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이 박 사범! 폭발물 사건 현상금이 100만 원 올랐더라.」

마공은 그 사건에 유독 관심이 많다. 틈만 나면 그 사건 이야기다.

「우리 그 사람 찾아 다니자.」

「왜요. 찾아서 신고하게요?」

민수는 송강을 좋아했으나 마공도 결코 싫어할 수 없는 인물이었다. 빈자와 약자에게 마공은 도량이 넓었고 그 반대편 사람들은 애써 싫어했다. 민수가 보기에 성품은 삐뚤어져 괴팍했으나 마공은 천성이 선량한 사람이었다.

「신고야 할 수 있나. 그 사람들 찾아 갖고 같이 동참해야지.」

「동참을 해요?」

「가들한테 폭탄 만드는 법을 배워 돈이 더 많은 놈들을 치자꼬.」

「에이, 선배님도. 선배님과 저는 바둑이나 두는 게 제일 어울립니다.」

「바둑도 두고, 있는 놈 뒤도 때리고…….」

마공은 뭐가 좋은지 말을 하다 말고 저 혼자 실실 쪼갠다.

「박 사범, 전화!」

원장이 카운터에 앉아 빙그레 웃는다.

「목소리가 기차게 예쁜 서울 아가씬데!」

전화 속의 주인공은 뜻밖에도 민혜였다.

민혜는 새벽 첫차를 타고 내려왔다. 몇 달 만에 만난 그녀는 무척 수척해 보였다.

「그렇찮아도 연락이 없어 궁금했는데.」

「지난 학기 종강하고 지금까지 계속 작업했어.」

「그랬었군. 작업은 잘 돼?」

「그냥 열심히 해.…… 어때?」

「그저 그래.」

「왜 아까운 시간을 기원에서 보내?」

「혜숙이와 통화했어?」

「혜숙씨가 매일 기원에 다닌다고 그러더라.」

민수의 여동생 혜숙이는 지난해 상업계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농협에 취직을 했다. 어머니를 도와 가난한 살림과 어린 동생들을 보살펴 온 누이에게 민수는 늘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계속 기원에 다닐 거야?」

「지금은.」

「학교는 어떡하구?」

「군대 문제도 있고. 더 두고 봐야 할까 봐.」

「이해가 안 가.」

「뭐가?」

「……한 번은 연락이 올 줄 알았는데.」

「…….」

민혜와의 사이에 갈등이 생긴 것은 그녀의 유학 문제가 거론되고부터였다.

외무부에 고급 공무원으로 재직중인 민혜 아버지는 지난 여름부터 민혜에게 꾸준히 유학을 종용했다. 시국이 혼란스러워지자 고위층 자녀들에게는 유학이 유행병처럼 번지고 있었고 민혜 부모들은 외딸인 민혜의 장래를 고려해서 이미 유학중인 그녀의 오빠 곁으로 민혜를 보내는 데 합의를 봤다.

막상 민혜에게 그 말을 들었을 때 민수는 막막했다. 막연하게나마 민수가 꿈꾸어 온 삶과 민혜의 유학은 별개의 모습이었다. 아버지의 권유에 못 이겨 민혜가 자신에게 동반 유학을 제의했을 때 민수는 그때 빈한했던 자신의 어린 시절과 지방에 계신 어머니와 어린 동생들을 생각했다.

민혜를 만난 지 2년 만에 처음으로 민수는 신분의 차이를 실감했고, 민혜와 같이 보냈던 지난날들이, 가령 캠퍼스의 벤치라든지 학교 부근 카페, 둘이서 자주 가던 삼청공원, 인사동 화랑가, 어두워지는 민혜의 집 동네 길, 헤어지기 아쉬워 조금이라도 더 시간을 보냈던 근처 놀이터 등이 추억이나 기억으로 화했다.

대학을 졸업하고 구석진 시골 중학교에서라도 교편을 잡아 생업에 종사하는 것이 민수에겐 우선 목표였고, 민혜와 결혼을 하면 시골집에 화실을 만들어 그녀가 작품 활동을 하는 데 최대한 협조하리라는 것이 그 나름의 복안이었으나 시대의 조류와 급변하는 가치관 혹은 사랑만으로는 불가능한 그 무엇이 민수의 그런 은밀한 행마를 쉽게 잠재워 버렸다.

그러나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민혜는 틀림없이 자신이 최초로 사랑한 여자였고 그녀로 인해 아르바이트로 얼룩진 대학 생활도 즐거웠고, 자칫 자신처럼 살아온 사람이 놓치기 쉬운 젊은 시절의 낭만과 열정을 비교적 손쉽게 가져 보았으며 가난만큼이나 애틋한 사랑을 경험해 보았다는 사실이었다.

그리고 민수가 마지막으로 선택한 길은 떠나는 여자를 잡는 것보다 늘 살아오던 방식대로 뒷처리를 어떻게 할 것인가, 그녀를 보내고 어떻게 살아 남을 것인가 하는 문제였다.

식당 아줌마가 아나고와 병어가 섞인 회를 한 접시 가져왔다. 민수는 식탁 위의 초고추장을 민혜 앞에 놓인 작은 접시에 옮겨 담았다. 민혜는 그저 바다만 바라보고 있었다. 지난 겨울 방학 때에도 그녀와 같이 와 본 적이 있는 바닷가 간이횟집은 바다를 구경하기에 적합한 위치였다.

창문 밖으로 탁 트인 바다가 끝없이 펼쳐져 있고, 바다 기슭에  있는 바위들이 드문드문 밀려드는 파도에 휩싸이곤 했다.

민혜가 굳이 자신을 이곳으로 불러 낸 이유가 무엇일까. 우리의 이별이 가까워졌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일까.

언제나처럼 축 늘어뜨린 머리칼에 약간은 야윈 얼굴이 눈앞에 있었다.

2년 전 선배의 개인전에 갔다가 선배의 여동생 친구로 참석한 그녀를 우연히 알게 되었고, 같은 미술학도로서 그녀와 난 자연스럽게 가까워질 수 있었다. 난 그녀의 풀어헤친 머리와 검고 깊은 눈에 쉽게 공감했고 그녀도 나의 촌스럽긴 하나 털털한 성격을 거부감 없이 받아들였다. 그때부터 우린 서로 좋아했고 하루가 멀다 하고 만났다. 그리고 2년의 세월이 흘렀을 뿐인데, 난 소주를 마시고 민혜는 바다를 바라보고 있다. 정말 이런 날이 올 줄은 상상도 못했다.

「뭘 생각해?」

「우리.」

「우리라고?」

「응.」

「…….」

「나 어쩌면…… 이번 방학중에…… 떠나게 될지 몰라.」

「…….」

「왜 아무 말이 없어?」

「그럴 것 같았으니까.」

「…….」

「아무튼 가게 되면 열심히 해.」

「나중에 올 거지?」

「글쎄, 내가 그럴 수 있을까.」

「내가 힘이 되어 줄게.」

「우리 건배하자.」

「건배?」

「너의 유학을 위해.」

「정말이야?」

「그래.」

「미안해.」

「아냐.」

바다 기슭 위로 겨울 철새가 무리를 지어 날아갔다. 그날 민혜는 내내 바다만 바라보다가 저녁 기차로 올라가 버렸다.

역에서 기차가 멀어질 때, 사랑한다는 말이라도 해 볼 걸…… 민수는 후회했다. 역광장을 걸어 나오며 문득 민혜와 같이 자주 드나들었던 학교 앞 분식집과 자정이 가까운 시각에 항상 민혜를 바래다 주고 돌아오던 콘크리트 바닥의 담 높은 동네가 생각났다.

그녀와 헤어지고 며칠 동안 방구석에 틀어박혀 두문불출한 채 황순원의 『일월』,『나무들 비탈에 서다』, 『카인의 후예』 등의 장편 소설과 김동리, 오영수의 여러 작품들을 온종일 읽었다. 그리고 다시 기원에 나갔을 때 이인수 영감이 죽었다는 갑작스런 소식을 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