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그것은 사람의 가치관뿐만 아니라, 삶을 바꾸기도 한다.

지금 설민국의 손에 들려 있는 책은 무기였다. 격문이었다. 뜻있는 자들에게 봉기를 촉구하는 대자보였다. 다혈질인 그의 손에 들려 있는 책이 그녀는 무척 위태로웠다.

“나도 그 책 읽었어. 우리나라가 일본에 의해 계획된 경제적 침략을 당한 것이 맞아. 그렇지만 우리는 국민의 저력을 또다시 보여줬어. 제2의 국채보상운동으로 불리는 금모으기 운동 알잖아. 이 시대의 의병활동으로 평가 받았어. 무려 351만 명이 동참했고 227톤이라는 상상하기 힘든 양의 금이 모아졌잖아. 무려 18억 달러의 가치래. 일본은 물론 세계가 경이로운 일이라고 감탄을 했지. 일본 정치인들은 이 운동을 보고 좌절을 느꼈대. 한국은 도저히 쓰러트릴 수가 없는 나라라고. 임진왜란때 도요토미가 말했다지. 왕이 도망을 갔는데 백성들이 나서서 의병활동을 벌이는 일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고. 그로 인해 토요토미는 조선 정벌이 실패할 것임을 알았대.”

그녀의 말에도 설민국은 묵묵부답이었다. 다만, 그의 울분이 그 사이 조금 누그러져 있었다. 거칠던 숨소리가 조금 잦아들어 있었다.

그녀는 그의 손에 들려 있는 책을 받아들었다. 그리고 그의 손을 잡았다.

“자기가 느끼는 울분 충분히 공감해. 나도 분해 죽겠어. 왜 우리가 자꾸만 일본에게 당하는지. 일본은 왜 자꾸만 우리를 괴롭히고 침략하는지. 저들은 강자에 약하고 약자에 강한 자들이야. 우리가 강해지면 저들은 절대 우리 앞에서 고개를 못 들어. 우리가 강해지도록 열심히 살자.”

“자기도 잘 알지? 우리나라가 산업화에 뒤져서 일본에게 침략당한 거. 우리나라 양반들이 갓 쓰고 도포자락 휘날리며 긴 담뱃대 물고 팔자걸음 걸을 때, 일본은 세계 최대 전함 야마토와 무사시를 가지고 태평양을 호령했고, 함상전투기 제로센을 띄워 미국과 대등한 전투를 치른 나라야. 과연 우리나라가 일본보다 강해질 날이 있을까? 정말 우리는 그런 희망을 가져도 되는 나라인가? 먼 훗날에 그런 시절이 올 수도 있겠지. 그렇지만 내가 사는 세상에서는 어려울 것 같아. 그럼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지? 우리가 강해지는 날이 오기만 기다리며 계속 이렇게 일본에게 당해야 돼? 우리도 뭔가는 해야 하고 해볼 수 있는 거 아냐?”

그의 목소리는 차라리 절규였다. 그의 말은 하나의 잘못됨도 없었다. 그래서 그녀는 말문이 막혀 더 이상 다른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자기가 그런 생각들에 마음이 쓰여서 한동안 말도 안하고 웃음도 잃고 지냈구나. 나는 자기가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무척 고맙고 자랑스럽다.”

그녀의 응원에 그도 마주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설민국은 이재길 변호사와 마주 앉았다.

“이렇게 불쑥 찾아와서 죄송합니다.”

“오랜만이네요. 여사님은 잘 지내세요?”

“연세가 있으셔서인지 건강이 나빠지셔서 병원에 계십니다.”

“그러실 연세도 되었지요. 그렇지만 여사님 같은 분이 오래도록 건강히 계셔서 후대들에게 정신적인 지주가 돼주셔야 하는데.”

“곧 자리를 털고 일어나시겠지요. 워낙 정신력이 강인한 분 이시니까요.”

간략하게 인사말을 나눈 후, 그는 말을 이어갔다.

“제가 오늘 찾아 뵌 것은 변호사님의 책을 읽고 나니 가만히 있을 수가 없어서입니다.”

이재길은 그의 말을 듣고 가만히 눈을 감았다.

‘반향이 있을 것으로 생각은 했지만, 예상보다 더 크구나.’

벌써 그에게 책을 읽었노라며, 전화를 하거나 찾아온 이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드러난 일들만으로도 그렇게 일본은 우리를 침략하고 수탈을 해나갔지요. 나는 그 사실을 잊지 말자고 세상에 알리려고 했을 뿐인데 예상외로 반응이 커요.”

“저처럼 이렇게 찾아온 사람이 있었나보네요.”

“예.”

“변호사님! 저는 우리가 저들에게 침략을 당했다고 반성만 하고 있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어떠한 방법으로든 응징을 하지 않으면 저들은 우리를 너무 하찮은 존재로 생각하고 침략을 반복하게 됩니다.”

“물론 저들을 응징해야겠지요. 그렇지만 지금 우리가 가진 방법은 오직 우리가 강해지는 길밖에 없어요. 군사력이나 경제력은 물론 국제사회에서의 영향력으로도 우리는 아직 저들의 상대가 못되는 것 잘 아시잖아요.”

그는 설민국을 진정시키려 노력했다. 의분을 못 이겨 이렇게 감정을 토로하는 사람들이 많음이 그는 한편으로 고맙고 다행스러웠다. 아직 대한민국 국민들의 정신이 살아있음을 느꼈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실을 냉정하게 인식해야 했다. 분노로는 어떤 일도 해결하지 못한다.

“그렇다면 변호사님, 한 가지 청이 있습니다.”

이재길은 이 젊은이에게 호의가 생겼다. 최윤경 여사님의 사위로, 괜찮은 청년이라고는 생각했었지만, 이렇게 정의감을 가진 사람이어서 더욱 마음이 끌린 것이다.

“내가 들어 줄 수 있는 것이라면 최대한 해드릴 테니 말해보세요.”

“아까 저처럼 이렇게 찾아오거나 전화를 하는 사람이 많이 있다고 하셨는데요. 저는 그 사람들과 일본인들에게 우리들의 뜻을 전달 할 방법을 찾아보고 싶습니다. 저 하나의 힘보다 여럿이 뭉치면 목소리가 더욱 크게 전달되겠지요.”

그는 비폭력적인 방법을 사용해서 항의하거나 성명을 내는 것도 필요하다는 생각에 설민국의 청을 들어주기로 했다.

최윤경의 건강이 더 악화되었다.

그녀의 의식은 몸을 자꾸만 드나들었다. 의식이 몸을 지배하는 시간에도 그의 뇌는 고장 난 영사기인 듯 상여집의 박혁을 자꾸만 반복해서 띄어놓았다. 그녀의 삶 중에서 가장 아름답고 환희에 찼던 시간을 반추하면서 두뇌는 스러지는 육체의 고통을 이겨내도록 돕는 것 같았다. 육신이 정신을 지배하는지, 정신이 육신을 지배하는지 구분이 필요하지 않았다. 때로는 서로는 서로를 돕고 경계하기도 한다. 의식이 정신인지 알 수는 없지만, 의식을 잃으면 정신도 혼미해지니 둘은 불가분의 관계가 아닐까.

이제 육신이 기능을 마치려하자 의식은 육체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남은 역할을 수행하고 있었다. 마치 수술을 위해 마취를 하면 뇌는 육체가 칼에 찢기고 피가 솟아남에도 고통을 느끼지 못하듯이, 동사하는 사람의 육체에 닥치는 고통이 극에 달하면 뇌는 몸이 따뜻하게 된 것으로 착각하게 만들어 평온하게 죽을 수 있도록 도와주듯이···

그녀는 그렇게 떠났다.

어떤 사람의 삶은 지극히 평화로운 시기에 태어나 안락하게 일생을 살아내고, 어떤 사람은 끊임없는 전쟁이나 재해에 시달리는 시기에 삶을 얻어 한평생을 힘겨운 사투로 마친다. 그렇지만 힘겨운 시기의 삶이 의미를 가지는지, 평화로운 시기의 삶의 뜻이 큰지 우리는 알아내기가 벅차다. 어떻게 또는 어떤 시기를 살아낸 영혼이 더 가치 있고 영롱할까.

다만 확실한 한 가지는 힘든 시기를 바르게 살아낸 사람의 삶이 후손들에게 더 영광 된다는 점이다. 그것의 표본이 바로 최윤경의 삶이었다. 죽음 앞에 가치가 무슨 의미이고, 영광스러움을 또 무엇에 쓸 것인가. 그것들은 다만 살아있는 자들의 몫일뿐이다. 올바르게 산 사람의 후손들은 그의 죽음에 자부심을 가지게 해주고, 거칠고 악하게 산 사람의 죽음은 그 후손들에게 수치심을 안긴다.

그녀의 영예로운 삶은 후손들에게 영광을 주었기에 모두는 그녀의 죽음을 깊이 애도했다. 독립투사 최윤경은 대한민국 모든 사람들의 조상으로 우뚝 섰고, 모두는 그녀의 정신적인 유산에 의해 자부심을 선물 받았다.

설민국은 남자가 귀한 집안의 사위였기에 장례의 모든 절차와 의식을 주관하였다.

그녀의 육신을 실은 영구차는 국립대전현충원으로 향했다. 고속도로 톨게이트를 나와서 가까운 곳에 위치한 그곳은 경내에 들어서자 잘 다듬어진 단정한 모습으로 자세를 곧게 하여 고인을 맞이하였다. 단정하고 절제된 분위기는 마치 ‘고인의 국가를 위한 헌신에 존경과 감사를 드립니다.’라고 말해주는 듯 했다.

그녀가 깃들 곳은 가장 안쪽에 위치한 애족지사묘역이었다. 벌써 수많은 봉분들이 자리 한 그곳은 앞쪽으로도 넉넉한 여유 부지를 갖추고 있었다. 널찍하게 자리를 잡은 그녀의 자리는 흙을 덜어낸 자리임에도 주변이 깨끗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고인을 맞는 세심함이 유족들의 마음에 담긴 슬픔을 조금 덜어주었다.

국가가 헌신한 국민을 위해 조국이 보내주는 배려를 읽을 수 있었다. 마치 공원과도 같이 꾸며진 그곳이 편안했는지 아이들도 슬픔에만 잠겨 있지 않고 그녀의 마지막을 평온하게 받아들이는 것 같았다.

설민국은 그곳에서 국립묘지에 묻힌다는 의미를 알았다. 그 영광의 의미를 느꼈다. 국가와 민족을 위해 헌신한다는 것이 가치를 가지는 일임을 이해했다. 그로 인해서 그는 국가와 민족을 위해 산다는 것은 고귀하고 품격 있는 일이라는 애국애족의 정신을 마음에 새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