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 화백은 벽송에 덮인 삼베보를 벗긴다. 벽송의 고고한 자태가 눈부시다. 달빛이 반면에 와 닿자 벽송은 한결 심오한 기운을 뿜어 낸다. 적막을 깨고 천도를 비원하는 스님의 독송이 바람을 타고 흐른다.

지장대성위신력 항아사겁설란진

견문첨례일념간 이익인천무량자

해봉처사는 먼 곳으로 가고 있었다. 그가 살아온 모든 속세의 인연을 뒤로 한 채 그는 속세를 떠나 사람이면 누구나 한 번은 가야 할 먼 곳으로 가고 있었다.

어머니는 죽어 고향 앞바다로 돌아가기를 간절히 원했다. 한사코 아버지의 곁으로 가고자 하는 그녀의 유지를 받들어 박 화백은 어머니의 시신을 화장했다.

어머니의 유골을 실은 조각배가 바다 한가운데로 천천히 나아갔다. 등대섬을 돌아드는 어귀에서 세찬 바람이 뱃전으로 불어왔다. 유골함을 열자 하얀 뼛가루가 바람에 으스스 날아갔다. 어머니의 한 생애가 눈꽃처럼 바다 위에 흩어졌다. 살아 생전 가슴에 두었던 사람을 찾아 어머니는 그렇게 마지막 길을 떠났다.

산문 밖에서 목탁소리가 드세어지고 불길이 점차 거세진다. 벽송 속으로 많은 사람들의 얼굴이 지나간다.

여목, 설숙, 평사…….

벽송을 남겨 놓고 그들은 모두 갔다. 그들이 가고 없는 세상에 지금 이 벽송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과연 벽송이 존재할 수 있을까. 이 세상이 진실로 벽송이 존재할 만한 가치가 있는 세상일까. 오히려 벽송이 있어 탐욕과 그릇된 가치관만 후세에 조장하는 게 아닐까. 벽송의 본래 모습은 변질되고 벽송의 겉껍데기만 남아 후세 사람들을 홀리고 이웃을 속이는 것이 아닐까.

갑자기 눈앞이 흐려지고 정신이 몽롱하다. 벽송의 반면이 뒤틀린다. 뒤틀린 반면이 박 화백의 머리 속에서 어지럽게 맴돈다.

진리와 구도의 반(盤)이 아닌 사행(射倖)과 애욕(愛慾)의 반으로 벽송은 살아 남아 긴 세월 슬픔에 젖으리라. 그리하여 두고두고 오욕과 모멸의 날들을 보내리라. 이 혼탁한 세상에 휩쓸려 숱한 명인들의 숨결이 숨쉬고 있는 시대의 명반은 마침내 검고 메마른 사반(死盤)이 되어 탁세(濁世)의 유물로 전락하고 말리라.

이제 스님의 염불은 절정을 향해 치닫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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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다시 벽송 위로 그들의 얼굴이 지나간다. 혼을 부르는 염불소리와 그들의 얼굴이 일체가 되어 박 화백의 뇌리 속에 더욱 깊숙이 파고든다. 갑자기 온몸의 피가 거꾸로 치솟고 가슴이 터질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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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 화백은 벼락을 맞은 사람처럼 아찔해진다.

그럴 수는 없다.

이 세상에 더 이상 벽송의 주인은 없다.

벽송을 구(求)하는 세상은 어쩌면 영원히 없을는지도 모른다.

그래.

이제 벽송을 놓아 주어야 한다.

이 척박한 세상으로부터 벽송을 놓아 주어야 한다.

벽송을 돌려 주자.

벽송을 그들에게 돌려 주자.

벽송을…….

박 화백은 바닥에 있는 삼베보를 집어 허겁지겁 벽송 위에 덮었다. 박 화백은 이미 제정신이 아니었다. 박 화백은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벽송을 가슴에 안았다. 그리고 비틀거리며 밖으로 뛰쳐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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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길이 활활 타올랐다. 스님과 동자승이 그 주위를 돌고 있었다.

박 화백은 달려와 벽송을 가슴에 안은 채 숨을 헐떡거린다.

박 화백은 이미 정신을 놓친 듯 스스로를 주체하지 못하고 눈을 부릅뜬 채 맹렬히 타오르는 불길을 노려보았다.

박 화백의 심장이 쿵쾅쿵쾅 정신없이 뛰었다.

불길은 더욱 거칠게 타오른다. 불길의 뜨거운 기운이 벽송을 안고 있는 박 화백의 가슴속으로 세차게 파고들었다.

박 화백의 마음속에서도 불길이 타오른다. 거역할 수 없는 그 무엇이 박 화백의 내부에서 미친 듯이 몸부림친다. 박 화백은 눈을 감고 벽송을 불길 속으로 던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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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송 주위로 불길이 모여드는가 싶더니 삽시간에 그 불길은 반면을 그슬리며 벽송 위로 번졌다. 불길은 이내 피어 올라 주위를 밝히고 밤하늘에 찬연히 불타 오른다.

벽송이 타고 있었다.

타오르는 불길 속에서 벽송은 한점 흔들림 없이 고고하다. 파란의 세월을 견디어 온 시대의 거목답게 벽송은 장엄한 최후를 맞는다. 몸체로 불이 옮겨 붙자 갑자기 불길은 속도를 내며 허공을 향해 맹렬히 뻗어 나간다. 불티가 사방천지에 흩어지며 거대한 불길은 세상을 집어삼킬 듯 천지를 불태우고 하늘로 치솟는다.

여목의 웅혼(雄魂)이 타고 있었다. 설숙의 심혼(心魂)이 타고 있었다. 평사의 슬픔[悲]이 타고 정 국수의 고뇌[痛]가 타고 있었다.

아아! 동삼의 혼백(魂魄)이 타고 있었다.

박 화백의 눈에서 한 줄기 눈물이 흘러내린다. 잠 못 이루던 밤 꽃잎으로 지던 날들이 한 줄기 눈물이 되어 흘러내린다. 박 화백의 눈물 속으로 벽송의 불길이 넘실넘실 춤을 춘다. 벽송은 최후의 정염을 불태우며 마지막 남은 기운을 쏟아낸다.

수만 가지 번뇌로 세상을 떠돌다 잊혀져 간 기객들의 애환이 꺼져 가는 벽송의 넋이 되어 허공으로 날아간다. 심오한 기운을 동반한 벽송의 넋은 훨훨 날아 달 밝은 밤 공산(空山)을 넘어간다.

이제 벽송은 세속의 인연에서 벗어나 떠날 채비를 서두르고 있었다.

천년의 반(盤)이 그 여명(黎明)을 다하고 있었다.

꺼져 가는 벽송의 몸체에서 마지막으로 생명의 불꽃이 솟아오른다.

마침내 벽송의 형상이 불길 속에서 비틀거린다.

한 왕조(王朝)가 무너지고 한 시대가 무너진다.

한 역사가 무너지고 아아! 명반 벽송이 무너진다.

제행(諸行)이 무상(無常)이로다.

이것이야말로 생멸(生滅)의 법(法)일진대

생멸(生滅)이 멸(滅)로 그치니

아아! 적멸(寂滅)이로세.

새벽이 가까워 올 무렵 다비는 끝이 났다.

이틀 후 박 화백은 그곳을 떠났다.

                                                         -끝-