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둑이 시작되고 평사는 긴 시간 내내 한결같은 자세다. 허리를 구부린 채 고개는 반상을 향해 약간 숙이고 있는, 흡사 석고처럼 굳어 있는 형상이다. 그 자세로 긴 시간 반상을 노려보던 평사가 난데없이 고함을 쳤다.

「술!」

평사가 엔도에게 술을 요구했다. 시라이시는 자신의 귀를 믿을 수 없었다.

술이라니? 승부사가 대국 도중에 술이라니? 승부에 치명적인 술을 달라니…….

잠시 후 엔도가 쇼오추(일본 소주)를 한 병 구해 왔다. 평사는 유리잔에 술을 가득 붓더니 단숨에 들이켰다.

피를 말리는 평사의 장고가 계속된다. 피골이 상접하여 뼈만 앙상하게 남은 얼굴이 욕망과 고통으로 일그러진다. 이윽고 평사의 눈에서 한 줄기 붉은 빛이 새어 나온다. 빛은 이내 거센 불길이 되어 반상을 집어삼킬 듯 활활 타오른다.

드디어 평사의 손이 반상 위에 떨어졌다. 순간 대국장 안의 사람들은 모두 제 눈을 의심했다. 사람들은 어안이 벙벙해 서로를 쳐다본다. 오랜 장고 끝에 평사는 시라이시의 의표를 깨고 중앙 흑말 다섯 점을 장악해 버렸다.

이놈이! 이 시체 같은 조센징이!

시라이시의 관자놀이가 펄떡거리기 시작한다.

이제 한 수면 자신의 대마가 완벽하게 죽어 나자빠지는 판에 이런 무모한 승부로 나오다니.

시라이시는 분노한다. 승패를 떠나 평사가 자신을 모욕하는 느낌마저 든다. 시라이시는 어금니를 욱씬 깨문다. 시라이시는 마음을 진정시키며 떨리는 손으로 돌을 집어 들어 마침내 백척간두에 서 있는 평사의 대마를 기어이 잡아 버린다.

이제 바둑은 끝났다.

시라이시는 울렁거리는 마음을 억제하며 주위를 휘 둘러본다.

시라이시 전주 얼굴에 화색이 돈다. 반대로 평사의 전주 엔도의 얼굴은 침울하다.

대국장 안에 있는 대다수의 사람들은 시라이시의 생각처럼 승부가 끝났다고 여긴다.

평사의 표정은 무덤덤하다. 대마를 죽여 승부를 그르친 사람의 얼굴치고는 오히려 평온한 기운마저 감돈다. 평사는 돌을 들어 지금까지와는 달리 부드러운 자세로 다음 수를 착수한다. 대마를 죽인 대가로 중앙의 한 곳을 선수로 틀어막는데, 예정된 수순이라 하나 막상 돌이 놓여지고 보니 중앙이 제법 모양을 갖춘다. 시라이시가 곧바로 응수하자 평사가 이번엔 변 쪽에서 선수를 강요한다. 시라이시가 고개를 갸우뚱한다.

무슨 의미일까. 선수가 아닌데 왜 놓는 것일까. 승부를 포기했단 말인가. 이제 중앙으로 한 칸 뛰면 바둑은 끝이다. 승부가 예상대로 쉽게 막을 내리는군.

시라이시는 혹시나 싶어 마지막으로 평사가 놓은 수에 대해 선수의 여부를 검토한다. 한참을 들여다보던 시라이시가 별안간 한숨을 푹 내쉬며 자신의 머리를 손으로 툭툭 친다.

큰일 날 뻔했군. 기껏 속임수로 마지막 승부수를 띄우다니.

평사가 놓은 수는 상대가 손을 빼면 교묘한 수순에 의해 죽은 대마가 한 수 늘어진 패가 된다. 결과적으로 평사의 착수는 절묘한 선수 활용이었으나 이미 승기를 잡았다고 생각한 시라이시는 평사의 수를 암수로 오인한다.

패가 나면 판세가 복잡해질 수도 있다. 한 수 늘어진 패이기는 하나 패가 성립되면 그에게 승부처를 제공할 수도 있다. 바보 같은 사람. 내가 그런 정도를 착각해서 대세를 그르칠 줄 알았던가. 변이 선수가 되더라도 승부는 불변이다. 몇 집이 남아도 이기면 그만이 아닌가.

시라이시가 시비의 여지를 제거한다. 그로써 평사의 대마는 완전히 절명했다.

평사가 빈 유리잔에 병에 남은 술을 마저 부었다. 시라이시가 술을 따르는 평사를 본다. 평사는 태연하게 그 술을 마신다. 시라이시가 문득 이상한 느낌을 받는다.

이상하다. 뭔가 모르게 이상하다. 불현듯이 어떤 압박감 같은 것이 엄습한다.

시라이시는 무심코 반면을 바라본다. 반면을 찬찬히 훑어보던 시라이시가 깜짝 놀란다.

스무 마리가 넘는 백의 대마를 잡았건만 중앙의 다섯 점을 뜯기고 생각지도 못한 곳을 백에게 선수로 허용하자 의외로 승부 차이는 크지 못했다. 대마를 잡은 흑의 집만 50호가 넘는지라 열 집 이상은 족히 앞서 간다고 장담했건만 단 한 수의 선수에 의해서 중앙이 두터워지고 더구나 백이 둘 차례가 아닌가.

시라이시는 초조해진다. 그는 침을 꿀꺽 삼키며 다음 수를 기다린다. 평사가 뼈만 앙상한 손으로 유유히 선수로 틀어막은 변과 흑 다섯 점을 잡은 중앙의 세력을 비스듬히 연결하자 평사의 진지가 순식간에 깊어진다. 시라이시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한다. 단 두 수만에 바둑이 귀신에게 홀린 것처럼 종잡을 수 없는 형국으로 변하고 있었다.

시라이시가 자세를 고쳐 잡고 황급히 계가를 해 본다.

한 번…… 두 번…… 세 번…….

시라이시의 얼굴이 이번엔 파랗게 질린다. 아무리 계가를 해 봐도 바둑은 이미 미세해졌고 차라리 백이 두텁지 않은가. 시라이시의 눈앞이 캄캄해진다. 둔기로 머리를 맞은 것처럼 휘청한다.

영문을 모른 채 어리둥절하던 사람들은 비로소 사태가 심상찮음을 깨닫고 대국실 안에 작은 소요가 일어난다. 굳어 있던 엔도의 얼굴이 펴진다. 엔도는 두 주먹을 꽉 틀어쥐고 호흡을 가다듬는다. 뭔지는 몰라도 승부가 새로운 국면을 맞고 있다는 걸 그는 직감적으로 감지한다.

대국실은 다시 적막에 빠진다. 평사와 마주하고 있는 시라이시는 얼이 빠진 채 반상을 처연히 내려다본다. 시라이시의 얼굴에 후회의 빛이 역력하다.

시라이시는 뒤늦게 깨닫는다.

애당초 그는 모든 수를 읽고 있었다. 끝없이 공세를 취하면서도 그는 나름대로 집의 균형을 유지해 나갔고 대마를 죽여 중앙을 키워 나가는 절묘하다 못해 신묘(神妙)한 선수 활용도 수십 수 전에 이미 그의 머리 속에 그려져 있었다. 어쩌면 그는 초반부터 지금까지의 변화를 모조리 예측하고 있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돌이켜 보면 전판에 걸쳐 한 번도 자신에게 유리한 적이 없었고 그의 대마를 잡는 대신 자신의 중앙 흑 다섯 점이 살아오더라도 역시 자신이 이긴다는 보장은 절대 없었다. 접전에는 누구보다 자신이 있었지만 그의 현란한 수법 앞에는 한 수 뒤지는 감이 있었고 자신의 주 장기인 형세 판단마저 시공을 초월한 그의 행마에 가려 그 정확도를 상실했다. 승부의 수순은 그렇게 흘러 왔던 것이다.

시라이시는 눈을 감고 상념에 잠긴다.

지난 10년 세월.

기예를 터득하기 위해 인적 없는 산 속에서 숱한 세월을 인내와 외로움 속에 몸부림쳤다. 앞서간 명인들의 흔적을 더듬으며 수없이 많은 날들을 불면으로 지새웠고, 그들의 비수(秘手)를 헤아리지 못해 절망 속에 방황했던 날은 또 얼마였던가.

그리고 세상에 나온 지 3년. 빼어난 기량으로 강호의 뭇 강자들을 굴복시키고 서서히 기계를 정복해 나갔다. 이제 최정상에 올라 천하를 호령하는 순간 느닷없이 나타난 불가사의한 인물에게 자신이 그 동안 쌓아 올린 탑이 하루아침에 무너지려 하고 있다.

10년 세월이 너무 원통하다. 단 한 번의 패배가 승부의 전부는 아닐지라도 승부도 승부 나름. 이 한 판의 승부는 의미가 다르다. 5천 원이라는 거액이 문제가 아니다. 이 한 판으로 나는 평생 승부에서 헤어날 수 없으리라.

시라이시의 마음속에 통한의 눈물이 흐른다.

그럴 수는 없다. 그럴 수는 없다…….

시라이시는 승부를 부인한다. 감겼던 시라이시의 눈이 번쩍 뜨였다.

이대로 질 수는 없다. 바둑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백이 약간 두텁긴 하나 집의 균형은 어느 정도 어울리고 있다. 그도 사람인 이상 약점이 있을 것이다. 이대로 무너질 순 없다. 반상은 아직도 넓지 않은가.

시라이시는 가슴 밑바닥에서 절규하는 마지막 투혼을 불러일으킨다. 반상을 한동안 노려보던 시라이시는 돌을 들어 백의 중앙을 삭감할 수 있는 최대치의 자리에 힘차게 두드린다.

평사는 시라이시가 착점한 돌을 무심히 바라본다. 무심한 눈길은 이내 바둑판 속으로 혼곤히 젖어든다. 반상 위로 바람이 일고 붉게 붉게 노을이 탄다.

언제였던가.

처음 스승을 따라 고향을 떠나던 날. 어느 산간 지방을 지나 들길을 걸어가고 있었다.

멀리 보이는 마을에서는 집집마다 굴뚝에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어린 평사가 불쑥 스승에게 물었다.

「저…… 바둑은 누가 만들었나요?」

스승은 아무런 대답이 없다. 스승은 계속 걸어갔다. 한참을 걸어가던 스승의 발길이 멎었다.

「평사야.」

「…….」

「저기를 봐라.」

스승이 가리키는 곳으로 고개를 돌린 평사는 자신도 모르게 비명을 질렀다.

아! 온 들판에 노을이 지고 있었다.

하늘과 땅이, 온 천지가 붉게 물들고 있었다.

스승은 하늘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바둑은…… 하늘이 만들었다…….」

평사는 스승을 따라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붉은 노을이 스승과 자신의 머리 위로 쏟아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