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로부터 오래지 않아 동삼은 다시 도장을 나가 버렸네.」

박 화백은 어쩐지 추동삼의 그런 흔들림이 오히려 인간적인 모습으로 비춰졌다.

「설숙 스승은 왜 그리 추동삼씨에게 무관심했습니까?」

「…….」

「스승된 도리로 제자의 마음을 잡아 주어야만 하지 않았을까요?」

「스승이란 자리는 단순히 지식을 전달해 주는 위치가 아닐세. 제자들에게 삶의 지표를 보여 주는 하나의 상징이기도 하지. 그것은 말없는 그늘이고 삶의 울타리이기도 하네.」

담담한 해봉처사의 대답을 들으면서도 박 화백은 그 말에 선뜻 찬동할 수 없었다. 인간과 인간의 관계는 서로 공조함으로써 더욱더 빛이 나는 법인데 스승의 그 지나친 냉담은 쉽게 납득이 가지 않았다.

「그래서 추동삼씨는 영원히 설숙 스승과 헤어졌습니까?」

「아닐세. 어떤 면에선 동삼과 스승의 관계는 그때까지는 서막에 불과했네.」

「그럼 추동삼씨가 다시 도장으로 돌아왔습니까?」

「그렇다네.」

「어떻게 다시 돌아오게 되었습니까?」

해봉처사는 스르르 눈을 감으며 허연 수염을 쓸어 내렸다.

「전쟁 때문이었네.」

「전쟁이요?」

박 화백의 반문에 해봉처사가 눈을 떴다. 웬일인지 그의 눈에는 한풀 힘이 빠져 있었다.

「전쟁은 설숙도장의 모든 것을 뿌리째 뒤흔들었네. 당시 스승께서는 슬하의 두 딸을 모두 혼인시킨 후였는데 전쟁이 일어나기 몇 달 전 부인까지 잃고 혼자 되셨지. 막상 전쟁이 터지자 문하생들은 모두 뿔뿔이 흩어지고 스승 곁에는 나밖에 남은 사람이 없었다네.」

「정 국수님도 스승 곁을 떠나 버렸단 말입니까?」

해봉처사가 씁쓸하게 웃었다.

「그에게도 지키고 따라야 할 가족이 있으니까 어쩔 수 없었겠지. 아무튼 모두 떠나 버리고 스승과 나 단 둘이 짐을 꾸리고 있을 때 뜻밖에도 동삼이 나타났네. 햇빛에 검게 그을려 있었지만 건강한 모습이었네. 그 동안 세월 탓인지 청년이 다 되어 있더구만.」

「설숙 스승의 반응은 어땠습니까? 평소 그분 성격으로 보아 비록 전쟁 때문에 돌아왔다고 하지만 쉽게 받아들이긴 어려웠을 텐데요.」

해봉처사는 단호히 박 화백의 말을 부정했다.

「그렇지 않네. 스승님은 제자를 받아들이는 데는 까다로웠지만 일단 제자가 되고 나면 나가고 들어옴에 크게 간섭하지 않았다네. 여목 스승의 시대와는 달리 스승님의 시대야말로 극한 혼란의 시대였으니까. 스승님은 그런 시대적 상황을 충분히 감안하고 계셨네.」

「짐을 꾸려라.」

설숙이 동삼에게 한 말은 그뿐이었다.

전쟁이 터지자 피난민들의 물결로 서울은 아비규환에 빠져 있었다. 그 혼란의 와중에 도장으로 돌아온 동삼을 설숙은 조석으로 대하는 제자를 보듯 담담하게 일렀다.

동삼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바쁘게 짐을 싸는 최해수 외에는 아무도 없었다.

여기저기 내팽개쳐진 잡다한 물건들로 집안은 온통 어수선했다.

동삼은 서둘러 짐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난이 눈에 띄었다. 어지러운 속에서도 서가 한쪽에 놓인 난초는 푸르른 잎사귀를 늘어뜨린 채 싱싱하게 생명의 입김을 불어 내고 있었다.

다시 돌아올 때까지 저 난이 살아 있을까?

그 경황중에도 동삼은 그런 생각을 했다.

아무 것도 기약할 수 없는 피난길이었다. 동삼은 난을 바깥에 내놓고 서재에 있는 귀중한 기보와 서책들을 정리했다. 마지막으로 동삼은 벽송을 등에 지고 마당으로 내려왔다.

가까이에서 포성소리가 들려 왔다. 더 이상 머뭇거릴 시간이 없었다. 최해수가 어깨에 짐을 걸머지고 스승을 불렀다.

「스승님.」

설숙은 통한의 눈길로 도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스승 여목을 따라 도장으로 들어선 지 어언 40년. 수많은 사람들이 이 도장을 거쳐 나갔다. 그 얼굴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간다. 마음은 늘상 여목 스승의 가르침을 따라 꿋꿋하게 그 유지를 계승해 나가리라 다짐하곤 했지만, 돌이켜보면 스승의 뜻에 크게 부합되지 못했다. 그나마 지켜 오던 이곳을 쫓기듯 떠나야 한다는 사실에, 지나온 40년 세월이 한자락 봄처럼 덧없이 사라지는 것 같았다.

설숙은 아무 말 없이 돌아서서 발길을 옮기기 시작했다.

금방 다시 돌아올 수 있을 거라는 그들의 한가닥 희망은 결국 물거품이 되었다.

남으로 남으로 끝없이 내려온 피난길은 부산까지 이어졌다. 부산에서 피난 생활을 하던 중 최해수는 자원해서 군에 입대했다.

자신의 부친과 같이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했던 사람을 남포동에서 우연히 만난 최해수는 뜻밖에 그에게서 목말라하던 아버지의 소식을 들었다. 아버지는 꿈에도 그리던 해방을 미처 보지 못하고 광복되기 한 해 전 만주에서 광복군에 편입돼 관동군과의 교전에서 목숨을 잃었다.

아버지의 죽음으로 실의에 빠져 있던 최해수는 홀연히 자원 입대를 결심했다.

설숙은 떠나는 최해수를 그대로 두었다.

마침내 설숙과 동삼 둘만 남게 되었다.

그로부터 몇 개월 후 9·28 수복이 되자 동삼과 설숙은 도장으로 다시 돌아왔다.

하지만 필동 도장은 원소유자의 손에 이미 넘어가 버린 후였다.

원래 여목으로부터 설숙이 물려받은 도장은 거부인 인사동 한 바둑 애호가의 소유였다.

그의 자식들은 재산도 많았을 뿐더러, 아버지의 유지를 받들어 그 동안 한 번도 도장의 일에 간섭한 적이 없었다. 그러나 전쟁통에 서울은 이미 폐허로 변해 버렸고 도장의 원래 주인도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그들은 요행히 폭격을 피한 도장으로 거처를 정했다. 비록 선대의 유지가 있었다 하나 그들로서는 어쩔 수 없는 결정이었다. 설숙과 동삼은 졸지에 오갈 데 없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설숙이 그간의 사정을 설명하고 그들에게 양해를 구했으나 설숙의 뜻은 받아들여지지 못했고 결국 설숙과 동삼은 설숙의 향리인 봉화로 내려갔다.

고향은 황폐했다.

전쟁이 터지자 그 동안 설숙의 재산을 돌보던 아우는 그 많은 땅과 집을 헐값으로 처분해 버리고 사라졌다. 고향에 돌아온 설숙에게 남아 있는 재산이라고는 옛 본가에서 10리나 떨어진, 조부 소담이 학문을 닦았던 고가와 그 집에 딸린 텃밭이 전부였다.

당장 겨울을 넘기는 것이 급선무였다. 동삼은 고가에 짐을 풀자마자 일거리를 찾아 헤맸다.

봉화는 다른 곳에 비해 비교적 전쟁의 피해가 적었다. 언젠가 아버지 평사의 흔적을 더듬기 위해 꼭 한 번 찾아와 본 적이 있는, 어찌 보면 동삼과도 전혀 무관할 수 없는 곳이었다.

동삼은 우선 날품을 팔아 양식을 장만했다. 그리고 일거리가 없는 날은 산에 올라가 나무를 해 오고 텃밭을 일구어서 채마를 가꾸었다.

스승은 일체의 간섭이 없었다. 필동 도장에 있을 때와 마찬가지로 난과 서화에만 관심을 기울였다. 틈틈이 산에 올라 야생란을 캐어 와 화분에 옮겨 심고 가꾸는 것으로 낙을 삼았다.

스승은 여전히 제자에게 냉담했다. 동삼이 아침이면 서리를 밟고 나가 삯일로 파김치가 되어 돌아와도, 밤늦도록 산길을 헤매며 땔감을 해 날라도, 새벽이 다 되도록 혼자서 바둑 공부에 매달려 밤잠을 설쳐도 스승은 제자를 못 본 척했다. 기나긴 겨울이 되어 농한기 동안에는 두문불출한 채 동삼은 스승의 무관심엔 아랑곳없이 꾸준히 바둑책을 가까이했다.

동삼은 스승에게 바둑을 배우고 싶었다.

돌이켜보면 동삼이 정식으로 스승 밑에서 수업한 기간은 3년 남짓했다.

문하에 들기로는 7, 8 년이 되었고 도장에 처음 발을 들이민 시간까지 합하면 십수 년이 되었으나 그 대부분의 시간은 일에 매달리거나 바깥으로 나돌면서 보냈다.

이제 스승과 단 둘이 남게 되었다는 사실은 어떻게 보면 동삼이 스승을 단독으로 사사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그러나 동삼은 마음속으로는 치열하게 배우려는 욕구를 불태우면서도 한 번도 속마음을 스승에게 내비친 적이 없었다. 그러면서 항상 스승의 거동을 예의주시했다.

조석으로 스승과 마주칠 적마다 동삼은 무표정한 스승의 얼굴이 거북했다. 허기나 간신히 면할 허술한 밥상을 받으면서도 스승은 아무런 내색이 없었다. 스승은 아예 바둑을 잊어버린 듯했다. 요지부동인 스승을 대하면서 동삼은 갈등했다.

언제나 두 사람 사이엔 어색한 기운이 흘렀고 제각기 자신만의 생각에 골똘히 빠져 있었다. 그러한 가운데 세월은 어김없이 흘러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