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말에 우환이 겹쳤다

아버지의 지병이 위독했고 와중에 어머니마저 교통사고로 나란히 중환자실에 누워있었다.

한 달반의 비몽사몽 같은 날들이 지나고 어머님은 퇴원을 하셨지만

아직 생활에 적응하는 데는 상당기간의 재활이 필요한데 팔순의 나이가 안타깝다

다들 그렇게들 살아가는 이야기고 30여년을 그렇게 살아왔지만

자신이 하는 일 환경은 늘 힘들고 남의 일은 여유롭고 평화로워 보인다.

하지만 그것은 착시였다

나보다 못한 사람을 보지 않았고 나보다 나은 사람을 보았기 때문이다

나에게도 능력이 있었다.

나는 시련이 몸에 배였고 그래서 처음 당하는 사람에 비하면 지난 세월의 면역력이 상당하다

그리고 그 해법과 어느 정도의 결과도 예측할 수 있다

대개 남의 일엔 객관적이고 도덕적이며 냉철한 논리로 평가를 하게 되지만

자신의 일은 그렇지 못한 이유는 감정이입과 조절이라 생각한다.

그렇게 본다면 산전수전 공중전까지 경험한 노하우로 1인 3~4역을 도맡아 하고

실전에 의한 동물적 임기웅변까지 겸비한(?) 내가 그들에게는 초능력자로 보일 수 있겠다

나는 일상이지만.

도배를 하게 되었다

일상이 팍팍하여 몇 년째 미루어 오던 일이었는데 이번에 사고를 쳤다

아버님이 가시면 어머님의 여생 편안하게 모시는 게 마지막 바람인데 그도 여의치 않다

각자의 이해관계의 충돌이 있고 경제적 제한과 무엇보다 세대 간 가치관이 큰 장애가 된다.

명예는 없어도 돈이라도 있으면 조율이 가능하지만 가난한 나의 도덕성은 허울일 뿐이다

그런 세월도 3자에게는 흔치 않은 일이지만 가족끼리는 의무로 평가절하 된다.

다른 집은 맏이가 처세를 잘못하여 우애가 금이가더만 우리 집은 맏이가 오버한다는 쪽이다

물려받은 재산도 없는데.

이것이 친근한 나만의 외로움이자 현실을 버티는 오기를 버무린 자부심이기도 하다.

변명이기도 하고.

그래서 한 지붕 세 가족을 만들었다

내가 하고자 하는 일이 옳아도 나이 든 사람들에게 너무 배팅이 많다는 사람들에게

원하는 대로 당분간 따로 생활하기로 했고 형제들에겐 경상도 버전으로 주디 닥치라 했다

일단 아버지 가시면 다시 의견을 모으자 했으나 어머님이 그 뒤를 이으니 묘연하지만

그렇다고 빚더미지만 집 놔두고 따로 방세 줘가며.

가랑이 찢어지는 짓거리일지라도 어차피 다른 선택을 해도 다른 뭔가가 찢어 질 일이다

정서적인 문제니까.

그래서 어머님이 부담스러우실까 내 성질 더러운 탓으로 그들의 변명거리를 만들어 주었다.

이제 어머님은 나 없으면 천덕꾸러기지만 나는 아직도 어머니의 안타까운 자식이니

어머니의 모성애를 자극하면서 동생들과 식구들의 허물을 내 탓으로 돌리기로 한 것인데

사실 허물인지 현실론인지도 분간하기 어렵고 내가 옳은지도 판단이 어렵다.

견적이 나에겐 어마어마했다

그래서 줄이고 줄여 거실과 어머님 방만 새 단장하고 내방은 그대로 쓸 생각도 했지만

그것도 어머님에게 부담스러울 것 같아 갈등하다가 일단 몸으로 때울 수 있는 방법으로

내가 페인트칠을 하기로 했다 (견적 100만원)

생각이 여기에 이르니 속설이 떠올랐다. (저질러야 결과가 나온다)

여기엔 시작이 반이라는 말과 같은 듯 다른 뜻이 내포되어 있다

좋은 생각을 우선하고 실천에 옮기는 데는 비슷하지만 무리성에서 다르다.

그러나 어머니에겐 지금을 아껴 다음을 기약하기엔 남은 시간이 너무 없다

일단 페인트를 방문에 쳐 발랐다

하다가 말면 더 엉망일 테니 어떻게든 끝을 볼 것이라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생각하고는 다른 모양새에 후회가 막급하고 수습의 막막함으로 퍼질러 앉아 술을 땄다

한 잔 두 잔.

시팔 니팔 하다가 웬걸 술이 오르니 오히려 처연해졌다

한잔 마시고 붓으로 휘젓고 또 한 잔 마시고 휘젓고.

우리질 세상을 문짝에다 휘갈기며 마음껏 호작질을 해대다가 쓰러져 잠이 들었다

그런데 아침에 일어나니 문짝이 제법 하얗게 되어 있었다.

한 번으로 안 되었던 게 몇 번의 덧칠을 해야만 된다는 것을 어저께 일로 불현 듯 느꼈다.

그래 해보자.

근 한 달에 걸쳐 비번 때마다 하나씩 칠해갔고 그런대로 모양이 갖추어져가니

서서히 자신감이 붙기 시작했다

어머님이 사고를 당했을 때 운명의 채찍질이 어쩌면 이렇게도 가혹하신가했었다

그리나 수습 과정에서 순리를 따르기로 했고 불행 중 다행으로 이 정도에서 감사하기로 하고

어머님께는 우리 집 모든 액땜을 당신께서 온 몸으로 하신 거라 위로했었다

감정을 자제하고 모든 전문가와 상담했고 인간성을 잃지 않은 채 상식 하에 최선의 길을 따랐다

만약 가해자가 도망을 갔거나 바로 응급차를 불러주지 않았으면..... 끔찍하다.

실업자에 신불 자에 파지를 주워 연명하는 부모 밑에서 사는 사람과의 합의는 난감 그 자체였다

몇 번의 만남에서 욱하고 감정도 치솟았고 어찌할 도리가 없는 상황에 어이가 없었다.

몰아붙여 봤자 나 몰라라 한다면 우리 집은 어머니 몸상하고도 병원비에 내 근무상실비에......

이건 최악의 시나리오였다

“우리 집 상황 봤겠지만 이렇게 한다는 데는 많은 인내가 필요합니다.”

“네네. 제가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모두 운명인가 봅니다. 우리 서로 액땜이라 생각하고 이제부터는 좀 잘되어 봅시다.”

“악연도 인연이랍디다. 다음엔 서로 잘되어서 함 만납시다. 제발요.”

“네 저희들을 살려 주셨는데 앞으로 열심히 살겠으며 형님네도 잘되시길 진심으로 빌겠습니다.”

눈물을 글썽이며 잡은 손을 놓아주지 않고 몇 번이고 고개를 숙였을 때 괜히 숙연해졌다

액땜이라 생각하자 모든 걸 해를 넘기고 싶지 않았고 연말에 그들 선에서 합의를 봤다

그리고 양력으론 새해 시작이고 음력으론 아직 연말이니 겸사겸사 도배를 하기로 한 것이고

엄청난 고비를 넘겼으니 다시 주어진 시간에 감사하며 새해부터는 새롭게 시작하기로 한 것이다.

어머님께는 일상의 엔도르핀을 드리고 나는 그 모습에서 보람을 찾고자 했으며

반전의 계기로 삼으려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평소의 가치관에 예외를 감안하니 포기와 인정이 주는 여유를 알았고

권리와 의무는 결코 상식의 강을 따라 흐르지 않았다

모두 챙길 수도 없었고 반대의 입장에 서니 모두 이행하기도 어려웠다

세상에는 빅으로 상생하는 경우가 흔치 않으니 누군가 어느 정도의 희생이 따른다.

나는 뜻하지 않는 일로 뜻하지 않게 마음의 도배도 겸하게 되었으니 아이러니라 해야 하나.

중저가지만 깨끗한 농을 30여 년만에 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