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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회] 13부 떨어지는 큰 별 (1)

2007-05 조회 3809추천 0 프린트｜스크랩

「추평사 선생의 바둑은 어땠습니까?」

다시 데운 물에 녹차를 우려내어 한 잔을 따르며 박 화백이 물었다.

「글쎄, 이미 오래 전 고인이 되신 분의 바둑을 후세 사람이 어떻게 함부로 평가하겠는가. 다만 그와 동문이었던 김개원 선생께서 말씀하신 바에 따르면 기이하게도 술과 여자 그리고 내기바둑에 탐닉하면서 오히려 바둑은 끈적끈적하고 잡초와 같은 끈질긴 기운이 배어 한 단계 올라선 것 같다는 말씀을 하셨네.」

박 화백은 선뜻 그 말에 찬동할 수가 없었다.

「기력을 증진시키기 위해선 바둑 공부 자체가 더 중요하지 않을까요?」

「꼭 그렇게 볼 수만은 없지. 옛날에 검으로 도의 뜻을 이루고자 하는 사람이 한 사람 있었네. 산에서 홀로 오직 일도정진 검의 수련을 한 지 십수 년 만에 나름대로 검의 뜻을 얻었다고 자부하여 하산을 하였지.

자신의 실력을 가늠해 보기 위해 이름 난 검사들에게 비무(比武)를 청하여 한 번도 지지 않았다네. 자신감을 얻은 그 사람은 당시 나라에서 제일 가는 검사를 상대로 다시 비무를 청했지. 절체절명의 승부에서 그 사람은 나라에서 제일 가는 검사와 비겼네.
그러나 엄밀히 말하면 그 사람이 졌네.
그는 머리칼이 한움큼 베였고 제일의 검사는 가슴께 옷이 베였으니까.

1년 후에 다시 만나서 승부를 겨루기로 하고 제일의 검사는 산으로 올라갔는데, 그 사람은 오히려 반대로 저잣거리로 내려왔어. 거기서 그 사람은 생선장수를 1년 동안 했다네.

사람들은 1년 후 대결에는 그 사람이 반드시 질 것이라고 했지. 온종일 검을 수련해도 이긴다고 장담하기 어려운데 한쪽은 산에서 불철주야 피 나는 연습만 하는데도 그 사람은 생선만 열심히 팔고 있었으니까. 1년 후 다시 맞붙은 대결에서 제일의 검사는 예상과는 달리 생선장수에게 일패도지하고 말았다네.」

「…….」

「사람들은 도가 멀리 있다고만 생각하네. 그러나 도는 의외로 가까운 곳에 있네.
백정들이 고기를 썰고 뼈를 바르는 동작 하나하나에도 검의 도가 있고 시금치 한 단을 정리하는 손끝에도 도가 있어. 단지 사람들은 그걸 모를 뿐이라네. 도는 일반 대중들이 사는 저잣거리에서도 충분히 깨칠 수 있네.」

「그런 식의 논리라면 산에 가서 도를 깨치기 위해 수도하는 모든 사람들은 공염불을 하는 게 아닙니까?」

「그건 아닐세. 산에서 공부하는 게 확실히 지름길은 지름길이지. 왜냐하면 잡다한 것에 방해받지 않고 일도정진할 수 있으니까. 그러나 대중들 속에 묻혀서 공부하는 게 더 효과적일 수도 있네. 다만 일순간도 화두를 놓지 않는 정심(定心)이 필요하네. 그것만 있다면 산이든 저잣거리든 차이가 있을 수 없어. 그런 면에서 볼 때 추평사 선생의 바둑은 철저하게 속세에 처해 있었지.」

박 화백은 해봉처사의 말을 곰곰이 새겨 본다.
거친 바람에 문짝이 쉴 새 없이 덜커덩거린다. 방안의 공기가 답답한지 해봉처사가 방문을 열어젖혔다.
깨알처럼 박혀 있는 뭇별을 가르고 유성 하나가 긴 꼬리를 그리며 떨어진다.

「낙성(落星)이라…….」

해봉처사가 긴 한숨을 토해 낸다.

여목도장에는 여목의 마지막 임종을 지켜보기 위해 자운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벽송을 앞에 두고 앉아 있는 여목의 모습은 생명의 모든 기운이 빠져 나간 허허로운 형상이었다.

「보를 벗겨라.」

여목의 말이 떨어지자 설숙이 벽송 위에 덮인 삼베보를 걷는다. 곧 쓰러질 것 같은 여목의 허리가 꼿꼿하게 펴진다.
여목은 감회에 젖어 벽송을 내려다본다.

대도를 중시했던 여목은 어떻게 하든 도장을 부흥시키고자 무진 애를 썼다. 나라가 없는 시대에 나라의 정신마저 그들에게 빼앗길 수 없다고 여목은 생각했다. 그러나 이미 민족의 정기는 서서히 허물어지고 있었고 바둑에 있어서도 일본 바둑이 동시대를 주도하고 있었다.

자신의 뒤를 이어 줄 재목으로 여목은 평사와 설숙을 생각했다. 그러나 자신의 기대만큼 모든 것은 뜻대로 되지 못했다. 조선의 앞날은 기약이 없었고 평사마저 그의 곁을 떠난 뒤 기약 없는 조선의 운명을 지켜 보며 그는 쓸쓸한 만년을 보내야 했다.

「절세의 반(盤)이다.」

여목은 설숙을 바라본다. 방 안은 깊은 적막에 싸여 있고 도장 뒤뜰에서 이따금씩 벌레 우는 소리가 들려 온다.

「바둑은 도(道)이다.」

여목의 음성이 아득하게 울려 퍼진다. 그것은 평생 동안 기도(碁道)와 더불어 갈구했던 여목의 삶이었다.

「수로써 도를 구하여 하늘의 이치를 터득한다.」

방 안은 쥐 죽은 듯이 고요하다. 여목은 힘겹게 팔을 뻗어 설숙의 손을 잡는다.
설숙의 눈에 눈물이 어리기 시작한다.
여목의 생명이 꺼져 가고 있었다. 잡고 있던 여목의 손이 서서히 풀린다.

「벽송을 욕되게 하지 마라.」

여목의 말은 이제 알아듣기 힘들 정도로 낮았다.

「하늘이, 하늘이, 이 여목을 부르는구나…….」

그 말을 마지막으로 여목은 벽송 앞에서 앉은 채로〔坐脫〕 세상을 떠났다.
그의 죽음을 애도하듯 하늘에서 때 이른 어둠이 조용히 내려 천지를 감싸고 있었다.

여목(余木) 이상순(李常舜).
대원군이 득세하던 고종 2년에 태어나, 일본이 조선을 핍박하던 암흑의 시대 1928년 10월 문득 졸하였으니 향년 64세의 나이였다.

하늘도 감탄해 마지않을 바둑의 도를 얻어 중년의 나이로 바둑의 발원지인 중국으로 건너가 중국 기계를 병탄하기 일보 직전, 조국의 합방을 알고 중원 통일의 대업적을 눈앞에 둔 채로 귀국길에 오른 뜨거운 민족혼을 가슴에 품은 거인이었다.

태평성시에 태어났더라면 바둑의 역사에 전무후무한 발자취를 남겼을 기재였건만 조선의 몰락과 함께 역사에 이름 석 자도 실리지 못한 불운의 기객이었다.
조선의 마지막 순장 바둑의 대가였으며 바둑을 도의 품격으로 승화시킨 조선이 배출한 불세출의 명인 여목. 그가 떠난 것이다.

「스승님…….」

설숙의 눈에서 흘러내리는 눈물이 벽송 위로 떨어진다. 그 눈물은 이내 반면 위에 피처럼 번져 간다. 벽송도 주인의 죽음을 아는 듯 소리 없는 침묵으로 깊게 깊게 통곡하고 있었다.

다음날.
설숙은 스승의 유품을 정리하다가 스승의 장롱 서랍 깊숙한 곳에서 한 장의 낡은 기보를 발견했다. 아홉 점 바둑이었는데 그것은 옛날 여목이 소년 추평사와 처음 봉화에서 둔 바둑을 손수 기록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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