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 천하에 보기 드문 신수가 있다고 하자. 그러나 그것이 아무리 빛나는 신수라 하더라도 결국 한 수에 지나지 않는 법. 제아무리 기예가 출중한 사람일지라도 승부는 어쩌지 못한다.」

다음 순간 평사를 노려보던 스승의 얼굴이 갑자기 허해진다.

「바둑에서 신수란 없다. 승부의 틀 속에서 보면 모든 수는 이기기 위한 과정에 불과하다. 나는 평생 승부에 임해서 한 번도 수(手)를 염두에 둔 적이 없다. 그저 한 수 한 수마다 승부를 생각했고, 이기기 위해 최선의 수를 찾아 반상을 헤매고 또 헤매고 다녔다. 매 수마다 승리를 생각했고 스스로를 쉴 새 없이 채찍질했다. 과수를 두거나 실착을 범할 때마다 자신에게 온갖 질책을 퍼부었고 다시는 그런 수를 놓지 말기를 수없이 다짐했다.」

그것은 참으로 스승답지 않은 이야기였다. 평사에게 있어 스승 여목은 도인의 품격을 지닌 거인이었다. 스승의 바둑관은 자연의 흐름과 동화되어 있어서 승부에 연연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는데 스승의 그 몇 마디 말로 스승 또한 얼마나 승부에 집착했고 지지 않기 위해 몸부림쳤는가를 알 수 있었다.

그 이야기를 하는 순간 그는 이미 예(藝)와 도(道)를 숭상하는 스승이 아닌 한갓 승리에 집착하는 평범한 승부사에 불과했다. 그도 역시 완전한 인간이 아니었고 또한 완전한 승부사도 아니었다. 힘든 승부에 임하면 가슴 저리는 비애와 고통을 느끼는 한 사람의 평범한 인간이었던 것이다.

뜰을 가로질러 어둠 속으로 묻혀 가는 스승의 뒷모습은 거꾸정하게 어깨가 굽어 있었다.

일생을 바둑과 더불어 살아온 스승에게 남은 것은 희미한 영욕의 그림자뿐이었다.

「그분이 누구시죠?」

준코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평사를 바라본다. 처녀의 싱그러운 체취가 평사의 코끝에 다가왔다.

「……내게 바둑을 가르쳐 준 사람이오.」

평사의 대답은 딱딱하고 준코는 더 이상 캐묻지 않는다.

「그분의 논리에 따른다면 우리 일본 바둑에 남아 있는 불멸의 금자탑인 고금의 묘수가 그 빛을 잃고 말겠군요.」

「고금의 묘수라니, 그게 무엇이오?」

준코는 어이가 없었다. 자신이 아는 한 평사의 바둑은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높은 경지에 올라 있었지만 그는 의외로 바둑에 얽힌 상식이 너무나 일천했다. 고금의 묘수만 하더라도 바둑을 모르는 사람들까지 알고 있을 정도로 바둑을 두는 사람에게 있어서는 극히 초보적인 상식이었는데 그가 그것조차 모른다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준코는 고금의 묘수에 대해 상세하게 설명했다.

「기나긴 일본 바둑 역사상 세 번에 걸친 고금의 묘수가 있었지요. 그 첫째는 11세 홍임보 겐죠(元丈)와 야스이가의 지도쿠(知得)간에 두어진, 지금으로부터 백 수십 년 전에 두어진 바둑이었는데 야스이가의 지도쿠가 흑을 쥐고 둔 69수를 말하지요. 중반에 공배를 두었다 해서 그 69수가 묘수냐 아니면 단순한 공배를 두었느냐 말이 많았고 또 그에 따른 의견이 분분했지요. 그러나 결과적으로 지도쿠가 겐죠를 완벽하게 밀어붙여서 불계승하였기 때문에 그 수를 공배의 묘수라고 지금도 칭송하고 있지요.」

고금의 묘수 두 번째인 ‘죠와(丈和)의 3묘수’에 대한 준코의 설명은 길었다.

수백 년 일본 위기사상(圍碁史上) 가장 피비린내 나는 전투인 토혈국(吐血局)은 그 성립 배경에서부터 결말에 이르기까지 파란만장한 권모술수로 얼룩져 있었기에 준코는 세세하게 그 전말을 소개했다.

토혈국의 주역은 당시 홍임보가 당주 죠와와 일본 바둑사에 길이 남을 풍운아 겐낭 인세키(幻庵因碩), 그리고 그의 제자 아카보시 인데쓰(亦星因徹), 그 세 사람이었다.

먼저 그 상황을 정리해 보면 이러했다.

9세 홍임보 사쓰겡(察元)이 죽은 후 메이진 고도꼬로(名人碁所)는 공석인 채로 남겨져 있었다. 이를 계승하여 그 자리를 차지하려는 죠와, 그에 대항하여 명인기소의 집념을 불태우는 겐낭 인세키의 갈등이 첨예하게 대립하였다.

발단은 겐낭 인세키의 고도화된 술책에서 비롯됐다. 명인기소의 야망을 지닌 겐낭은 7단의 저단으로서는 명인을 바라볼 수 없었기에 먼저 8단의 승단을 필요로 하게 되었다. 그렇게 해야만 쟁기(爭碁)든, 또 다른 수를 쓰든 명인의 자리를 넘볼 수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8단의 자리에 오르기 위해 겐낭은 우선 은밀하게 야스이가(安井家)의 지도쿠 8단을 찾아갔다.

「이미 아시고 계시겠지만 죠와는 명인기소를 차지하려고 하야시가의 겜비(元美)를 앞세워 높은 분들을 찾아 다니고 있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이 사실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주위 모든 사람에게서 명인의 그릇이라고 인정받았지만 한 번도 그 자리를 넘본 적이 없는 공배의 묘수 주인공인 지도쿠는 솔직하게 자신의 신념을 이야기했다.

「명인기소는 억지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오. 기량과 인품이 탁월한 자가 추대를 받아 자연스럽게 되어야지요. 죠와에겐 아직 시기상조라고 보오.」

「그것을 저지하는 길은 쟁기밖에 없는데 아시다시피 준명인(8단)은 선생님뿐이신데 몇 년이 걸릴지도 모르는 쟁기에 선생님께서 직접 나서기는 여러 가지 여건상 어렵지 않겠습니까 ? 아무쪼록 저를 8단으로 승단시켜 주시면 제가 죠와와 쟁기를 벌여 그의 명인기소 취임을 막겠습니다.」

겐낭에게 설득당한 지도쿠의 추천에 의해 겐낭은 손쉽게 8단의 자리에 오르게 되었다. 그런데 막상 죠와의 명인 승격에 대한 회의가 열렸을 때 겐낭은 교묘하게 지도쿠와의 약속을 외면했다.

화가 머리끝까지 치민 지도쿠는 노구를 이끌고 죠와에게 쟁기를 신청했다. 겐낭의 고단수 술책은 일단 8단으로 승단한 후 지도쿠와 죠와를 대결시키고 피투성이가 되도록 싸우게 한 후 자신은 어부지리를 노려 그 승자와 대결함으로써 명인기소에 오르려는 심모 원려가 숨어 있었다.

그러나 겐낭의 계산은 뜻밖에 지도쿠가 홧병으로 앓아 눕게 되면서 빗나갔다. 어쩔 수 없이 겐낭은 자신이 직접 죠와와 쟁기를 결심하게 되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죠와측에서 엉뚱한 제의가 들어왔다.

그 제의는 첫째, 겐낭은 과거의 원한과 쟁기의 신청을 취소하고 죠와의 명인기소 취임에 찬성한다.

둘째, 죠와는 기소 재위 6년 후 그 자리를 겐낭에게 양도하며 그 대가로 겐낭은 200냥을 홍임보가에 기증한다.

셋째, 서로의 신뢰를 위해 친자식을 인질로 교환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