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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회] 6부 깊은 산사의 노승 (2)

2007-03 조회 3660추천 0 프린트｜스크랩

먹을 갈던 민수가 답답한 마음에 자신도 모르게 거들었다. 「선생님, 그거 젖히지 말고 한 집을 내면 수상전에서 한 수 빠른데요.」 최 선생님은 민수를 쳐다보더니 싱긋이 웃었다. 미술실에서의 민수의 하루 일과는 선생님의 작업을 도와 주는 것이었다. 도와 주는 일이라야 청소를 하고 먹을 가는 일이 고작이었지만 선생님은 그런 일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간혹 민수가 먹을 가는 데 소홀히 하면 선생님은 엄하게 민수를 꾸짖었다. 「먹을 가는 것은 중요한 일이니 열심히 하도록 해라.」 민수는 주로 선생님의 작업을 구경하는 시간이 많았다. 붓이 몇 차례 지나가면 대나무가 만들어지고 매화가 피었으며 화선지 위에는 어느 틈에 난초가 무성했다. 그럴 때 선생님의 모습에서 민수는 언젠가 출항을 앞두고 뱃머리에 앉아 담배를 피우던 아버지를 떠올렸다. 미술실에서 제일 기다려지는 시간은 작업이 끝나고 두 사람이 수담을 나눌 때였다. 그 당시 민수의 기력은 5급 정도였고 선생님은 1, 2급에 달하는 고수였다. 민수는 넉 점을 놓고 매번 졌다. 열 판을 두면 민수가 이기는 판 수는 고작 한두 판이었다. 민수가 이기는 날은 선생님이 저녁을 사 주기도 했고, 같이 영화를 보러 간 적도 있었다. 민수는 선생님과의 치수를 좁히기 위해 나름대로 고심했다. 하지만 치수는 전혀 변동의 기미가 없었다. 두기 전에는 자신감에 충만했으나 승부의 결과는 매번 요지부동이었다. 어느 날 민수는 마음을 굳게 먹고 기원을 찾았다. 어머니가 장사를 하는 시장 도로변에 있는 기원은 역사가 오래 된 기원으로 그 도시에서는 소문 난 기원이었다. 그 기원에서 민수는 한 사내를 만났다. 깡마른 체구에 허름한 차림의 사내는 서른 살이 넘어 보였다. 사내는 말이 없었다. 종일 기원에 있어도 누구와 말 한마디 나누는 법이 없었다. 사내는 바둑을 두지 않고 구경만 했다. 온종일 뒷전에서 남이 두는 바둑을 지켜 보았다. 그러다가 잠이 오면 의자에 앉은 채로 꾸벅꾸벅 졸았고 어떤 날은 창가에 기대어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잠을 잤다. 사람들은 사내에 대해 무관심했다. 사내가 어떤 행동을 하든 사람들에게 사내의 행위는 이미 도식화되어 있었다. 그때만 해도 교복을 입은 학생들의 기원 출입이 흔치 않은 일이었으므로 민수는 기원 손님들에게 귀여움을 받았다. 그러나 사내는 민수에게 단 한 번도 관심을 준 적이 없었다. 한번은 사내가 혼자서 바둑을 놓고 있었다. 민수가 기원에 나온 이후로 처음 보는 광경이었다. 민수는 호기심에 사내에게 다가갔다. 기보도 없이 사내는 흑, 백의 돌을 번갈아 놓았다. 민수와 사내의 눈이 마주쳤다. 사내는 돌을 쓸어 담았다. 민수는 발길을 돌리며 사내의 눈이 참 슬프다고 생각했다. 그날 민수는 늦은 시각에 기원에 들렀다. 그날따라 기원에는 손님이 별로 없었고 사내는 기원 원장과 난롯가에서 술을 마시고 있었다. 민수는 구석자리에 앉아 신문에 난 기보를 복기하기 시작했다. 그때 사내가 다가왔다. 「학생, 상대가 없나 본데 나와 한번 둘까.」 사내는 민수 앞에 앉았다. 「아홉 점을 놓아 봐.」 민수는 깜짝 놀랐다. 이 기원에서 제일 잘 두는 사람에게 민수는 여섯 점을 놓았다. 그간 실력에 진척이 있어 바둑도 다소간 늘었다. 술기운으로 얼굴이 불그스레한 사내는 태연했다. 민수는 사내의 말대로 아홉 점을 놓았다. 아홉 점을 놓고 한 판을 졌을 때 사내는 일어서며 민수에게 말했다. 「남의 돌을 잡으려 하지 말고 네 돌을 죽여서 이겨 봐. 그러면 바둑이 는다.」 그 한마디는 민수의 바둑관을 확 바꾸어 놓았다. 그 후로 민수는 사내를 사범님이라 불렀다. 「묵향이 좋으냐?」「예.」 민수는 묵향이 바닷가의 갯벌 냄새와 비슷하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너도 가만히 있지 말고 붓을 쥐고 연습을 해보려므나.」 그때부터 민수는 신문지 위에 붓을 사용하는 법을 배웠다. 그리고 얼마 후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것은 미술 시간에 그리는 그림과는 판이했다. 민수는 땀을 흘리며 먹을 갈았고 열심히 정성을 다해 선생님의 가르침에 따랐다. 그림을 그리다가 무심코 고개를 들면 선생님은 어느새 등 뒤에 서서 민수의 그림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간 선생님과의 바둑은 두 점으로 내려왔다. 근간엔 두 점 놓고도 민수가 이기는 날이 빈번했다. 「너의 바둑이 이렇게 일취월장하는 걸 보니 기원의 사범님이란 분이 대단한 분이신가 보다.」 민수는 그 동안 사범님에게 바둑을 많이 배웠다. 하루나 이틀에 한 번 정도 지도대국을 받았고 사범님의 각별한 관심으로 자신에게 알맞는 바둑책들을 골라 섭렵할 수 있었다. 「그래 사범님께서 이번엔 무엇을 일러 주었느냐.」「신물경속(愼勿輕速)이란 말을 했습니다.」「신물경속이 무엇이라 하더냐?」「행마를 신중히 하는 것이라 했습니다.」「옳은 말이다. 그림에서도 붓이 가벼우면 그 그림은 필경 상하게 된다.」 중반전에 이르러 판세가 기울자 선생님은 돌을 거두었다. 「이대로 가면 너와 난 곧 맞수가 되겠구나.」 선생님은 껄껄 웃으셨다. 그러나 선생님의 그런 기대는 곧 무너졌다. 사범님이 기원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하루, 이틀 보이지 않더니 그 길로 영영 발길을 끊었다. 민수는 사범님을 기다렸다. 민수는 사범님이 꼭 돌아오리라 믿었다. 언제나처럼 기원 문을 열고 불쑥 나타날 것만 같았다. 그러나 기원 문은 결코 열리지 않았고 사범님은 돌아올 줄 몰랐다. 하루는 원장님이 사람들에게 말했다. 「그 사람 사기바둑 두다가 잡혀 갔어.」 그날 민수는 도시에 나와 처음 부둣가에서 갈매기를 바라보았다. 「너 요즘, 바둑에 의욕이 없구나.」 선생님은 방금 민수가 놓은 수를 보고 고개를 흔들었다. 「이 수는 사범님이 보면 실망하겠다.」「……사범님은 잡혀 갔습니다.」「…….」 민수는 선생님을 따라 생전 처음 술집에 갔다. 선생님은 막걸리를 사발에 한 잔씩 부었다. 「마음이 괴로우냐?」「예.」「살다 보면 괴로운 일은 얼마든지 있다.」「…….」「사범님이 좋지 못한 일로 잡혀 갔다 하더라도 너에겐 좋은 선생님이다. 넌 사범님을 나쁘게 생각해선 안 돼.」「…….」「자, 술을 들어라. 이 술은 떠난 사범님을 위해 마시는 술이다.」 얼마 안 있어 선생님도 타도시로 전근을 갔다. 선생님은 붓과 벼루를 선물로 주고 헤어질 때 한마디만 했다. 「고향을 잊지 마라.」 그리고 선생님은 긴 복도를 걸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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