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무실에서 눈을 뜬 평사는 자신의 모습을 믿을 수 없었다. 누가 치료를 했는지 모르지만 거친 솜씨일망정 부러진 다리에는 부목이 대여 있고 가슴 또한 압박붕대로 칭칭 감겨 있었다. 통증이 조금씩 밀려왔다.

분명 꿈은 아니었다. 침목 아래 깔리면서 이젠 속절없이 죽었구나 생각했었는데 의외로 치료를 받고 의무실에까지 입실하여 있다니…… 지난번 소장 시절에는 상상도 못할 조치였다.

평사는 근래 들어 한 달에 한두 번씩 가슴에 통증을 느끼곤 했다. 대단한 통증은 아니지만 통증이 오는 짧은 몇 초간은 몸을 움직일 수조차 없었다. 일종의 근육 마비 현상이라고 생각되었으나 하필 그 시간에 통증이 올 줄은 몰랐다. 순간적인 통증 때문에 앞 사람과 보조를 맞출 수 없었고 균형이 뒤틀리자 침목은 순식간에 무너졌다. 뻔히 보면서도 평사는 덮쳐 오는 침목을 피할 수가 없었다.

침목에 깔리는 순간 평사는, 이제는 죽었구나 생각했다. 침목에 깔리는 이상 몸이 온전할 리 없고 다치는 사람이 어떻게 처리되는가를 너무나 잘 알고 있던 평사는 순간적으로 모든 걸 체념했다.

그런데 입실이라니…… 이것도 새 소장이 오고 난 후 겪는 변화의 하나인가…….

근래 들어 새 소장이 부임해 오고 징용인들은 커다란 변화를 겪고 있었다.

그 첫째가 작업 현장까지 가는 이동 수단이었다. 새 소장이 오고 1주일 만의 일이었다. 이제까지 징용인들은 아침에는 거의 뛰다시피 현장으로 쫓겨 갔고 밤늦게 돌아올 때는 지친 몸을 이끌고 걸어서 숙사로 돌아왔다. 철도 공사가 진척을 보일수록 이동 거리는 늘어만 갔고 그것이 상당히 징용인들을 지치게 만들었다.

그런데 새 소장은 부임 1주일 만에 군용트럭 화물칸을 개조해 징용인들을 실어 나르게 했다. 물론 탈출을 염려해 빗장을 단단히 채웠고, 옆 사람에 치여 가슴이 답답해질 정도로 꽉꽉 채우긴 했으나 징용인들 입장에선 예전에 비해 작업장을 오가기가 훨씬 수월했다.

두 번째 변화는 작업 시간의 단축이었다.

어느 날 소장은 전 징용인을 모아 놓고 한 가지 약속을 했다.

「이 자리를 빌려 소장은 여러분에게 약속한다. 지금까지의 작업 성과에 비해 매일 그 실적에서 1할만 더 올리면 마치는 작업 시간이 몇 시가 되든간에 숙사로 돌아와 쉬게 해주겠다.」

소장은 징용인들의 맥을 정확히 짚었던 것이다.

실상 그때까지 징용인들은 채찍질을 피해 혹사당하고 지친 몸을 사려 온 게 사실이었다. 사람들은 소장의 약속에 긴가민가 하면서도 속는 셈치고 열심히 일해 소장이 제시한 목표를 채워 보았다.

소장의 약속은 사실이었다. 저녁 일곱 시에 목표를 채웠던 그날, 징용인들은 처음으로 아무 조건 없이 숙사로 돌아와 푹 쉴 수 있었다. 그 다음부터 사람들이 숙사로 돌아오는 시간은 여덟 시를 넘기는 일이 거의 없었다.

그것만 해도 징용인들 입장에서는 상상조차 해 본 적이 없는 변화인데 이제 식사까지도 전에 비해 한결 나아졌다. 그때까지 관례적으로 양곡과 부식을 빼돌리던 군인들의 행위를 금지시키고 그 중 일부를 징용인들에게 돌린 결과였다.

도저히 믿기지 않는 변화였다.

빈번하게 죽어 나가던 징용인의 수는 현저하게 줄어들었고 일부 징용인들은 현재의 소장을 멋쟁이 소장이라고 추켜세우는 일까지 있었다.

하지만 평사의 생각은 달랐다. 새 소장이 몰고 온 변화는 조금이라도 더 징용인의 노동력을 착취하려는 교묘한 술책으로 여겨졌다. 다만 그것을 나쁘지 않은 방향으로 끌고 가는 것이기에 비난하고 싶지 않을 뿐이었다.

그러나 이건 정말 뜻밖이군.

평사는 자신의 가슴에 감겨 있는 붕대를 가만히 만져 보았다. 붕대 특유의 부드러운 촉감이 손끝에서 만져졌다. 통증이 조금씩 가라앉고 졸음이 밀려왔다.

평사는 혼곤히 밀려오는 잠 속으로 깊이 빠져 들었다.

「밖에서 바둑을 두었다지?」

소장실에서 뜻밖의 질문을 받는 순간 평사는 확연히 깨달을 수 있었다.

지난 한 달 동안 내내 품어 왔던 괴이하고 수상쩍은 치료의 실체를…… 그것은 결국 바둑이었다.

여기까지 와서도 바둑이란 말인가…….

새삼 바둑과 자신의 질긴 인연에 형언할 수 없는 비감마저 들었다. 생각해 보면 자신에게 일어났던 모든 인간 관계의 시작과 끝은 바둑이었다. 자신을 이 무저(無低)의 고통 속에 밀어 넣은 것도 바둑이었고 죽음에서 구해 준 것도 바둑이었다.

원인 모를 한을 곱씹으며 이 거리 저 거리로 떠돌게 한 것도 바둑이었고 회색빛 안개 속에 자신을 지쳐 잠들게 한 것도 바둑이었다. 그 옛날, 사랑에 든 손님의 바둑을 어깨 너머로 우연히 구경한 이래로 줄곧. 바로 지금, 목발에 의지해 이 차가운 수용소에서 깊은 절망 속에 몸부림치는 이때까지.

「자네 탄원서에 그렇게 기록돼 있던데?」

「…….」

소장이 초인종을 누르자 옆방에서 대기하고 있던 당번병이 들어와 부동자세를 취했다.

「바둑판을 가져와.」

당번병은 소장실 구석에 놓여 있는 세 치 두께의 바둑판을 조심스럽게 탁자 위에 올려 놓았다.

「나에게 바둑을 이겨라. 그러면 넌 편안하게 지낼 수 있다.」

평사는 바둑판을 내려다보았다. 흡사 환각을 바라보는 듯한 몽환의 시선으로. 그의 몽롱한 시선 너머에 유년의 그 암담했던 기억이 애환으로 부서져 내리고 있었고, 암울한 시대의 한 구석에 내팽개쳐진 한 불운한 기객의 몰락이 아픔으로 흩어져 내리고 있었다. 만감이 교차하고 있었다.

평사는 망연히 손을 내밀어 돌을 잡았다. 그 손, 말라 비틀어져 등걸이 앙상하게 드러나 있는 그 손. 처절했던 세월의 잔영이 백지(白紙) 같은 슬픔으로 녹아 있는 그 손이 돌을 움켜 잡는다. 파란(波瀾)으로 가득했던 평사의 조락(凋落)한 삶이 그 안에 있었다.

갑작스레 목이 메어 와 평사는 고개를 숙인 채 하염없이 바둑판만 응시했다. 그런 평사의 감정이 전이(轉移)된 듯 소장도 한동안 숙연히 앉아 있었다.

평사의 기억에는 어머니가 없었다. 철없이 어머니를 입에 올릴 적마다 못 들은 척 묵묵히 일만 하시던 아버지. 아버지가 꼭 한 번 자신에게 어머니를 이야기해 준 적이 있었다.

 ‘네 어미는 저 산 너머에 있다.’

그때부터 평사는 어머니가 보고 싶으면 먼 산을 바라봤다. 그 산 너머엔 온갖 그리움이, 소망이…… 어머니의 기억들이 있었다.

어머니는 죽어 먼 산 속에 묻혔다. 묻힐 땅 한 평 없는 신세를 한탄하며 아버지는 어느 비 오는 날 죽은 어머니를 지게에 지고 산 속으로 떠났다.

아버지가 임종했다는 소식을 듣고 도장에서 뒤늦게 달려왔을 때 아버지의 시신은 부패한 채 며칠이 지나 있었다. 평사는 생전에 아버지가 어머니에게 그랬던 것처럼 아버지를 들쳐 업고 깊은 산 속에 묻었다.

무덤 위에 술 한잔을 뿌리고 돌아서며 평사는 한없이 울었다. 아버지가 살아온 그 서러운 유적(遺蹟) 위로 한 마리 산새가 날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