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흘 전 이 영감은 바둑을 두는 도중에 쓰러졌다. 의식불명이었다. 마공이 쓰러진 이 영감을 업고 병원으로 달려갔으나 이 영감의 의식은 다시 돌아오지 못했다. 병명은 뇌출혈이었다. 노화로 인한 허약체질이 주 원인이었고 그 이전에 이미 몸의 상태가 전반적으로 기울었다는 것이 의사가 내린 결론이었다.

이 영감의 죽음에도 불구하고 연고자가 나타나지 않았다. 장 원장과 독립군들은 상의 끝에 이 영감의 시신을 화장하여 강물에 뿌리기로 결정했다. 충호가 이 영감이 살던 사글세 집을 찾아가서 그의 자식들을 수소문했으나 허사였다.

주인을 비롯한 동네 사람들 중 그 누구도 자식들의 연고를 아는 사람이 없었다. 냉기가 가득 도는 싸늘한 방에 거적때기 같은 담요 한 장, 그리고 먹다 남은 소주 반 병이 이 영감이 살아온 전부였다.

5년 전, 마누라가 저 세상으로 가자 이 영감은 같이 살던 큰아들 집을 나왔다. 며느리와의 불화로 인해 집을 나왔다는 설도 있고 자식과의 관계가 원만치 못해 스스로 나왔다는 이야기도 있었다.

그 뒤 혼자 살고부터는 봉제공장을 하던 작은아들이 간혹 찾아와서 생활비를 일부 보태 주었으나 그나마 2년 전 그 자식이 브라질로 이민을 가 버리자 그날로 이 영감은 졸지에 오뉴월 개터래기 신세가 되어 그 좋아하던 방내기도 제대로 못 두고 하루하루를 빈곤과 고통 속에 살아왔다.

‘개고기는 무병장수요 만사형통이라’ 하는 개고기 찬양론자였고 술만 취하면 ‘너거들 마누라한테 잘해라, 잘해라.’ 입버릇처럼 되뇌던 애처가이기도 했던 이 영감은 노 기객으로 비참한 말년을 기원에서 보내던 중 결국 바둑판 위에서 쓰러져 한 많은 생을 마감했다.

장례식 날. 눈발이 휘날리는 가운데 이 영감의 유골은 강가에 뿌려졌다.

「차라리 잘됐구마. 죽어 저 세상에 가마 마누라도 만나고. 우리끼리 하는 말로 그기 낫다 카이.」

원장이 넋두리를 한다. 독립군들이 돌아가며 이 영감에게 소주를 한 잔씩 따른다. 마지막으로 유독 이 영감과 친했던 충호가 술을 올리며 준비해 온 개고기를 뜯어내어 한 점 강물에 던진다.

충호는 우두커니 강을 바라본다. 생전에 무리를 해서라도 한번 대접해 드릴걸, 충호는 후회를 한다. 언젠가 시장 보신탕집 앞에서 멍하니 서 있던 그 모습이 떠오른다. 주름이 가득한 얼굴에 힘없이 돌아서던 그 무거운 발길이……. 충호는 목이 메인다.

「잘 가소, 이 영감…… 흐흐흐흣…….」

충호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린다.

「충호야, 그만 해라. 니 눈에 눈물이 나마 내 눈에 피눈물이 난다 카이.」

말은 그렇게 했으나 원장의 눈가엔 아무런 기척이 없고, 풀어헤친 갈대숲 사이로 불어오는 세찬 바람이 강어귀를 지나간다. 장례식은 그렇게 끝이 났다.

그날 밤 독립군들은 기원에서 밤을 새워 술을 마셨다. 한 가지 특이한 일은 술만 마시면 꼭 시비가 붙었던 송강과 마공이 그날만은 별일 없이 그냥 넘어갔다는 사실이다. 마공은 그날 단 한마디의 말도 없이 술만 마셨다.

그로부터 사흘간 마공은 기원을 비웠다. 나흘째 되던 날 나타난 그는 대뜸 송강에게 승부를 제의했다. 돌연한 마공의 제의가 이상스럽긴 했으나 그렇다고 해서 송강의 입장에서 굳이 피할 이유는 없었다.

지금까지 총 두 판을 두어 1승 1패를 한 두 사람에게 이 한 판은 쌍방 승부의 분수령이었다. 독립군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판 밑에 지폐 몇 장을 묻고 돌을 가리자 송강의 흑번, 마공의 백번이었다.

대국이 시작되어 송강은 늘 하던 대로 세력과 실리의 배합을 적절히 구사했고 마공 역시 그 특유의 넓고 화려한 행마로 맞섰다. 두 사람은 한 수 한 수 그 어떤 대국보다 심혈을 기울인다. 어떻게 하든 이겨 보겠다는 의지가 두 사람의 얼굴에 비장하게 드러났다.

초반부터 서로가 한 치의 양보도 없이 승부에 집착하는 것은 평소 두 사람의 관계로 보아 하등 이상할 게 없었고 누가 보더라도 두 사람에겐 숙명의 한 판같이 생각되었다.

승부는 꾸준히 평행선을 달렸다. 중반에 이르러 송강의 실리가 잠시 돋보였으나 마공의 영역 또한 만만찮아 형세는 어김없이 불명이었다. 대국 도중 송강은 마공이 갑작스레 승부를 결하자고 하는 의도를 헤아려 본다.

의식의 대립이 팽배해 있는 두 사람 사이에 먼저 대국을 원하는 쪽이 자연 기세가 한풀 꺾이게 마련이다. 서로가 대국에 대해서 계속 침묵을 지킨 것도 그 때문이다. 그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마공이었기에 마공의 제의가 송강은 이상했다.

기실 송강은 지금까지 마공과의 대국을 원하는 쪽이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송강은 마공을 이길 자신이 있었다. 송강은 바둑으로 마공의 콧대를 납작하게 눌러 주고 싶었다.

기풍으로 보나 기량으로 보나 송강은 마공에 비해 자신의 바둑이 한 수 위라고 생각했다. 전에 둔 두 판 중에 한 판을 진 것도 내용면에서는 많이 우세한 바둑을 종반에 어이없는 착각으로 내주고 만 것이었다.

송강은 바둑으로 일단 기선을 제압한 뒤 그의 그릇된 사고방식에 쐐기를 박아 그의 기를 꺾고 싶었다. 마공이 기원에서 독자적 세력을 유지하는 비결은 그의 기력이었다. 바둑 두는 세계에서는 기력이 높은 자가 주위의 신망을 받는다.

흡사 당구장에 가면 당구 잘 치는 사람이 모든 일에 달통한 것처럼 그만큼 고수의 말 한마디는 무게가 있었다. 그 무게를 무력화시키기 위해선 정식 승부에서 그를 제압하는 길뿐이었다. 그런 송강에게 마공이 먼저 시비를 걸어 왔으니 이 바둑이야말로 송강에겐 절호의 기회였다.

바둑은 송강의 의도대로 종반에 접어들어서야 근소하나마 덤을 고려해도 송강이 좋아 보였다. 마공이 심각하게 반상을 내려다봤다. 맹수의 발톱처럼 사나운 눈이 오늘은 왠지 나약해 보인다. 끝까지 승부를 붙들었건만 바둑은 서서히 기울어진다.

송강의 눈에 전에 없이 마공이 처량하다. 이긴 자의 아량이 아닌 연민 같은 것이 불쑥 일어난다. 집에 있는 아내 생각이 난다.

고시촌에서 공부는 팽개치고 매일 술에 취해 살던 시절, 매번 술에 곤드레만드레되어 고시촌 지나 산 아래 종점까지 송강은 버스 안에서 잠을 잤다. 그런 송강을 깨워 주고 몇 차례 약수물까지 떠다 바친 시골에서 올라온 어느 버스 차장과 송강은 그 이듬해 결혼을 했다.

불현듯이 마공이 아내의 먼 친척 오라비같이 느껴지기도 한다. 송강은 애써 고개를 흔든다. 자신을 알량한 지식인으로 몰아붙여 사사건건 시비를 걸었고 배운 놈, 가진 놈들은 전부 사이비요 부정 축재자라 하며 사회의 보편적 양심이나 가치마저도 모조리 부정하던, 제도를 비난하는 방식마저 철저하게 무모하고 비논리적인 놈이었다.

그리고 자신은 무슨 빈민계급의 대변자라도 된 것처럼 가식과 허구에 물든 자신의 행위가 얼마나 주위를 기만하고 있다는 것을 모른 채 스스로 자기도취에 빠져 세상을 얕잡아보고 거들먹거렸다.

그는 실리를 위하여 모든 명분을 버릴 수 있거나 민중을 등에 업고 그 민중의 피를 빨아 다시 기생하는 음흉한 위정자에 불과했다. 그는 자신이 지금까지 보아 온 그런 부류의 사람들과 조금도 다를 바 없는 가면을 뒤집어쓴 비열한 자임이 분명했다.

그러나 무엇보다 송강이 참을 수 없는 건 그놈의 극단적인 이기주의적 습성이었다. 그는 상대가 누구든지 간에 물불을 가리지 않는다. 겉으로는 가난한 기객들에게 관대한 것같이 행동하지만 자세히 보면 그는 돈을 챙기는 데 있어 주도면밀했다.

알게 모르게 그는 하수들의 돈을 매정하리만큼 날마다 훑어갔다. 고수가 대접받는 곳이 기원이라고는 하나 그가 하는 짓을 냉정하게 종합해 보면, 그가 기원에 나오는 궁극적인 목표는 오로지 돈을 따기 위해서일 뿐 다른 의미는 전혀 없었다. 그렇게 돈을 챙기고도 그는 불쌍한 독립군들에게 술 한잔 사는 법이 없었고 오히려 얻어먹는 자리는 빠짐없이 참석했다.

그러고도 그는 남을 위하는 체하고 행여 자신의 그런 약점이 노출될까 두려워 그럴 때마다 기이한 언변으로 자신을 은폐하려 했으니 애써 그를 적대시하는 것은 송강으로선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다 말고 송강은 반상을 쏘아 본다. 반상엔 이제 끝내기만 몇 군데 남았다. 송강은 냉정하게 끝내기를 마무리한다. 마지막으로 반패를 마공이 이어 가고 공배가 모두 메워지자 바둑은 끝이 났다.

돌발사태가 발생한 건 바로 그때였다. 죽은 돌을 들어내고 계가를 시작한 지 10초가 지났을까. 갑자기 기원문이 확 열리며 가죽점퍼를 입은 형사들이 들이닥쳤다. 형사들은 마공의 인상착의를 확인한 뒤 양쪽에서 대번에 마공의 옆구리를 낚아챘다. 마공은 별 저항 없이 선선히 따라나섰다.

「계가나 보고 갑시다.」

마공의 말에 잠시 어리둥절하던 송강이 빠른 속도로 계가를 마무리하자 흑의 반면 아홉 집 승으로 덤을 제하고도 송강이 석 집 반을 남겼다(그 당시는 덤이 5집 반), 끌려가면서 마공이 말했다.

「역시 우리는 방내기 체질이라 카이!」

그리고 마공은 독립군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개처럼 끌려갔다. 다음날 텔레비전을 비롯한 각 일간지에 마공의 기사가 대서 특필됐다. 기가 막히게도 마공이 꾸준히 관심을 보여 왔던 주류회사 폭발물 사건의 주범은 바로 마공 김월출이었다.

수사중인 형사들이 한 시민의 제보를 받고 기원으로 몰려들어 폭발물 사건의 주범으로 마공을 검거한 것이었다. 그 며칠 동안 마공은 연일 매스컴에 오르내리며 세인의 관심을 집중시켰다. 카메라 앞에서 고개를 치켜든 채 냉소적인 그의 미소는 그 당시 세간의 화제가 되었다. 마공의 행동은 흡사 양심수나 민주 투사를 방불케 했다.

그러나 마공은 결정적인 패착을 놓고 말았다. 조사 과정에서 사람들이 몰랐던 마공의 패착은 드러났고, 마공이 노렸던 마지막 승부수는 결국 무위로 돌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