 있도록 해주십시오.」

형님이라 올려 호칭하며 장승표가 청을 하자 박갑수가 난처해한다. 박갑수가 보기에도 고가의 형편은 쪼들릴 대로 쪼들려 있었다. 눈치 빠른 장승표가 대충 분위기를 파악한다.

「저희 본가가 안동에서 알아주는 알부자외다. 내 월사금은 섭섭찮게 내겠습니다.」

박갑수의 얼굴에서 먹구름이 걷힌다. 하지만 그 말에 호락호락 넘어가 덥석 그러마 할 박갑수가 아니다.

「어허 이 사람이! 내 그만큼 누차 일렀거늘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고…… 돌아가신 내 옛스승, 그 일세의 바둑 선각자께서 무엇이라 가르침을 내렸다 했느냐?」

「무슨 말씀인지?」

「배움을 구하고자 하는 사람은 겸손해야 한다 하지 않았더냐. 그런데 재물을 앞세우다니…….」

장승표가 몸둘 바를 몰라한다. 박갑수는 동삼에게 한쪽 눈을 찡긋하더니 이번엔 어세를 누그러뜨려 장승표의 뒤를 후려친다.

「하지만 자네의 정성도 가긍하고, 여기 살림살이도 넉넉찮은 편이니, 배우고자 하는 사람의 갸륵한 정성으로 생각하고 고맙게 자네의 뜻을 받아들이겠네. 하지만 그 전에 스승님의 허락이 계셔야 할 것이네.」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나만 믿게. 스승님께선 내 말이라면 주무시다가도 벌떡 일어나시는 양반이니까.」

박갑수가 호언장담한다.

「고맙습니다.」

저렇게 큰소리만 치다가 거절당하면 어떻게 하나 하는 동삼의 우려와는 달리 장승표는 어렵잖게 설숙의 문하에 들었다. 정식으로 좋은 스승을 만나지 못해 그렇지 장승표의 기재는 탁월한 바가 있었다.

얼마 후, 비슷한 경로를 통해 또 한 사람의 제자가 입문했다. 전라도 고창(高敞)에서 올라온 김원준(金元俊)이라는 열여섯 먹은 소년이었다.

고가는 조금씩 옛 필동 도장의 모습을 되찾아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