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번이라 새벽까지 일하고 들어와 소주 한잔하고 늦잠 잤다.

일어나자마자 젤 먼저 하는 일은 밤새 쌓인 가래 뱉고 담배 피워 물기.

비몽사몽 냉장고 문 열어 놓고 뭘 마실까 고민하며 싸한 냉기에 정신마저 챙기면서

손 가는대로 마실 걸 집어 들이키면 그제야 눈이 조금 떨어진다.

우유. 탄산음료. 칡즙. 그리고 보리차.

화장실 가면서 입맛을 다시니 입안에 여운이 없는 게 보리차였나 보다.

아침 건강식 날계란에 참기름 한 방울로 마무리 하려 냉장고 문을 다시 여니

선택 된 줄 알았던 보리차는 칡즙은 동이 났고 빈 음료수 우유팩 옆에 선 유일한 생존자였다

무심히 잡았던 보리차가 유일한 마실 거리였던 것인데 나는 과연 아침 운이 좋았던 것일까.

지금의 환경과 시련을 업이라 생각하고 살아가지만 늘 만감이 교차한다.

다만 포기하면서 적응한 탓에 생활이 되어버렸고 여러 과정을 거쳐 면역이 되었다

간혹 주변에서 나의일상이 특별하다고하지만 그저 덤덤하게 받아들인다.

동안 수양도 좀 되었고 가치관도 뚜렷한 탓도 있지만 반전을 바라는 마음 뿐 행마가 없다

주변의 관심은 잠시 위로도 되고 술 한 잔의 핑계도 되지만

언제나 평온은 습관적으로 세파를 피해 달아나는 고독 속으로의 밀항이다

더 진실하게 사랑하기 위해 또 하나의 위로가 되었던 바둑과의 이별이 일주일 째

비번이면 거의 열판이상 두었고 일하는 날에도 틈틈이 두었는데 일주일 동안 쳐다보지 않았다

한 달을 잡았지만 3일을 넘긴다면 장하다했건만.

팔공산 입구라 행락 철이면 집 앞 도로가 차들로 장사진이다

그래서 언제부턴가 휴일이 싫고 사람이 싫고 차들과 자연의 조화가 싫어졌다

3월 꽃들이 피기 시작해서 여름피서에 가을 단풍이 질 11월 중하순까지 이어지는 정체

술 사러 동네 슈퍼에 잘 가지 않지만 차를 가지고 나갈 수 없을 정도니 어쩔 수 없다

저 수많은 차들엔 어린 아이와 나이든 사람은 거의 없고 혼자나 커플이다

반바지에 슬리퍼로 술 사러가는 나의 초췌한 눈에 비친 해맑은 웃음 속에 반추되는 그림자들

심각한 표정으로 통화를 하다 다시 둘이서 웃어젖히는 저 사람은 누구에게 무슨 말을 했을까.

그리고 옆 사람에게 무슨 말을 했고 둘의 웃음은 무슨 뜻일까.

저들은 원하는 것으로 갈증을 풀고 있는 것일까.

나는 왜 어저께 냉장고를 보지 않았고 저들과 달리 가기 싫은 동네 슈퍼로 향할까.

오늘은 한 달에 한번 유일하게 간병 교대가 없는 날이다

예전 같으면 산사 길을 잡고 설레는 밤을 새우고 삶은 계란 주먹밥 아침에 내린 커피

그리고 평소엔 잘 즐기지 않는 과자와 과일 몇 개에 부자유람 길에 나섰건만.

카메라 고장으로 묶이고는 벌써 얼마인지도 모르겠다.

카메라가 발목을 잡은 게 동기지만 이제는 마음이 묶여 버렸다

차일피일 미루고 작심하고 갔다가 이것저것 만져보다 또 가격에 미루고 그리고.............

오늘은 바둑을 둬 보리라 앉았건만 자신이 없어 자판을 당겼다

그 어떤 경우에도 바둑으로 마음을 풀 수 있었는데 갑자기 미안하다는 생각이 들면서 일주일

더 사랑하려고 잠시 발걸음을 멈췄다고 생각한 그 일주일에 더 많은 미안함을 알게 되었다

사랑의 길은 그렇게 멀어지는가.

사랑은 냉장고에 두고 보관하는 것이 아닌 것 같고

인생은 잠결에 문을 연 냉장고 속에서 무의식의 선택에 의해 좌우되는지도 모르겠다.

자기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도 확실치 않고 의지도 확실치 않을지도 모른다.

느낌과 선호도도 다를 것 같다

그러나 갈증을 푼다면 무엇인들 어떻고 풀 수 있다면 냉장고 밖에서도 있을 것이다

냉장고에 떨어진 음식이 많은 하루

반바지 차림에 슬리퍼를 끌고 슈퍼로 향하는 남자

어머님의 텃밭에 물주기 부탁과 세탁기 돌리기와 집안 청소 부탁하는 우렁각시와

내일 새벽 일찍 나서서 돈을 벌어 와야 하는 한 남자의 자유는 술 한 잔에 고독하다

얼굴을 내려와 마음마저 단풍이 들어가니 이제 곧 술병과 함께 쓰러 질 것이다

그리고 아마 내일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