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민재의 자살 후 동삼은 바둑에 회의를 느꼈다. 동삼은 명운과 대국을 하게 되면 원인 모를 증오심이 끓어올랐다. 동삼은 그를 무너뜨리기 위해 사력을 다했다. 유민재의 죽음이 그 자신의 심약한 기질 탓이라는 것은 자명하다. 그가 죽기 전 자신을 찾아왔을 때 따뜻한 말 한마디 없이 돌려보낸 것을 동삼은 후회했다.

동삼은 그를 죽음으로 몰고 간 명운의 번뜩이는 기재를 어떻게 하든지 꺾어 버리고 싶었다. 자연스레 동삼의 바둑에는 이제까지의 온후하고 견고한 기풍 대신 이기고자 몸부림치는 승부의 집착이 드러나 보였다.

설숙은 동삼과 명운의 바둑을 구경하다가 동삼의 기풍이 바뀐 것을 목격했다. 평소 두터움과 세력을 지향해 오던 동삼이었다. 바둑은 고수가 되어 갈수록 함부로 상대의 말을 건드리지 않는 법이다. 그런데 동삼은 초반부터 판을 난전으로 이끌더니 곳곳에서 시비를 걸어 어지럽게 짜 나가고 있었다. 평소의 동삼 바둑과는 달리 그의 바둑엔 살벌한 기운이 흐르고 있었다.

수읽기가 모자라는 하수가 저런 식으로 두다가는 스스로 자멸하는 법이거늘…….

한편으로는 그렇게 생각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이제까지 볼 수 없었던 동삼의 기운을 보고 가슴이 섬뜩했다. 동삼의 행마는 그 아비 추평사를 연상케 했다. 평사에게서 보았던 축축한 살기를 동삼에게서 느끼며 설숙은 이마를 찌푸린다.

근본적인 기량의 차이로 바둑은 동삼이 점점 불리해졌다. 중반을 넘어서자 형세는 도저히 손써 볼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 그러나 동삼은 끝까지 물고 늘어지며 여기저기 무리한 승부수를 띄웠다. 명운의 바둑은 약점이 없는 반면 동삼의 바둑은 곳곳이 허약한 데다 집으로도 근 10여 집 이상의 차이가 나 있었다.

설숙은 동삼의 태도가 정당하지 못하다고 여겼다.

「승부가 자명하지 않느냐!」

보다 못해 설숙이 동삼을 꾸짖었다.

평소 설숙은 대국중에 자리를 지키는 일이 드물었고, 설사 그 자리에 있더라도 문하생들의 대국에 관해선 일체 간섭이 없었다. 설숙의 이례적인 질타에 동삼의 얼굴이 곤혹스럽게 변했다. 조금은 표독스럽기조차 한 얼굴이 고개를 치켜들고 대꾸를 했다.

「좀더 두어 보겠습니다.」

갑자기 실내에 물을 끼얹은 것 같은 정적이 흘렀다. 상상조차 해 본 적이 없는 스승에 대한 반박으로 당사자인 동삼보다 다른 문하생들이 오히려 겁에 질린 표정이다.

동삼으로서는 평생 가야 제자들의 대국에 말이 없던 스승이 유독 자신을 몰아붙이자 불쑥 반발심이 생긴 것이었다.

「못난 놈!」

설숙이 노기충천하여 자리를 떴다.

그 일이 있은 후로 설숙은 동삼을 대할 때면 한층 더 냉담해졌고 동삼은 동삼대로 점차 바깥으로 나돌기 시작했다. 도장을 비우는 일이 잦았고 어떤 때는 저잣거리에서 아무하고나 바둑을 두며 날밤을 새웠다. 동삼의 생활은 점차 중심을 잃고 흔들렸다.

설숙은 그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 처음에는 유민재의 죽음으로 인한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이라고 이해하려 애썼다. 유민재의 자살은 설숙에게도 크나큰 충격이었다.

오래 전에 죽은 서 여인이 자꾸 생각났다. 골목길에서 늘 마주치곤 하던 서 여인.

지난 가을에도 들국화는 어김없이 피었다. 길을 가다 들국화만 보면 설숙은 가슴이 저릿했다.

유민재가 유서 한 장 남기지 않고 떠났지만 자살의 원인은 뚜렷했다. 애초에 그를 받아들이지 말 것을 하는 때늦은 후회가 들기도 했다. 동삼의 불성실한 태도를 그런 맥락에서 이해하려고 애썼다. 누구보다도 성실하게 공부를 하던 동삼이 아닌가.

그러나 동삼의 방황은 너무나 길었다. 자칫하다가는 여목 스승으로부터 내려온, 도장을 지탱하는 근본 축이 동삼으로 인해 뿌리째 흔들릴지 모른다는 불길한 생각이 들었다. 동삼의 방황은 길고 거칠었다. 스승의 가르침에 순종해야 할 제자된 몸으로 스승에게 대들기까지 했지 않은가. 동삼이 밤늦게 들어오는 걸 설숙은 벌써 여러 차례 보았다.

도저히 흔들리는 마음을 다잡을 수 없었던 동삼은 술에 잔뜩 취해 도장으로 돌아오는 날이 잦았다. 술에 취하면 동삼은 비로소 세상이 낙관적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상관 없어 어떻게든 되겠지.’

동삼은 쓰러질 듯 쓰러질 듯 방 앞으로 다가간다. 털썩 방문 앞 툇마루에 앉은 동삼은 막연히 하늘을 올려다본다. 깨알 같은 별들이 총총히 박힌 밤하늘이 빙글빙글 돌았다.

스승의 방엔 아직 불이 훤했다. 동삼이 비틀거리며 방으로 들어가는데 느닷없이 어둠 속에서 스승이 나타났다. 스승은 유민재가 목을 맨 뒤뜰을 돌아 나오고 있었다.
동삼은 간신히 몸을 일으켜 세운다. 정신은 멀쩡한데 몸이 따라 주질 않는다. 달아오른 취기 탓에 몸의 균형이 흔들린다. 바로 앞까지 다가온 스승은 흘깃 동삼을 쳐다보더니 아무런 말 없이 안채로 올라간다. 스승의 뒷모습은 완강하기만 하다. 철벽 같았다.

목이 마르다. 동삼은 흐느적흐느적 뒤뜰 우물가로 가서 샘물을 퍼 마신다. 물을 마셔도 갈증은 더 심해진다. 동삼은 바가지를 든 채 유민재가 목을 맨 나무를 올려다본다.

민재가 어두운 얼굴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동삼은 고개를 흔든다. 그러자 민재는 간 곳이 없고 나무 위로 밤바람이 분다. 모든 게 다 꿈만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