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장,이라는 책이 있는데, 어느 고승의 편지글모임이다. 서양철학으로 치면

스피노자 편지글모음 같은 것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서 유명해진 구절이 있는데, 가령 숙처전생하고 생처사숙마라는 말이 유명하다.

익숙한 곳은 생경하게 만들고, 생경한 곳은 익숙하게 하라는 말이 된다..

새로운 입장에 등장하면 그곳에 익숙해져야 하는 셈인데, 편지글의 주인공이 선사이다가 보니, 자연히 낯선 곳이 의미하는 것은 진여나 보편성 같은 것이고, 익숙한 곳은

의미망이나 욕심으로 연루된 생활방식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세상은 의미망인 것 같다. 우리는 우리 개인을 폼잡고 생존하는 데에 주력하기 쉽지만

실은 세상이라는 이름의 의미망 자체가 주로 작동하는 것이지, 우리들 개인차가 얼마나 있을지 조금 의심스럽기도 하다.. 비유를 해보자면

우리가 두는 바둑들이 형태상으로는 조금씩 다르지만, 결국에는 19로의 구조와 기본공준의 명령 등을 조합하면, 결국 바둑은 다만 하나인 셈이라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사람이 바둑을 두는 것 같지만, 실은 바둑판이 두는 것이라고나 할까...세상이라는 것이 이 비유에선 19로의 바둑판 비슷한 역할에 해당하는 셈이다.. 결국 사상가들은 대부분 이런 연루된 조합적 성격을 파악해서 남기곤 하는데, 그걸 인간적 편의에 따라서 인식론이라든가, 존재론, 사회철학 등으로 나누어서 부른다. 마치 정석이 있고, 중반전투론이 있고

그리고 맥의 연구 같은 것도 있는데, 이런 것이 비유를 하자만 존 로크의 인간오성론 비슷한 구조에 해당하는 셈이 된다.. 하지만 바둑이 모두 19로의 구조일 뿐이듯

세상도 그냥 의미망일 뿐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것이다. 그런데, 대혜스님이 말하는 낯선 것은 그러한 줄그어진 구조에서 벗어난 상태라고도 할 수 있을 것 같다. 의미망에서 벗어난 쪽에 친숙해지라는 것이라고나할까.. 대체로 불교에서 말하는 연기론이라는 것이 이러한 의미망적인 측면을 말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결국 연기는 허망하다는 뜻이 되고, 안허망한 것이 필요하다는 말이 될 것이다..

방거사라는 사람이 죽을 때에 남긴 말로서

단원공제소유, 절물실제소무,라는 말이 유명하다..

있는 것을 없는 줄 알고, 없는 것을 있도록 만들지 말라는 말이 되는데, 여기에서 본다면

있는 것은 앞에서 말한 의미망이 되는 셈이고, 없는 것은 원래가 없는 것이 된다.. 그러니까 우리는 없는 것을 있도록 만들어서 무승자박, 즉 포승줄이 없는데 스스로 묶여서 살아왔다는 말이 된 셈이다.. 결국 생처사숙, 숙처전생과 단원공제소유, 절물실제소무,라는 말은 같은 취지가 될 것 같은데, 그래서인지, 서장, 즉 대혜서한집을 보면, 방거사의 저 구절이 자주 인용된다.. 역시  고금의 묘수는 자꾸 인용되게 되어 있는 모양이다. 마치 이적수라든가, 혹은

오청원의 빗겨 날일자, 같은 수가 세월을 두고 자꾸 인용되는 것과 비슷할 것이다..

도책이 실전에서 보여준, 당대방 중복시키기의 기술 같은 것도 인상적인 것을 보면

아마도 그것이 시사하는 바가 어느 정도 보편성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요즘 서점에 들러보았더니 이지성인가 하는 젊은 사람이 인문고전읽기에 관한 설계도를 제시하는 책이 있던데, 참 흥미로왔다..

우크라이나나 크리미아 반도와 같은 사태가 일어난다고해서

세상에 그런 일만 있는 것은 아닌 셈이다. 여전히 칸트와 스피노자도 자꾸 다른 버젼으로 탄생한다..

예전에는 유명한 역사적 인물들은 왜 한번 떠나면 다시 같은 이름으로는 돌아오지 않을까 궁금하기도 했는데, 나도 세월이 흐르다보니, 이전에 비해서 세상이라는 것이 그처럼 중량감이 있는 곳이 아닌것처럼 느껴지기도 하는 것 같다.. 이미 말씀들은 있어왔고, 보기에 따라서 넘쳐나기도 하므로, 세상이라는 이름의 바둑도 안둘 자유도 충분하지 않을까 싶어진다고나 할까... 세상이 그처럼 집착스러운 곳이라면 왜 노자도 구담부처도 떠나간 후엔 소식이 없어도 되겠는가 하는 생각을 해보게도 된다..

아무런 일도 없다,라고 임제식으로 말하면 매우 간단할 수도 있을 것 같고

그러나 또 설명을 하자면 팔만대장경으로 설명도 하게 되는 셈인데, 결국 아무런 일도 없다는 말은 안두어도 된다는 말이 되는 셈이다. 안두어도 되면, 마치 세상에 흔적을 남기지 않아도 되듯이, 좋은 기보를 남기지 않아도 된다는 말이 되는데, 결국 역사라는 것이 세상의 시간적 버젼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역사에 속는 것이 조금 위험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해보게 되는 어느 새벽.. 잠이 안와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